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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4)- 거제도 포로수용소-
kwangchul

 

 1952년,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포로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 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종해 폭동을 유발시킨 데 있었다.

 

 1952년 5월6일 제 76 친공포로 막사의 포로들은 경비병에 의한 폭행과 금품수색을 구실로 포로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수용소장 돗드 준장은 면담에 응하게 된다.

 5월 7일 오후에 돗드 장군이 제 76 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 중에 일단의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수용소장이 포로에게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돗드 준장은 인질로 잡힌 지 사흘 만인 5월10일 밤 10시에 풀려나게 된다. 석방 후 돗드 준장의 진술은 이러했다.

 "나는 5월7일 아침, 제 75 포로수용소 대변인으로부터 한 서신을 받았고, 그 서신 내용은 나와의 회견 요청이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 회견 장소인 76 포로수용소 입구로 갔다. 그리고 수용소의 문을 열고 그들의 대표자와 대변인을 문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들은 이 회담에서도 종전과 같이 식량과 피복, 약품 등 기타 물자의 중량을 요구했고(~~~중략), 3시 15분쯤 나는 회담을 끝내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20여 명의 포로 지도자들은 나를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나의 몸을 수색하고 소지품을 빼앗았다."

 

 돗드 장군과 동행했던 레이먼 중령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출입문 기둥에 매달려 버티는 바람에 납치는 모면했다.

 그런데 돗드 장군 및 레이먼 중령에게 달려들었던 이른바 납치범들은 포로 지도자들이 아니라 오물을 버리고 돌아오던 오물처리반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납치를 위해 치밀히 계획하였으며 오물처리반원들도 사전에 은밀히 배치시켜 놓았었다.

 

 포로들이 돗드 장군을 인질로 잡은 이유는 그동안 포로수용소 내에서 있었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이 유엔에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로 돗드 준장은 거제포로수용소 소장에서 해임되었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준장에서 대령으로 계급강등과 함께 강제전역 되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어 1951년 12월 말까지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라 할 수 있다면 1951년 12월부터 1953년 7월까지는 포로를 둘러싼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한국동란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이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휴전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다.

 

 허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중공군 100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태에서 휴전을 수락한다는 것은 한국인에 대한 사형집행이라 하며 휴전을 결사 반대하게 된다. 실질적으로 가장 민감하여야 할 영토문제인 군사분계선 협상은 "휴전협정" 조인 시 접촉선으로 일찍 합의에 도달한 상태라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난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발적 송환 원칙’을 주장한 반면 공산 측은 무조건 ‘강제적 송환 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었던 포로송환 문제는 결국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아 결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 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한 이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하게 된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명령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부평 등 7곳 장소의 반공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여 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여태까지 진행하여 왔던 휴전회담이 물거품 될 수 있는 이러한 휴전무마 사건은 휴전을 고대하던 미국정부를 당황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를 달래기 위한 방책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전후 복구사업에 많은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천백이십구일,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27일에 잔인한 한반도의 전쟁은 정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전쟁의 목적은 무조건 승리에 있다. 적의 취약점을 공격하여 침략자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함으로서 전쟁이라는 도박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승리 없는 휴전과 반공포로가 존재하였던 진실은 불편한 비극의 탄생이다. 하지만 잊지 마라!  반공포로가 없이는 반공포로 석방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비극과 희극은 현재라는 문의 안과 밖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2023년 8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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