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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leesangmook

 

 

 

 고령화 시대에 ‘노인과 바다’를 읽는다. 이전엔 그런가 보다 했다. 불굴의 의지를 그렸다는 둥 인생의 허무를 상징한다는 둥의 언사들 말이다.


 그 따윈 이제 약발이 떨어진다. 노인이 된 나 자신을 오버랩 시켜보면 이건 심오한 소설이 아니라 외려 엄격한 ‘노인학’의 교과서로 다가온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거대한 물고기 청새치를 잡았는데 끌고 오다 상어 떼들에게 다 먹히고 만다는 얘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954년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상어 떼와 싸울 때 노인은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고 물고기의 뼈만 끌고 돌아오는 장면은 인생의 허무를 보여줬단다.


 노인은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잡지 못했다. 그런 노인의 배를 아무도 타지 않는다. 날 바다로 나가기엔 배는 너무 작고 낡았다. 노인이면 흔히 따라 붙는 신상명세다. 출항하면서 노인은 “바람이 바뀌면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멀리 나갈 거야.”라고 다짐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노인이 되면 명심해야 할 헌법 제1조다. 그 한계를 넘으면 사단이 난다. 저항불능 외부의 세력에 의해 그 한계가 붕괴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모함 때문에 그 한계가 파탄난다.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는 외부 세력이다. 노인으로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자기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거대한 청새치 역시 막강한 외부세력의 일부가 아닌가. 그 물고기는 노인의 배를 2일 동안 먼 바다로 끌고 갔다. 그의 의지와는 달리 자연의 위력은 그를 무모함의 주체로 바꿔버린 것이다.


 근래 모국에서는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시위자들 중에 노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눈썹까지 하얀 사람도 있었고


운동모자를 쓴 노인도 있었다. 무모한 행동들이 더러 연출됐다. 운동모자를 쓴 72세의 노인은 헌재의 선고를 복종하는 것은 노예나 하는 짓이라고 외쳤다.


 지난 10일 탄핵선고가 있었을 때 65세의 어떤 노인은 경찰버스를 탈취해서 다른 경찰차를 들이받았다. 경찰차 지붕에 설치된 스피커가 떨어지면서 72세의 노인이 머리에 맞아 사망했다. 


 또 인근에선 65세의 노인이 쓰러져 사망하기도 했다. 모두 무모하게 앞장섰다가 수난을 자초한 노인들이다.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열정은 청년이나 중년에게 맡기면 어디가 덧나는가. 힘에 부치는 일은 초장에 않으려고 했던 산티아고와는 사뭇 다른 자세들이 아닌가. 


 사람 체중의 10배나 되는 청새치를 배 옆에 묶고 그는 항구로 향한다. 상어 떼의 공격이 네 번 있었다. 첫 번째 공격에서 그는 밧줄에 묶은 작살을 잃었다. 두 번째 공격에서 노에 묶은 칼을 잃어버렸다. 세 번째 공격에서 고기의 반이 사라진다.


 그는 잡은 고기에게 미안해한다. 늠름한 청새치를 잡아 상어 떼에게 좋은 일만 한 것이다. 내가 너무 멀리 나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어.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멀리 나갔을 때부터 이미 내 행운은 깨진 거야. 


 네 번째 공격으로 상어가 떼를 지어 몰려 왔다. 고기는 더 이상 먹을 것이 남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친 것일까. 그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바다에서의 일이 꿈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단지 내가 너무 멀리 나갔던 탓이야.


 살 한 점 남지 않은 거대한 청새치의 등뼈를 끌고 산티아고의 작은 돛배가 해안에 주저앉았다. 무모함의 인증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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