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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그리스도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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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팔불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자신이 ‘몹시 어리석고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팔불출은 틈만 나면 자식, 마누라, 부모, 고향, 학교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런 면에서 솔직히 팔불출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이처럼 자랑하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특별하다. 그는 30대 초반에 회심하며 이 책을 썼다.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죄로 점철된 매 순간을 아프도록 처절하게 토해냈다.

어거스틴 뿐만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록을 써야 한다. 특히 구원받은 성도라면 그리스도 예수 앞에 참회록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던지는 질문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최종 완성본인가. 이 물음은 '고백록'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흔히 기독교는 '성화'를 강조한다. 고백록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다. 예수를 믿고, 복음을 경험한 뒤, 엉터리 삶을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마침내' 살아냈다는 식의 간증이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거듭하면서 점차 죄와 멀어졌다는 고백을 내놓고 싶어한다. 어거스틴의 고백록도 그런 면에서 팔불출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육신을 가진 인간의 부족함은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를 더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도덕과 윤리적 차원이 아닌, 세상의 왕 노릇)는 육신을 통해 끊임없이 분출한다. 다윗과 솔로몬 등 수많은 성경 속 등장인물이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진정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라고 하면 인생 말년에 더 처절한 고백록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는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을 통해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화와 성숙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집요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제1권 '유소년기 첫 십오 년간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죄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젖 먹는 아기조차도 질투하고 시기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서" 인간의 죄악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시편 51편 기자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이 종이 언제 어디에 있었던 간에 죄가 없었던 때가 있었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도 인용한다.

어거스틴의 통찰력은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대목 곳곳에 드러난다. 그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고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또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똑 같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런 나를 보고서 '잘했다'고 맞장구를 쳤다"고 회고했다. 선을 추구한다는 인간들의 기준이 얼마나 자기 입맛에 맞춰 왜곡돼 있는지 지적한다.

청년기를 회상하는 어거스틴은 자신이 죄에 빠져 사는 동안 묵묵히 침묵하신 주님을 묵상한다. 어거스틴은 "주님은 가르치시기 위해 슬픔과 괴로움을 주시고, 고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상처를 주시며,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성도를 죽이심으로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역설을 통찰한다.

어거스틴이 20대에 추구했던 것은 명예와 정욕이었다. 고백록 8권에서 그는 자신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 육체를 거스르나니"(갈라디아서 5장)라는 말씀의 한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정욕의 습성, 원수 마귀가 자신을 장악해서 쇠사슬로 묶고 있다는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기 싫어서 등 뒤로 던져놓았는데 주께서는 자신 실체를 코 앞에 들이밀면서 그가 얼마나 추악하며, 뒤틀려 있는 존재인지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셨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런 역겹고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럼에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회심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의지를 동시에 갖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강력히 원하지 않는 것도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마침내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했다.

 "집어 들고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음성을 듣고 성경을 펼쳤으며, 로마서 13장 13~14절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구절을 읽는다.

회심 후 그가 내놓는 고백은 이것이다. "나의 행위들에 악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까. 나의 말들에 악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까. 나의 의지에 악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까."

어거스틴은 AD 386년 회심한 이후 교회의 지도자로 신학의 토대를 닦고, 여러 저서까지 남겼다. 30대 초반에 회심한 그는 70대 중반까지 살았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회심 이후 삶이 궁금해진다.

사도 바울의 고백록을 들어보자.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이던 30대 청년 사울은 예수를 만나고 회심한다. 신학자 프랭크 틸만이 설명하는 신약서신서 기록 연대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비교적 초기다.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사역 중반기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 스스로 일컫는다. 그리고 A.D 68년께 로마에서 처형되기 직전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한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시간이 갈수록, 사역의 성취가 늘어날수록 바울 자신에 대한 자의식은 낮아지고 쪼그라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자기를 소개하던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죄인 중의 괴수"로 전락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하고 "달려갈 길을 마친" 디모데전서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고백했다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바울의 인식은 정반대로 흘렀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장면에서 야고보, 요한 형제와 함께 빠짐없이 등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2장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내려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는 급히 자리를 피한다. 그때 바울은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를 '호되게 꾸짖었다'고 전한다.

당시 베드로의 심정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3년 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보고, 부활은 물론 예수님의 승천도 직접 목격한 베드로다. 사도행전 도입부에서 불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들이 무서워 달아났다". 성령께서는 굳이 그 장면을 바울을 통해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베드로의 고백록은 이것이다.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라며 진심을 다해 주님을 따랐으나 십자가 앞에서 그는 달아났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할 수 없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기 잡으러 떠나버렸다. 예수님 승천 이후 초대교회에서 한 번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후에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또 도망쳤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였다. 베드로의 삶은 성화를 향해 나아갔다기 보다 죽는 순간까지 수시로 추락을 경험하는 삶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반드시 받아내시는 고백록은 이처럼 가혹하고 처절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곳에서 발견된다. 성경을 통해 발견했다고, 내 삶을 통해 복음을 실제로 살아내고, 말씀을 전했노라고 자랑하는 그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부정당함을 통해 ‘팔불출 성도’의 고백록이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언약에 따라 그분께서 택하신 성도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신다고 미리 공지하셨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요, 복음이다. 세상에는 적어도 어거스틴보다 훨씬 도덕적,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은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그들이 아니라 방탕했던 어거스틴이다. 그것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세상을 경륜하실 때 마음에 계획한 대로 행하시는” 그분의 주권에 따라서다.

전적으로 타락해버린 인간들 가운데 일부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퍼부으시고,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간과하신 후에, 그들만 의롭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시고, 그분의 나라로 끌고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취하신 십자가 사건이다. 인간들이 내놓는 도덕과 윤리에 오염되지 않도록, 오로지 그분의 은혜, 십자가의 피로만 완성하신 성도의 삶이다. 그래서 성도의 자서전은, 어쩌면 예수께서 '대신' 써주신다.

* 필자의 책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부크크 출판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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