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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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올바른 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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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에게 보이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16:16-18)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기는 했지만 구제와 기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금식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일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금식했다.(마 9:14; 눅 5:33)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때문에 예수께서 금식도 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에게 금식에 대해 가르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마 9:14)라 요한의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이 들려주신 대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때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나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말씀하셨다. 그가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하지 않을 것이나, 그가 세상을 떠나간 후에는 그의 제자들도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이 답변과 예수께서 올바른 구제와 기도에 관해 가르치신 후 금식에 관해 말씀해 주셨다는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금식을 구제나 기도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그 자신이 40일 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는 사실로부터도 예수님이 금식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식”은 글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건강상태나 다른 여건에 따라 금식 중이라도 소량의 음식을 취할 수도 있으며, 금식기간도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금식기간 동안에는 목욕을 하거나, 지나치게 몸을 단장한다든지, 화려한 옷을 입는 행위는 삼가는 것이 상례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속죄일에는 필수적으로 금식을 해야 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하였던 금식을 살펴보면 범국민적으로 속죄일에 행한 금식 외에도 개인적으로 슬픔이나 애통에 잠겼을 때 혹은 범한 죄에 대한 속죄의 표현으로 금식을 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외의 기록에 의하면 야곱의 장자 루우벤은 그의 동생들이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파는 것을(창 37:18-28) 막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7년간이나 포도주나 좋은 음식을 삼가는 금식을 행했으며, 시므온도 요셉을 이스마일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괴로움으로 2년간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로부터 유대인들은 마음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나 범한 잘못을 회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금식을 하곤 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에겐 금식이 범국민적인 슬픔이나 참회의 표현인 경우들도 있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간에 벌어진 비극적인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에 모여 눈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며(삿 20:36), 하나님께  범죄한 연고로 블레셋의 핍박을 받게 되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불러 모아 금식하며 기도하게 했고(삼상 7:6), 느헤미야가 백성과 함께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그들의 죄를 자백하게 한 것(느 9:1)들은 모두가 민족적인 죄악을 회개하기 위한 금식기도였던 것이다. 


 성경 전체를 놓고 살펴보면 금식은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자신을 부인하고 단련하며 훈련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심각한 고뇌에 빠지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슬퍼하며 금식한다. 


 느헤미야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백한 것이나(느 9:1-2),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금식한 것(욘 3:5), 그리고 다니엘이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금식기도 한 것(단 9:3-19)들은 하나님 앞에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기 위함이었다.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 예수님과 만난 후 성안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한 것”(행 9:9)도 철저하게 나춰서 한 금식기도라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는 헤어 나오기 힘든 극한상황에 처하면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곤 한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나의 제자들도 금식할 것이다.”(마 9:15)라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금식과 회개”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면, “금식과 기도”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연유로 금식하든 간절한 기도가 없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한 40일 금식기도도(출 24:18),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이 진격해 올 때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공포한 것”(대하 20:3), 왕비 에스더가 하만의 간계로 멸족의 위기에 처한 유다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가기 전 수산 성내 모든 유다인들에게 3일간 금식을 명한 것(에 4:16), 에스라가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스 8:21)한 것들 모두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엎드리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광야에 들어가 드린 40일 금식기도는 진정한 금식기도의 의미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금식기도를 드렸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할 때 행한 금식기도가(행 13:1-3) 그 대표적인 경우다. 


 특수하게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믿는 자들의 권리이며 의무이며, 이 귀중한 특권을 금식하며 행사할 때 하늘보좌를 음직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나추는 것”과 더불어 또 다른 금식기도의 특성은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려면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피나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인생이란 경기에 출전한 우리들도 우리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달리지 않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해준다.(고전 9:24-27)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은 금식은 절제를 위한 필요하고도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식욕은 인간의 기본욕구 중의 하나지만 과식은 우리 몸을 해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생각할 때 금식은 구제나 기도와 더불어 우리의 믿음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올바른 금식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며, 우리의 영력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바리새인들은 구제와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금식까지도 자기네가 최고라고 인정받기 위해 “슬픈 기색을 보이며, 얼굴을 흉하게 하며” 위선적으로 행한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들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의 상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겐 “너희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일러주신 것이다. 


 이는 금식을 위해 특별히 몸을 꾸미라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처럼 생활하면서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바를 허락해 주신다는 말씀이시다.


 금식의 목적은 우리를 선전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나추고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나가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목적으로 남들이 알지 못해도 은밀한 가운데 금식하면 우리의 관객이 되어 박수 쳐주는 이들은 많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우리가 조용히 행하는 금식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길가에 오가는 숱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그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의도적이고 위선적인 금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한 분만을 관객으로 모시고 아무도 모르게 참된 금식을 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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