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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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6)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예수님이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 하시거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지체”라고 한 데서 각각 공무아를 보게 된다. 


19. 무념행


무아니 공이니 무념이니 하는 것은 사람이 법을 따르게 되어있음을 말한다.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무아는 사람이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르게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심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학습의 원리를 따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불교에 따르면 인연의 힘 또는 연기의 이법을 따르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이나 불이 타거나 꺼지는 물리학적 화학적 현상도 법에 의존하는 것이고,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도 법에 따르는 것이고,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도 법에 따르는 것이고, 뱃사공이 배를 저어 가는 것도 법에 따르는 것이고,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도 법을 따르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따라야 할 법이다. 이는 사람이 우주자연의 법칙에 의지하기 않고서는 일거수 일투족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은 의식하고 있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이러한 법에 의지하여 살게 되어있다. 이것은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아나 공이나 무념은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보게 될 때 깨닫게 되어야 할 조건이다. 자기라는 관념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자기의 몸이 성전이 될 수 없고 또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될 수 없다. 


지금 사람들은 사람 나름으로 시비분별하고 있는 이쪽 땅에서 살고 있다. 이쪽 땅이란 저쪽 에덴으로부터도 떨어져 있고, 천국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저쪽 땅이란 시비분별이 없는 땅이다. 그리고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넓고 깊은 요단강이 흐르고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여 준 모든 행적이 사람의 몸이 성전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될 때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며,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방법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이 무념행이다. 무념행이란 자기라는 고집을 버리고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에 따라 무아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누구나 영생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다. 촛불이 타다가 꺼져도 촛불로 하여금 타다가 꺼지게 한 그 이(理)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도 그것과 같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숨이다. 흙으로 된 인간의 몸은 흩어질 수 있어도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이(理)로 영원하다. 


사람은 자기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흙으로 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란 이전 경험의 쌓임에 불과하다. 물질로 된 몸은 신진대사로 변하여 가고, 마음 역시 새로운 경험과 더불어 변해간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면에서 작동하는 이(理)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순간순간 변하는 몸과 마음을 자기라고 보면 고통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죽은 이후에도 있을 이(理)와 동일시하게 되면 생로병사라는 것도 없고 생로병사에 관련되어 일어나는 번뇌도 없다. 


무념행이란 곧 이(理)가 자신을 온전히 이끌도록 자신을 놓아버리는데 있다. 그것을 선에서는 공의 지혜라 부른다. 자기라는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향유하게 되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뜻한다.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이를 평상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기독교에서 보면 자기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사랑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능력이 된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모든 행적과 기사가 무념행에 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생령이 된 아담의 본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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