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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논란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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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한다. 나무에게, 돌에다, 때로는 역사 속에 등장했던 유명한 인물에게. 기도는 닥쳐온 재난 앞에서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다. 인간은 존재의 허약함과 삶의 불확실성을 기도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지난해 9월 유명 목사의 초상집에 찾아간 대통령 선거 야당후보의 어깨에 목사들이 단체로 손을 얹어 안수기도를 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도록, 대통령 후보로서 한국 교회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도록 주께서 함께 해달라"고.

최근에는 야당후보의 밀짚인형을 찌르는 주술행위를 여당후보 캠프 관계자가 했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인간의 욕망이 기도라는 행위로 드러나는 현장이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M. 바운즈가 쓴 책 '응답되는 기도'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치병에 걸렸던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해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바운즈는 "히스기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죽음 문제도 그의 믿음과 기도에 의해 즉시 바뀌었다. 끈질긴 기도는 아주 강력하고 어찌할 수 없기에 그것은 약속들을 받으며. 하나님은 약속에 근거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손에 맡기신다"고 적었다.

그는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실 일을 행하도록 한다"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 순수한 기도는 절박한 상황들을 면제시킨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기도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해악들을 없앨 수 있다"고 덧붙인다.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만병통치약, '강청 기도의 능력'처럼 인간들이 작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하늘보좌가 심하게 휘청거리고, 신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게 기도의 능력이라는 주장이다.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런 설명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동의하기 어렵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교회마다 열리는 새벽기도에 하나님께서 모두 응답하신다면 명문대학은 전부 기독교인 학생들로 넘쳐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누구나 히스기야처럼 간절히 기도해서 수명이 연장된다면 기독교인들의 평균수명은 비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길어야 한다.

오히려 기도는 자신의 기특한 행위를 통해 원하는 것을 모조리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심보, 인간의 욕심과 죄성을 폭로하는 장치다. 밥을 굶으면서, 목숨까지 담보로 걸어서라도 신을 이겨내겠다는 수작의 본질을 드러낸다.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히스기야의 아들은 므낫세다. 그는 열두 살에 왕이 된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서 고침 받은 뒤 태어났다는 계산이 나온다. 히스기야에서 대가 끊기면 다윗의 자손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산된다.(마태 1장10절)

히스기야는 반드시 살아야 하고, 아들을 낳아야 했다. 히스기야가 살아난 것은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 기도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병을 주시고, 기도를 토해내도록 만드신 데 있다. 히스기야는 신실하게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원된 조연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들이 기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쓰셨다.

히스기야가 대단히 가치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말년에 스스로 증명했다. 그는 병이 낫자마자 바벨론 사신들에게 유다 왕국의 금은보화를 자랑했다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받는다. 그의 몸에서 태어난 므낫세는 유다 왕 가운데 손꼽히는 폭군이 된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던 그는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히스기야는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생명 연장의 기적을 체험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했던 인물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통해 모든 인간은 '죄인 중 괴수'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바운즈의 설명과는 달리, 인간들의 희망과 다르게, 제 아무리 성도가 지극 정성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창세 전에 이미 완료된 하나님의 뜻이 바뀔 수는 없다.

그분은 성도의 기도에 맞춰 언약과 뜻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기도의 주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도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그러니 기도는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자신의 밑바닥을 박박 긁어 토해내기 위해서다. 아무리 성취하고, 쌓고, 채워도 도무지 만족되지 않는, 무저갱같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다. 무속 논란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 8장)

 

* 필자의 책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부크크 출판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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