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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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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캐나다 알마교회의 제임스 게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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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캐나다 알마교회의 제임스 게일 목사

 

 

 

  토론토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제임스 스캇 게일(1863-1937)은, 토론토대 YMCA 후원으로1888년에 독립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을 찾았다.

 캐나다 최초의 한국선교사로 파송된 것이다. 그는 “한 아름 안고 왔던 젊음을 조선 땅에 다 부리고, 노구를 이끌고 모토(母土)의 청구(靑丘)를 무덤처럼 찾아갈 뿐이었으며, 40여 성상을 조선 사람과 같이 웃고 울었다”고, 그의 회고록에 썼다.

그 <착한 목자>의 삶과 선교이야기를 토론토대학 유영식 교수님이 자그마치 1천 페이지에 가까운 책으로  두 권이나 펴냈다. 장신대의 임희국 교수는 그 책을 “게일 연구의 결정판”으로 칭송했고, 부산 장신대의 탁지일 교수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게일 관련 자료와 유품들이 유 교수를 찾아오는 이유는 유 교수의 게일 사랑 때문”이라고 서평을 썼다. 

그렇게 찾아온 유물 중에 게일이 쓰던 책상이 현재 유 교수 댁 서재에 있다. 그 책상 앞에서 유 교수는 게일의 화신인 양 <착한 목자> 이야기를 쓴 것. 민석홍 장로와 나는 유 교수 댁을 방문하여 그 책을 받아오며 옛날 호두나무책상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진기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유 교수님의 작업이 성공하도록 영적 충전을 해오신 사모님의 모습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제임스 스캇 게일은 교회 업적도 크지만 문학사적인 공이 더 크다. 그가   한글로 번역한 존 번연의 소설 <텬로력정>은 우리나라 영문학 번역의 효시이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 <신역 신구약전서>를 번역했다. 그러나 번역 원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하고, 윤치호의 후원으로 기독교창문사에서 출판했다.  

 

 중앙YMCA초대회장이었던 게일은 윤치호를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윤치호는1896년 니콜라이2세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의 수원(隨員)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다음에, 서재필 박사에 이어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만민공동회 연설에 모인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노비제도와 신분제도의 철폐, 적서차별(嫡庶差別)과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홍보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의 독립협회 탄압과 민중들의 배신에 이어 고종은 윤치호를 없애려고 자객을 보낸다. 그날 밤중에 현명한 마 부인의 기지로 뒷담을 뛰어넘어 알렌 공사 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후, 추방과 다름없는 덕원감리와 삼화감리로 좌천되었으나 오랜만의 한적한 생활은 오히려 마 부인과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을 갖게해 준다. 그나마도 오래 누리진 못했지만. 그가 덕원감리사로 있을 때, 게일이 살던 원산의 봉수대를 방문하여 게일의 부인과 장모를 만난 기쁨을 그의 일기에 적기도 했다.  

  다시 외부협판에 복직하고 을사늑약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윤치호는 외부협판을 비롯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교회와 사회운동에 전념한다. 조선이 독립하려면 젊은이들에게 교육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

  3.1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중앙YMCA 회장이었다. 그는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아 많은 오해와 지탄을 받았으나, 윤치호 일기(1916-1943)를 부분 번역한 서울대 김상태 교수는 주석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윤치호가 일제의 외압이나 사주에 의해 3.1운동을 반대했던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기 내용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일관된 정세인식에 따라 3.1운동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3.1 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신문에 분명하게 발표하고 그의 일기에도 적었다.  

 

 

 1919.3.1. 토요일 일기, “낮 1시 30분 경. 거리 쪽에서 군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돌았다.”

 1919.3.5. 수요일. “… 게일 박사를 방문해, 일본인들이 외국인의 간섭에 매우 예민한 만큼, 당국자들에게 이번 사태의 해결을 요구하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게일 박사는 일본이 지난 10년 동안 조선인들의 호감을 사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인지, 조선인들에게 다소 동조하는 것 같았다.”

 1919.3.19. 수요일. “경찰 수사관들이 죄수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온갖 종류의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난 이 고통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소창길 목사-임태호회장-유재신 목사-유영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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