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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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해지는 마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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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삼순이 나올 때 따라서 나온 럭키까지 볼일을 보이고 집으로 들어가서 개들 밥을 주고, 삼순이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삼순이를 그냥 두고 올라 올 때가 있다. 나도 잠을 좀 더 자고 싶기도 쉬고 싶기도 해서다.


 그러던 어느 날 몇 시간 잠을 자고 일어나서 나오니 삼순이가 계단 아래에 앉아 있었다. 새끼들 젖을 주고 이내 올라오려 했는데 얼마나 낑낑대고 있었던지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목이 다 쉬었다.


 내가 안고 올라오니 몇 시간 동안 올라오지 못해 속상했고, 엄마도 그런 삼순이 혼자 두고 있어 밉다는 듯 나를 향해 마구 짖어 대었다. 


 때로는 남편도 삼순이 새끼들 하고 같이 자라면서 삼순이를 거실에 두고 올라와서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삼순이는 이내 따라 올라오거나 계단을 올라오지 못하면 아래서 엎드려 있기도, 어떤 날은 방문 앞에 엎드려 있기도 한다.


 어제는 삼순이 눈이 많이 충혈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계단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오르지도 못한 채 많이 울었는가 보다. 그 다음 날 보니 눈이 제대로였다. 


마음대로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해 식구들 손이나 기다리거나, 그러다가 눈치를 보기도 해야겠지 싶으니 점차 거동도 더 불편해지기도, 차츰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이를 어쩌나 싶은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온다.


 그 동안 삼순이를 키우며 즐거웠던 받음의 사랑을 앞으로 톡톡하게 되돌려 주어야겠네 싶으니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어제는 나갔다 들어오니 거실에서 유난히 지린내가 났다. 누가 오줌을 쌌는지 거실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했더니 큰 딸이 설명을 해준다. 삼순이가 베란다에 나갔다 온지 채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거실에다 오줌을 질펀하게 싸 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새끼를 낳은 이후 식구들의 관심과 사랑이 새끼들한테 쏠림을 시샘하기도, 요즈음 들어 부쩍 계단을 잘 오르내리지를 못하게 되면서 거기에 대해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없지도 않고, 그때마다 안아서 올려 주거나 내려 주지를 않는데 대한 불만이 많이 쌓여 있음을 그런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노망이나 치매에 걸릴 나이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그런 삼순이를 보기가 이젠 측은한 마음이 없지도 않지만 싫은 마음이 동할 때가 더 많다. 


 또한 아직까지 럭키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면 좋아서 팔딱거리는 것에 비해 삼순이는 좋아하지도 않고 나간다 해도 많이 걷지도 않아서 자리에 멈추어서 집으로 가자는 빛이 역력하다. 그런 삼순이를 볼 때면 나이는 어쩔 수 없어 이젠 매사가 귀찮아져서 움직이기도 싫은 모양이네 싶은 생각이 든다. 


 삼순이가 새끼들을 낳고 내가 새끼들을 더 많이 예뻐해 주는 것 같은지 어떤 날은 나도 옆에 있다고, 예뻐해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며 파고든다. 그럴 때 삼순이를 보면 그 사이 부쩍 늙어버려 눈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고 눈 밑도 많이 처져 보여 더더욱 추루해 보이는 삼순이가 더없이 측은하고 불쌍해 보인다. 

 

 늙는 것은 서러워


 처연해 보이기는 럭키 또한 못하지 않다. 삼순이가 새끼를 낳은 이후 럭키는 이젠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삼순이는 새끼들 젖이나 먹이고 또 새끼들하고 놀기도, 놀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럭키는 새끼들하고 놀아 주기는커녕 새끼들 다섯 마리가 우르르 쫓아 다니니 무서워서 도망을 치듯 하며 짖어 대기나 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귀여워서 우리 집 꽃 미견이기도, 밖에 데리고 나가도 보는 사람마다 귀엽다고 하였는데 얼굴에 털을 깎아 준 것도 촌스러운데 살도 너무 많이 쪄서 얼핏 보이는 인상으로는 촌 중늙은이처럼 보인다. 


오줌똥을 아직도 제대로 가리지를 못해 벌을 서고 있는 럭키, 그래서 더더욱 눈치나 보고 기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럭키 또한 불쌍해 보인다. 먹는 양이 많아서인지 제 밥을 먹고도 때로는 새끼들 밥까지 먹어서 요즈음은 살이 더더욱 쪄서 얼굴이 말랐을 때보다 한층 더 둔해 보이고 못나 보인다. 늙을수록 식탐만 는다더니 럭키는 먹는 재미로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야 늙고 힘이 없어지고 병까지 들었다면 불쌍하고 가슴 아리는 경우야 일상 보아 온 터여서 마음을 접고자 하면 쉬이 지나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동물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애완견을 키우기 전에는 우선 남의 얘기만 듣고 “애기 키우는 것과 똑 같대요.”하는 얘기들을 한다. 아기를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키우다가 점차 강아지에서 개가 되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하며, 임종까지도 지켜봐 줘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난 그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밖에서 키웠던 개들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캐나다에 와서 처음 키웠던 두리 역시도 그런 생각까지는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 마리 키우고 싶어서 키우게 되었었다. 


 그 다음 삼순이를 키우기 시작한 6, 7년 전만해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고, 딸들이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고 제안했을 때도 손이 많이 갈 것 같아서 선뜻 환영을 하지 못했었다. 


 이제야 삼순이, 벼락이, 럭키가 나이 들어감에 이젠 그들을 보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저 ‘애물단지’들을 어찌 할꼬 싶은 마음이 더 앞선다. 그것은 개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도 점차 무거워지기 때문인지, 게을러져서 그런지, 움직이는 것을 더 싫어하고 눈치는 더 많이 본다. 


 벼락이 같은 경우는 이젠 식구들이 나갔다 와도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러니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 일부러 들어가서 보면 침대에서 자고 있거나, 눈만 멀뚱히 뜨고는 나를 쳐다보거나, 개 껌을 지키고 앉아 있거나 한다. 그런 벼락이를 볼 때면 늙은 할망구 방귀신 되겠네,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고령의 부모를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 갖게 되는 그런 심적인 부담보다는 덜 하겠지만, 개들에게 퍼부어졌던 사랑만큼이나 이젠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고 짠하게 자리잡아올 때가 더 많다. 그것은 아마도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들이기에 더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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