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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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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백경자 수필)

 

 

 나의 첫 시련

 

 1967년,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오던 그해 겨울은 엄청난 폭설이 내렸고 2월 초 추위는 내 마음까지 얼게했다. 쇼핑센터마다 쌓아놓은 눈은 내 생애 처음 만나는 눈산 들이었다. 나는 여행 가방하나 달랑 들고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에 오타와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시외버스 정류장를 찾았다. 목적지는 오타와 종합병원.

 

 나는 이 병원에서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목을 맡고 계신 한국 신부님께 나의 의사를 말씀드리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곳에서 멀리 떠나야만 하는 나의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민 오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준비한 영어에 그런대로 자신을 갖고 있었는데 첫 직장에서 당면한 나의 언어구사에서 예스와 노의 구별까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버렸으니…

 

 내 머리는 텅빈 항아리처럼 되어 갔었고 그 스트레스를 받는 육체는 하루하루 힘겨운 직무에 시달렸다. 내가 가지고 온 자존심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매일 경험해야하는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고동소리가 내 가슴을 망치질로 두둘겨대는 듯한 순간들, 남몰래 양손에 고이는 식은땀은 나 자신만이 느끼는 공포의 세계였다.

 

 더 이상 나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 빨리 떠나는 것이 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야 하고 수없이 혼자말로 중얼대곤 했다. 오직 내게 편한 사람들은 어린아이 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 환자와 달라 나의 제한된 언어로서 대화가 가능했고 그런대로 나를 편하게 해 주었기에.

 

 그곳에서 친구도 몇 사람 사귈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적 여유로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매일 힘든 근무가 끝나면 밤에는 버스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가서 다시 시작한 영어공부, 남들은 새 이민자라는 명목아래 생활 보조금까지 받으면서 이 나라 말을 공부하는데 나는 내 자존심이 그것마저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이곳을 떠나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손짓, 발짓을 하더라도 영어공부를 해야했기에 찾은 곳이 온타리오주 북쪽 끝에 위치한 매라숀(Marathon) 이란 작은 시골 병원이었다. 인구가 약 500 가구가 되는, 목재로 유명한 시골 도시이다. 이 도시는 우연히 간호잡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나를 대환영하며 오라는 해답을 받은 곳이다.

 

 새로운 나라에 온 나는 어디를 가든 별다를 게 없는 처지였으니 반갑게 승낙하고 이곳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 줄도 모르고 떠났다. 친구들과 송별인사를 나눈 후 완행 기차표를 사서 거의 2틀 동안 달려가야 하는 거리였다.

 

 여행하는 동안 처음 내가 만난 두 백인 청년들은 혼자 여행하는 젊은 동양 여인을 희롱하기위해 무섭게 나에게 접근해 왔을 때 얼마나 공포에 떨며 당황했던가! 이 젊은 남자들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아무런 방어책이 없었고 제한된 언어, 새로운 문화에 부딪친 나의 첫 시련이었다.

 

 다행히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차는 끝없이 호수를 끼고 이어진 꼬불꼬불한 길을 쉴새없이 연기를 뿜으면서 달려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슈페리오 호수와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 문화와 언어가 생소한 이곳에 와서 혼자 선택한 이 여행을 어떻게 해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나는 어머니와 언니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점점 떨어져 나를 보호해줄 누구도 없는 곳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힘든 선택이 먼 훗날 내가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기에 이 낯설고 외로운 선택의 길을 감행 했었다.

 

 이곳 병원은 내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일터였다. 부족한 언어로 일터에 나갔지만 그것이 내가 하는 일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수 없었다. 주 환자들은 인디안 원주민들이었고,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백인들이었다.

 

 출산을 하기위해서 오는 산모들, 칼부림으로 상처입고 밤늦게 응급실로 오는 원주민 환자들, 천식으로 들어오는 어린아이 환자들, 다양한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닥치는 대로 돌보면서 쏟은 나의 열정은 무한했다.

 

 이곳에 단 하나밖에 없는 60병실의 작은 병원, 영국에서 온 간호사 2명과 나를 포함해서 3명, 몇 명의 보조간호사와 함께 일했다. 리사라는 항가리언 보조간호사는 쉬는 날이면 항가리언 굴라쉬(Goulash)를 만들어 놓고 나를 자기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특별한 날이면 나를 한 식구로 잊지 않고 대접해 주던 행정을 보던 미스 호프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 내 일생에 이곳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로는 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출산을 돕는 일도 거침없이 하곤 했다.

 

 이렇게 시골병원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커다란 스트레스 없이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어떤 특정 병실을 맡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곳 어디서나 근무를 하면서 실무에 유익한 새로운 간호 지식과 언어를 배워갔다.

 

 쉬는 날이면 나는 갈 곳이 없었고, 혼자 기숙사에서 그림을 그린다든가, 성당을 가든가, 주위를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10월이 되면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보라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쌓이고 쌓인 눈은 내 키를 넘곤 했다. 긴 겨울을 지나야 하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으로 다가왔다.

 

 내가 외로워하는 것을 눈치 챈 간호원장 미쓰 맥나마라는 가끔씩 “미스 전, 나하고 도시로 놀러 갈래요?” 하며 나를 데리고 큰 도시인 지금의 선드베이로 가서 구경도 시켜주었다. 나의 짧은 언어에도 우리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었고, 또 가슴을 열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기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캐나다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 그리고 그곳에서 체득한 많은 실무경험은 다시 체험하지 못할 젊은 시절 나의 모험의 재산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지금 이민 오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나의 도전이었지만 그 어려웠던 결정을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때 나는 사무치게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외로움을 가슴깊이 체득했지만 그 갈등의 선택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공부를 더 하고픈 열망 때문에 이곳 토론토로 내려왔을 때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한 사나이, 나의 가슴속의 온갖 뼈저리게 경험한 외로움을 달래준 나의 남편, 이런 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 아닐런지…옛 추억의 보따리속을 살며시 펼쳐 보면서... (201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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