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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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9)-“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0)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연합의 법칙을 우리가 알게 되면 이 원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불교에서 보면,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분별심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발달되는가를 연합의 법칙을 바탕으로, 십이연기나 오온연기, 즉 유전연기(流轉緣起)로 설명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러한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여 십이연기나 오온연기의 결과인 분별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환멸연기(還滅緣起)란 것이 있다.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환멸연기에 속한다. 


학습 및 행동심리학에서도 동일한 연합의 법칙을 적용하여, 예를 들어 스트레스나 긴장을, 그것과는 반대되는 이완반응을 거기에 연합시킴으로써 통제하거나 소거되게 한다. 


의타기성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속한 법칙이면서도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이 어떻게 발달되고 또한 변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원리로 적용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항상 병행한다는 법칙에 따르면 그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셋째, 마지막의 원성실성은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게 되어있다는 의타기성의 이면에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공이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은 개인을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분으로 보게 될 때 내리게 되는 결론과 같은 것이다. 


지체는 자기라는 것이 없으므로 원만한 전제를 이루게 된다는 깨달음이다. 원성실성은 자신의 행동변화를 요구한다. 원성실성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신을 바로 그 법칙에 일치되는, 공의 도에 던져 넣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선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거기에 있다. 유전연기의 결과인 분별심을 차단해 버리고, 분별심을 가지고서는 바로 보고 바로 체험할 수 없었던 것을 바로 보고 바로 체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지금까지 분별망상에 의하여 가려져 왔고 또한 방해를 받아왔던 본심을 회복함으로써 사회 또는 우주라는 유기체의 지체인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그 결과란, 이전 행동 경험으로 얼룩지고 찌그러진 본심을 본래의 ‘밝은 거울’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견성이라 한다. 그리고 견성의 결과는, 금강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은, “보살이면서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없고,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한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기능이 원만하게 발휘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나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유식삼성은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이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고 있는, 무지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면,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와 같은, 변계소집성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의 지각과 판단이 얼마나 망상에 속한 것임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나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은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만들어 낸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역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 온 전통적 방법은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게 한 아담의 망심, 선악이라는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보고 회개하기보다 죄 없는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 용서와 축복을 바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받치도록 명하신다. 제물이란 본래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도 그러한 피를 흘려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의타기성은 자신이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가지임을 깨닫는 것이고 자신이 교회라는 공동체, 사회라는 공동체에 붙어있는 지체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의타기성이란 연합 또는 연기의 원리를 적용하여 유기체로 비유되는 교회와 사회, 그리고, 자연을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덴으로 변화시켜 가게 할 수 있다.


원성실성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라는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진실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수준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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