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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한국인이야
kwangchul

 

엄마, 오빠들이 한국말을 못해. 친구의 딸이 대학졸업 후 북미를 여행하는 도중 캐나다에 들러 우리집을 방문했던 때였다. 1987년 고국을 방문했을 때 그 친구 집을 들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여자 아이를 본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큰애가 12살 작은애가 10살 때였다. 그 여자 아이는 20대 중반을 바라보는 요조숙녀로 자라 있었고 우리 애들은 30을 바라보는 청년들이었다.

첫째 애가 토론토, 둘째가 몬트리올에서 태어나며 우리 부부는 바쁜 젊은 부모로 변모되어 있었다. 70년대의 캐나다 이민자 삶은 글자 그대로 눈코 틀새 없는 생활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양육까지 돌보며 사업의 동업자로써 남편까지 챙겨야 하는 대부분의 한인 이민자 부인들의 고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연히 애들은 엄마 아버지가 집에서 쓰는 유일한 언어인 한국말만 듣고는 별 가르침 없이 한국말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데이케어를 보내며 애들이 영어를 못 알아 들으니 집에서 간단한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우리 애들은 그들의 가정에서 영어만을 사용하며 손주 애들도 영어만을 구사한다.

70대 후반을 바라보는 우리 부부는 은퇴하여 영어가 필요없는 세월 속에 살고 있다. 드라마도 한국드라마를 선호한다. 한데 우리가 하지 못하였던 코리언 캐나디안의 교육이 그들의 가정에서 싹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숙명적이다. 그래서 이선희의 인연은 애달픔은 있지만 사랑을 잃으리라는 조바심은 없다. 닮은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이라는 것을 인연은 알고 있기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거기에는 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인 운명의 인연만이 있을 뿐이다.

 과연 사랑의 만남은 필연적인 숙명의 결과일까, 아니면 우연적인 만남의 연장선일까? 전자인 경우 상실에 대한 슬픔은 있지만 결국은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애타는 조바심은 없다. 하지만 우발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그들의 노력이 없이는 그들의 인연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과연 우리들의 사랑은, 혹은 타인과의 만남은 필연적인 마주침일까 아니면 우발적인 만남의 계속적인 이루어짐의 결과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어려운 질문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창조의 비밀이 있다. 하지만 필연성이 우선적인가, 아니면 우연한 우발성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든지 가질 수 있다.

서양 철학사를 들쳐보면 칸트, 헤겔 등을 포함한 플라톤류의 철학자들은 의미가 마주침에 선행조건인 필연성이 우선적이라 주장하였다. 물론 소수였지만 그에 반대하는 비주류의 철학자들이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의미란 우연한 우발성의 마주침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로써 사르트로, 들뢰즈, 마에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아등바등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사랑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해도 어차피 숙명적인 운명적 사랑

인데 조바심을 낼 필요성이 없다.

길거리를 걷는다. 공원에 산책을 간다. 무수한 마주침의 연속이다. 인생살이 결국 이런 마주침의 연장 속에 나라는, 우리라는 인격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너는 지금 어디메 있나~

낙조보다도 더 쓸쓸한 조국아!~

봄날 도라화 같이 활짝 한번 피어 주렴. -이은상(1903-1982)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은 이제 경제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우뚝 서있다. 1970년대 이민초기 고국방문시의 귀국선물로 미제나 일제의 칼라TV는 필수 항목이었다. 그 당시 고국은 흑백TV 시대였다.

여러분들의 자식들의 집을 가보라. 아니면 여기 본토박이 캐나다인의 집을 방문해보라. 한국산 가전 제품은 필수 장만 아이템으로 자랑스러이 자리잡고 있다. 휴대전화, 자동차 등 심지어 드라마까지 캐나다인 생활 구석구석 한국문화는 쉽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 2세, 3세는 자연스러이 자랑스러운 코리안 캐네디안으로써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라고 불러보던 조국은 거기 그렇게 성장하여 우뚝 서있게 되었다.

나는 1974년 봄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을 등지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현실도피였다. 젖과 꿀이 흐르리라는 빠다(Butter)를 향한 선택이었다. 좌절감도 있었고 이민자의 서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내가 선택한 여인인 내 처가 있었고 또한 내 처가가 선택한 그녀의 남편인 내가 있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자연스러이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어떤 만남의 연장선이었다. 너라고 불러보던 조국은 제 몫을 하였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뀐다. 인격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미국 철학자 ‘윌리엄제임스’(1842-1910)의 말이다. 바뀌어야 한다.

 아들아 "너는 한국인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너는 이곳 캐나다에서 심어진 꿈나무인 한국계 캐나다인이기도 하다. 1967년 시작된 캐나다 이민 일세는 고령화 되었다. 거름이 되어줄 때가 다가오고 있다.

변해야 한다. 한국인이 (이민으로) 캐나다 땅을 밟으니 Korean Canadian이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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