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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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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6)-1812년 전쟁 전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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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인구 2만 정도 되는 플라츠버그에 가면 플라츠버그전투 역사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8월 24일 워싱턴을 불사른 라스 영군은 수일간 정부는 물론 시민 재산까지 약탈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발티모어 산업항구도시 함락작전을 세우고 5,000명의 라스 영 육군은 발티모어에서 동쪽으로 13KM 떨어진 노스포인트를 통해 발티모어로, 카크레인 영 해군은 19척의 함대를 이끌고 발티모어에서 동남쪽 5KM 떨어진 작은 섬에 위치한 맥켄리 요새를 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11,000명의 매리랜드주 의용군은 새뮤엘 스미스 소장 지휘하에 발티모어의 각 요새 방위태세에 들어갔다.

 

노스포인트 전투(1814년 8월12일)

9월 12일 오전 영 해병 1,000명을 포함한 5,000명의 영 정규군은 노스포인트에 도착하여 발티모어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잔 스트리커 준장 사단은 3,200명의 의용군을 지휘하여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찾아 발티모어와 노스포인트 중간지점인 햄프스테드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점심 휴식 중인 영군에 포격을 가하며 영군 선발대와 접전을 시작했다. 포 소리를 들은 라스가 점심을 팽개치고 접전지역을 향해 나섰다가 미 소총저격부대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그는 군 지휘를 아서 브룩크 대령에게 넘기고 숨을 거두었다.

오후 3시 브룩크는 영군을 재정비하고 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훈련된 미군 소총부대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미 포병대는 포탄이 떨어져 못, 자물쇠 등을 포함한 고철을 넣고 포를 퍼부었으나 단련된 영군에 숫자적으로 밀려 스트리커는 일목요연하게 발티모어로 퇴각했다.

브룩크는 퇴각하는 미군을 미국의 방어선까지 추격했으나 철통 같은 미 방어진을 목격하고 겁에 질려 햄프스테드 힐로 퇴각하여 영 해군이 맥켄리 요새를 함포 사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전투로 영군은 46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95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미군은 24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89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특히 이 전투로 유럽에서 명장으로 이름 떨친 라스 소장의 전사는 영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맥켄리 요새 전투(1814년 9월 13-15일)

조오지 아미스테드 소령은 1,000명의 의용군을 지휘하여 맥켄리 요새를 재구축하고 성곽의 포를 영 함대를 향해 조준했다.

9월 13일 카크레인의 영 함대 19척이 맥켄리 요새를 접근했다. 아미스테드는 중거리포로 영 함대를 포격하여 영 함대는 미 포병대의 사정거리 밖으로 퇴진하여 장거리포와 로켓트포로 25시간 동안 1,800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철통같이 구축한 요새는 경미한 타격을 받았다.

카크레인은 주야로 함포사격을 하며 영 해병대가 미군의 포격을 피해 요새 서쪽해안상륙작전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4일 이른 아침 예상외로 요새에는 매리 피케스길과 그의 13세 된 딸이 만든 세로 30피트, 가로 42피트 초대형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낮같이 밝은 섬광을 일으킨 함포사격에도 요새는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받은 영 해병대는 본선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1년 이상 방위책을 구축하고 단결심과 애국심으로 가득찬 1만명 이상의 미 의용군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브룩크는 노스포인트로 퇴각하여 카크레인 함대로 돌아와 미 남부 뉴오얼린스항으로 항해했다.

이 전투로 미군은 4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4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발티모어 전투

이상 2 전투는 발티모어 전투라고 불리고 100% 주 의용군이 세계최강 영 정규군을 퇴각시킨 역사를 만들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영국으로 하여금 1814년말까지 겐트 평화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발티모어에 가면 맥켄리 요새 국립역사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다.

 

미국 국가 성조기

35세의 프란시스 스캇 키 변호사는 미 포로해방을 위해 영 함대에 머물면서 영 함대의 메켄리 요새 함포사격을 관망하고 특히 25시간의 함포사격에도 14일 이른 아침 대형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을 목격하며 애국심에 가슴을 적시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1절

오 국민이여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어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널찍한 띠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은

창공에서 포탄의 붉은 섬광과 작렬하는 폭탄 속에서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라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는지 알려주오

자유와 땅과 용사들의 고향에서

(2, 3, 4절 생략)

 

이 가사는 1773년 영국의 잔 스태포드 스미스가 작곡한 아나크리온에 편곡되어 1889년부터 미 해군군가로 불린다. 1931년 후버 대통령에 의해 미국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전까지 미국 국가는 영국 국가를 미국내용으로 편곡해서 불렀다.

성조기의 가사 내용은 평화와 자유는 투쟁에서 승리하여 지켜지는 것을 강조한다. 농경사회 이후 부족간이나 국가간 인류역사의 평화는 오로지 투쟁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인류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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