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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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생애(9)-온전한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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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며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장사 되니라.”( 25: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 11:8-10)

 

이삭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할 때 아브라함은 140세였다.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하였으며, 그녀가 아들 여섯을 낳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사라가 죽은 후 이삭을 리브가와 짝지어 주고,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재혼하여 살면서 다가오는 죽음에 대비하지 않았나 싶다.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고, 그두라의 아들들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주어 먼 동방으로 보냈다.

 

이삭과 그두라의 소생들이 함께 있으면 일어날 수도 있는 형제들 간의 갈등을 방지하며, 그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염두에 둔 조처였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그의 오랜 광야생활을 뒤돌아보며 생을 정리하는 시간도 가졌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다 1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란 말은 아브라함이 천수를 누리고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마감했음을 뜻한다. 하란에서도 어느 정도 고생을 했겠지만 75세에 그곳을 떠나 광야에서 100년 동안 아브라함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한 마디로 그는 험하고, 위험하며,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야 했으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오를 여러 차례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어떤 난관이나 역경에 처해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신은 이삭과 이스마엘에 의해 그의 아내 사라가 잠든 막벨라 굴에 안장되었다. 천수를 누린 복된 삶을 살고,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 의해 인생의 동반자 사라 옆에 잠드는 복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장사됨으로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가의 가족묘지가 되었으며, 후일 이삭도 그의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에 의해 거기 묻혔다. (창 35:29)

 

성경은 막벨라 굴에 장사되는 아브라함을 “그가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약속과 축복을 아들 이삭에게 넘겨 주고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다.”(창 15:15)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조상의 반열로 들어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홍수 이후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에 의해 번성되었는데,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인 세라의 아들이었다. 데라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 있는 갈대아 우르에서 낳았다.

 

거기서 성장한 아브라함은 사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들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 하란이 아들 롯과 딸 밀가를 낳고 일찍 죽은 후 조카 롯을 맡아 양육해야 했다.

 

데라는 가족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루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던 중 하란에 이르러 머물다 205 세로 생을 마감했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거기서 살며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75세 되던 어느 날 아브라함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1-3)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란에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고 있는 아브라함은 거기를 떠나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들도 그의 처지와 입장에서 판단하면 이루어지기 힘든 것들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그 말씀대로 해야 할 까닭은 별로 없었다.

 

아브라함이 결정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하란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는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 인간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충성할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하신다. 그런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운영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인생의 목표를 자신이 원하는 것 아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는데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위해 살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기로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때까지 하란에서 이룬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신 것은 75년 간 자기를 위해 살던 삶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인생은 그를 위해 살라고 명하신 것이다.

 

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거기서 얻은 모든 재산과 종들을 거느리고 가나안을 향해 떠난다.

 

아브라함에게 “순종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해박한 신학적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

 

믿음은 순종에서 나오며, 순종함으로 증명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고통과 멸시와 치욕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결과였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하란 땅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순종의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기에 그를 택하여 아담과 하와가 그에게 불순종함으로 상실한 에덴동산을 인간들에게 돌려주실 인류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가갈새 갈 바를 모르고 나갔으며”라 기록했다. “갈 바를 모르고 나갔다.”란 말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따라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아닌 찬란한 영광의 하늘나라를 향해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약속 받은 낯선 땅으로 가서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나그네처럼 천막생활을 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여 세우신 견고한 하늘의 도성을 바랐음이라.”라 말해준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하란을 떠나 광야의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은 여러 번 인간적인 과오와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두 번이나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 사라를 동생으로 행세하게 했으며, 사라의 생각에 동조하며 그녀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며 이스마엘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00년 이란 긴 세월을 광야에 살면서 아브라함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의 최고봉은 모리아산에서 그가 이삭을 장작더미 위에 눕히고 칼을 높이 처든 장면에 나타나 있다. 바로 그 순간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이 행동하는 믿음으로 이어진 위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떤 난관에 당하여도 뒤돌아보며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긍정적이고 인내하는 믿음의 소유자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자기를 떠난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갔을 때 사병 318명을 동원하여 10,000명에 달하는 그돌라오멜의 정규군 주둔지를 급습하여 롯과 소돔 백성들을 구해냈다. (창 14:1-16)

 

하나님이 그를 위해 싸워주신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렘 왕과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전하고 돌아오는 그를 축복할 때 아브라함은 그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다.

 

그의 백성들을 구해준 것을 감사하며 “백성들은 돌려주고, 전리품은 가지라.”는 소돔 왕의 제의를 아브라함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을 제외한 모든 전리품을 그에게 주었다.(창 14:17-24)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성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독교의 거성일 뿐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도들도 받들어 모시는 인물이다. 이같이 아브라함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교인들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일꾼으로서 지녀야 할 온전한 믿음을 구비하고 맡은 바 사명을 충실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진정 위대한 신앙의 인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친구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친구 아브라함”(사 41:8)이라 부르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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