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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과 청산리전투
leesangmook

 
 

▲IMF 때 돌 금반지를 헌납하는 어머니(한국, 1998년)

 

 

 잘못은 높은 사람이 하고 수습은 낮은 사람들이 한다. 한국 역사의 양상이 다. 다 그렇지는 않고 일부 그런 사례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얼핏 한국의 IMF 사태도 그렇지 않은가. 국가가 부도를 낼 지경에 이르도록 당시의 대통령은 기민하지 못했다. 수습에 나선 것은 국민들이었다. ‘외채상환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혼반지는 물론 돌 금반지도 내놓은 건 서민들이다.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들고 왔다. 김수환 추기경도 금으로 된 십자가를 내놨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금반지를 내놨으니 더 말해 뭐 하겠나. 자그마치 3백50만 명도 넘는 국민들이 너도 나도 동참했다. 석 달 동안 모인 금은 227톤. 18억 달러의 외채를 갚을 수 있었다.


 청산리 전투를 이긴 것도 ‘금 모으기 운동’ 덕분이다. 얘기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충 몇 줄로 줄여야겠다.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20년 10월. 그 몇 달 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약 6만8천 명의 체코 군인들이 집결했다. 사연은 기구하다. 소련과 함께 독일에 대결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그만 전쟁을 중단하고만 것이다. 게다가 무장해제까지 명령했다.

 체코부대는 그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체코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 많은 병력을 유럽으로 수송하려면 42척 이상의 외양선들이 필요했다. 

그 비용을 누가 댄단 말인가.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체코부대는 귀국하면 오스트리아를 몰아낼 참이었다.

어떻게든 수송비용을 자체 조달하자면 유일한 방법이 무기를 처분하는 거였다. 그때 천사처럼 나타난 게 바로 청산리전투를 앞둔 한인 독립군 부대. 만주와 소련에 거주하던 동포들 역시 다투어 주머니를 털었다. 지니고 있던 금붙이를 주저 없이 너도 나도 헌납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체코에 가서 우연히 돌 금반지며 금비녀 그리고 놋쇠요강 까지 발견한 건 그래서다. 놋쇠요강은 그 속에 금붙이를 담아 수송할 때 요긴하게 사용됐으리라. 무기 운반을 위해선 230명의 독립군이 동원됐다. 저마다 등에 한 짐씩 지고 들키지 않게 걸어서 40여 일만에 간도의 청산리에 도착했다.

2천5백 명의 독립군이 5천 명의 일본군을 무찌른 게 청산리전투. 적의 사상자는 3천 명이었으나 아군 사상자는 1백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체코 부대에서 산 소총과 기관총이 본때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너도 나도 헌납한 금붙이들의 위대한 승전가였다.


 한인사회 전체가 모두의 공동재산으로 소유할 양로원의 인수자금 모금 시한이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목표액은 3백50만 불인데 아직 60% 실적 이다.

양로원의 인수 필요성은 단지 노인입주자들이 누릴 혜택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 60 명이나 되는 한인 간호사며 조리사 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알짜 고용기관이다. 한인들을 위한 그만한 일자리 창출이 어디 쉽겠는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금 모으기 운동’의 피가 몇 방울 우리 혈관에도 흐르고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헌금 보낼 곳 : Korean Nursing Home Fund
 130 Dundas St. East #205
 Mississauga, On. L5A 3V8
 c/o Eunice Kim Lawyer's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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