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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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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4)-1812년 전쟁 전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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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814년 9월21일 이이리 요새 포위전투에서 영군을 퇴각시킨 미군은 영군을 추적할 수 있었으나 조오지 이자드 소장의 늑장으로 드러먼드 영군을 항복시킬 기회를 놓쳤다. 10월 15일 온태리오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이 미군의 보급을 차단하여 이자드 미군은 10월 17일 이이리 요새를 파괴하고 미국 새키츠항으로 퇴각하였다. 이이리 요새를 재탈환한 영군은 폐허가 된 요새를 재건하지 않았다.

 

영해군의 체사피크만 봉쇄

1812년 이후 영 해군은 600척의 함대로 전세계 해양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중 85척은 핼리팩스에서 플로리다까지 대서양연안을 선회하고 있었다.

1813년 3월 웰링턴 장군은 미국 델라웨어주, 매리랜드주, 버지니아주 연안을 잇는 체사피크만을 봉쇄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미 대서양지역을 관할하는 알렉산더 카크레인 영 해군 중장을 지원하도록 조오지 코번 영 해군소장을 파견했다. 코번은 메리랜드주 프렌치타운을 비롯하여 세 개의 작은 도시를 불태웠다.

이에 대비하여 7월 저슈와 바니 미 함대사령관은 소형 전투함대를 건축하여 대응을 하였지만 계속 몰려오는 영 해군 함대에 역부족으로 체사피크만을 지키지 못했다.

1814년 4월 나폴레온을 패배로 이끈 웰링턴은 체사피크만을 통한 미국 침공의 특명을 내리고 대륙전투에서 공을 세운 라버트 라스 소장과 전투경험이 풍부한 2,500명의 영군을 파병하였다.

8월초 버뮤다 영 연방에 도착한 라스는 버뮤다에 상주하는 미국의 전 노예출신인 흑인 해병대 200명과 버뮤다의 영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체사피크만에 도착하였다.

침투지역은 카크레인이 영 해군 중장이 결정해야 했다. 결국 워싱턴 미국 수도를 공격하기로 결정되어 8월 19일 라스의 영군이 매리랜드주 베네딕트에 도착하여 8월 21일 나팅햄에 집결하였고, 카크레인의 영 해군에 몰린 바니 미 소형함대는 전투함을 불태우고 워싱턴으로 퇴각하여 영 해군은 체스피크만을 완전 봉쇄하였다.

 

블라든스버그 전투(1814년 8월 24일)

7월초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영군이 미국의 산업도시 매리란드주 발티모어를 공격할 것이라 믿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스토니크릭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와인더 준장을 워싱턴 수비사령관에 임명했고, 만약을 위해 워싱턴의 중요한 서류나 비품을 갖고 버지니아주 리스버그로 피난을 했다.

달리 매디슨 국모는 폴 제닝스 흑인노예와 함께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프레임에서 떼어내어 다른 귀중품과 함께 보존하여 현재까지 미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6,370명의 미군을 지휘하는 와인더는 8월 23일 새벽 2시 반에 워싱턴으로 향하는 교각을 불태웠다. 8월 24일 로켓포 부대를 갖춘 라스의 4,500명 영군은 남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정오에 얕은 강변을 건너 교각을 지키는 미군을 격퇴시키고 워싱턴 북동쪽 12KM 떨어진 블라든스버그에 진입하였다.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포 부대를 둔 미군은 진입하는 영군을 퇴각시키고 수비 할 수 있었으나 지휘관 재질이 결핍된 와인더는 훈련이 잘되지 않은 미 의병들을 통솔할 수 없어 용맹스럽게 진격하는 영군에게 왼쪽 수비진이 흐트러지고 영군에 포위되자 와인더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후퇴작전을 세우지 않아 일부 통신전달이 되지 않은 극소수 미군은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영군은 워싱턴까지 확 터진 길을 일사천리로 진격하였다. 이 전투로 영군은 전사자 64명을 포함하여 250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미군은 20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190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인구 9,400의 블라든스버그에 가면 전쟁기념비를 볼 수 있다.

 

불타는 워싱턴

오후 늦게 워싱턴을 점거한 영군은 시민들의 주거지를 제외하고 워싱턴 의사당과 대통령관저 등 모든 공공건물을 불태웠다. 1813년 4월 27일 미군이 캐나다 온태리오주 요오크(현 토론토)시를 불태운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해석된다. 미 역사는 이 사변을 미국의 치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워싱턴시는 재건이 되었고 의사당을 비롯하여 대통령관저는 흰 석조건물로 변신되어 백악관으로 불려지고 있다.

1814년 8월24일 이후 미 합중국 수도 워싱턴은 2001년 9.11테러 공격을 받을 뻔 했지만 무사했다.

207년 후 2021년 1월6일 소시오 사이코패스로 알려진 트럼프의 노골적인 암시로 수백 명의 공화당 골수분자들에 의해 미 의사당은 테러공격을 받아 한 순간 점거되었으나, 미 정부는 침입자들을 몰아내고 형법으로 처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 의사당 침입사건 주모로 탄핵 검거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치욕으로 세계역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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