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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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9)-인간의 본질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다시 말하면 어떤 영역에서 보다 앞서, 인간 나름으로 만들어낸 신념이나 지식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인간의 본질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기독교에서 이 지식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 논의하거나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합하는 길이며 진리로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물론 기독교는 구약시대로부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를 “불복종”과 “원죄”에 무게를 두는 바람에 정작 인간이 지금도 따먹고 있는 선악과가 가진 독성에 대하여서는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면 인간의 생각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한 몸으로 소통하게 된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참 음식으로 먹고, 자신의 피를 참 음료로 마시라고 하신 것도 인간이 예수님과 한 몸이며, 예수님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성도란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성찬의 본의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믿는다고 말만하면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도 견성에 있다. 견성이란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날 창조주의 형상과 지혜를 그대로 닮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은 “억지로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간교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갈아야 하는지는 예수님도 가르쳐주고 부처님도 가르쳐 준다.


“참 좋은 이웃이 되는 것” 그것 이상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참 좋은 사마리아 인”에서 얻는 단서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인”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이 인간이 만든 명칭이나 제동에 한정되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몸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십계명의 완성임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넘어선 크신 분이다.


예수님의 모습은 제사장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닮아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봤을 때는 예수가 그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 또는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이방인으로 보였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의 모습에는 선악이라는 관념도 없었으므로 누구나 그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예수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의 본심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다르지 않음을 역시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에 묶여 있는 그 족쇄를 푸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자신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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