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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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2)-“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5.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그러나 아담의 본심으로 보는 하나님은 자신을 무조건 사랑과 용서로 감싸주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그 안에서 안심과 평화를 얻는다. 


 카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것에 분노하여 아벨을 들에서 남모르게 죽였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네 동생은 어디 있는가?”를 물으신다. 카인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하고 되묻는다. 


 지금 우리가 가진 마음이 카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분별적 관념으로 고착되어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담의 본심이 망심으로 첩첩히 가려진 것이다. 이러한 무지, 어둠으로는 본심,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 


 예수님은 어둠에 속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선동에 의하여 움직이던 군중에 의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시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죄는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온다. 


 우리의 마음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도적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도적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고 산다. 그런 마음을 그대로 두고서는 하나님도 자신의 본심도 볼 수 없다. 도적과 같은 탐진치가 본래 성전인 자기의 마음 안에 주인처럼 자리를 잡고 있으니 성전이 될 수 없으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면서 성전을 허물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재건하시겠다고 선언하였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곧 인간 자신이 본래 성전인 자신을 본래의 모습대로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인간 누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체험, 즉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잉태된 본래의 그 모습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서인 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후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신약성서다. 전자의 특징은 제사(祭祀)에 있다. 제사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양이나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제사의 특징은 자기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데서 ‘모든 것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자신을 죽이는데 있다. 속죄를 위한 자기희생 없이 소위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는다는 것은 제사의 형식이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태도가 아니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지 예수라는 제물에 의하여 자신이 구원받을 수는 없다. 


 누가 ‘양의 탈을 쓴 이리’이며 누가 ‘회칠한 무덤’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있다. 이것이 유기체로 비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뜻과 법에 일치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에 따라 사는 법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언행이 모두 십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보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십계명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정죄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이 안식일보다 더 중하지 않으냐?”는 반문으로 율법의 궁극적 목적이 사랑에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의가 사랑과 용서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담의 망심인 선악이라는 관념에 매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은 선악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에 있었다. 


 십계명의 본의는 사람을 선악이라는 지식과 판단으로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인간의 본질로서의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아담의 망심과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에는 선악이라는 관념이 없었으므로 예수님의 눈에는 누구나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음한 여자도, 세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던 강도 역시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만인의 왕이 되신 것이다. 누구라도 아담의 망심, 지금 우리들이 가진 마음, 즉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예수님이 명하신 바와 같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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