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4 전체: 91,915 )
비극의 탄생, 제 2의 육이오-1950년 11월-
kwangchul

 

 

 “은둔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 korea)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목사 윌리엄 크리프스가 영어로 쓴 한국에 관한 역사책 이름이다.

 그는 1870년경 일본에 건너가 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연구에 몰두 하던 중 일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고대로부터 일본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한국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책을 썼다.

 

 마음에 안 들지만 또 다른 구절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 방식 모두 일본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는 관념에서 나온 대조적 발상이다. 따라서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 당시 19세기말 외국인에 비친 이 구절들은 긍정적인 명분 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의 관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평화만이 진리라고 믿어온 한민족, 그래서 5천년 동안 다른 나라를 거의 침략해 본 적이 없는 나라에게는 전쟁은 듣기 싫은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쟁은 우리를 끌어들인다.

2 0세기 중반 1950년 6월25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새벽 기습공격으로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버린다. 그날은 바로 일요일이었다. 종교인들은 교회로, 젊은 남녀들은 야외로, 일부 군인들은 휴가 차 고향으로 내려갔던 그날 한국 민족은 되돌아갈 수 없는 비극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유엔은 1945년 10월24일,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만든 국제기구이다. 자유, 평화, 번영을 상징하는 이러한 청백색의 유엔기가 전쟁터의 포화 속에 휘말려 들기는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그전 1947년 9월17일, 미국은 한국의 자주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한국문제’라는 안건을 제 2차 유엔총회에 제기했다. 당시 미국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발칸반도에서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야심을 보고도 소련을 우방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미국의 안일한 도의적 책임은 소련의 계획대로 김일성을 앞세운 6.25 기습 남침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유엔 사무총딜 ‘트리그브 리’는 한국전이 터진 6월25일, 바로 그날 유엔 한국 대표였던 장면 박사와 미국대표 오스틴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촌각을 다투면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하게 된다. 그 결과는 찬성 9, 반대 1(유고), 결석1(소련)로 유엔의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그후에도 3차에 걸쳐 그해 7월3일 까지 이어진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의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열렸다.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만 행사해 버린다면 어떠한 결의안도 통과될 수 없었다. 한국이나 미국을 위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권모술수의 천재인 스탈린의 지배하에 있던 소련이 그런 좋은 기회를 어떤 계획도 없이 놓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소련의 유엔 대표였던 발라크는 그해 1950년 1월12일, 중국의 본토가 모택동의 중공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상 자유중국(대만)이 보유하고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 이사회의 대표권을 중공으로 넘겨야 한다는 결의안을 이사회에 제출하였다. 그러한 소련의 주장은 찬성 3, 반대 6, 기권 2로 부결됐다. 이에 격분한 소련의 발라크 대표는 이사회의 출석을 거부한다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한 후 회의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4개월 12일 만인 같은해 1950년 6월25일, 북한은 대한민국을 향해 전면 남침을 하게 된다. 6.25가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 이사회를 빈번히 여는 등 숨기쁜 움직임을 벌였으나 소련 대표는 참석치 않았다. 발라크 소련대표가 안전보장 이사회에 다시 돌아온 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1950년 8월1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불가사의 한 일이다. 당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스탈린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이요, 둘째는 일본이며 셋째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세력 재편에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만이 아니라 중공의 모택동의 문제가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요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스탈린은 한국전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공으로 하여금 결전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힘이 약화된 후에 세계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도박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볼 때 스탈린이 소련대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시키지 않은 것은 미-중공간의 전쟁을 유발시키려는 의도가 저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25 전쟁 3개월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공산군들은 괴멸하여 북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선발대는 동북쪽으로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초산까지, 서로는 압록강 하구까지 진격하였다.  따라서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은 압록강 건너까지는 진격하지 않을 것과 중국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수십만의 중국인들은 중공의 정규군이 아니라 지원병이라는 구차한 구실을 붙여 한국전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해, 1950년 11월 이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략으로 야기된 한국 동란은 비록 휴전이라 하나 73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있다.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은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한 그해 11월 한반도의 찬바람 속에 도처에서 격파당하며 무참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새로운 비극의 탄생이었다. 그때 유엔군은 일단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상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중공의 본토를 공격했어야 했다. 당시 세계의 길은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은 스스로 그 길을 포기하였다. -2023년 6월25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