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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금이로소이다(중)
allellu

 


 유대인들은 늘 화려했던 다윗 왕국의 부활을 꿈꾼다. 여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택한 백성답게 강력한 힘을 갖고, 세상의 중심에 서겠다는 의지다.

현대 교회 안에도 이런 신앙이 적지 않다. 병 낫고, 부자 되고, 자식들 출세하고. 그것을 위해 헌금하고, 봉사하고, 선교도 간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복음과 무관하다. 메시아는 세상의 힘을 쟁취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박해를 당하고, 죽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의 요구로 세워진 왕 사울이 망한 뒤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등장한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사도행전 13장21~23절)고 전했다. 

 

 다윗은 세상이 원했던 왕 사울이 망하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징검다리였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이유로 사울과 다윗의 행적에서 잘잘못을 따져 점수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윗의 삶에서 무언가 배워서 그대로 따라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은 인간이 내놓은 훌륭한 일과 잘못을 저울대에 올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이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의미는 다윗이 골리앗을 단번에 때려 눕혔을 때나 자신을 죽이려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너그럽게 살려뒀을 때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윗이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이고, 그의 처 밧세바를 범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의 삶이 아들 이삭을 죽여 제사 지내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가는 여정이었다면 다윗의 생애에서 하이라이트는 밧세바와의 사건이다.

 

 다윗의 신앙고백은 시편 51편에 잘 집약돼 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죄인들이 내놓는 공통된 신앙고백이다.

 세상 꼭대기에 있음을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임금’이라는 존재감을 마구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아니면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단말마 같은 비명이요, 또 환희의 찬양이다.

 

 다윗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불러 동침한 이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죄를 지적했다. 그때 다윗이 참회하면서 부른 노래가 시편 51편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구하면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2절)라고 고백했다. 또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자신의 출생과 본질에 대한 정확한 자각이다. 죄는 평생 다윗을 따라다녔고,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죄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의롭다고 여겨주심이 아니면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자인식이다.

 그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7절)라고 외친다. 우슬초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를 때(출애굽기 12장22절) 사용했다. 레위기 14장에서는 부정한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데 우슬초와 피가 등장한다. 민수기 19장에서는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희생제물로 바칠 때 우슬초와 백향목, 홍색실이 동원된다.

 

 우슬초는 흠 없는 어린 양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수난 장면(19장29절)에서 우슬초가 등장한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우슬초에 매달아 예수의 입에 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속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신 피 흘려 죽을 때만 성취될 것임을 앞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것이 꺾으신 뼈다. 

  다윗은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2장46절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민수기 9장에 등장하는 유월절 관련 율법도 “이월 십사일 해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 대로 지키라”(11~12절)고 하셨다. 

 

 꺾으신 뼈와 관련된 이야기는 시편 34편으로 이어지는데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19~20절)라고 기록한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의 덫을 피해 몸을 의탁했던 아비멜렉 앞에서 위기에 빠졌다가, 미친 척하는 임기응변으로 도망한 뒤 지은 시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시편 34편이 말하는 의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유월절 율법을 통해 말하듯 하나님께서 모든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유일한 의인은 죄 없으신 예수님이다. 

 

 유월절 어린 양과 다윗이 노래한 의인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 19장32~36절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다리는 꺾였으나 예수님의 뼈는 온전히 보존됐다고 기록한다. 로마시대 십자가 형을 당한 죄수는 군병들에 의해 모두 다리가 꺾였다. 죽음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수님의 뼈는 성경의 언약 성취를 위해 마땅히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했다.

 다윗이 시편51편에서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한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반드시 뼈가 꺾이고, 저주 받아야 할 죄인들이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모든 사람의 뼈는 하나님께서 친히 꺾으신다. 다윗은 멸망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뼈가 꺾인 죄인들에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인들이 닮고 싶어할 만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뼈가 꺾여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윗 왕국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살고 싶어하는 교회는 그래서 미몽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을 읽어보면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그가 당할 고난과 흘려야 하는 피에 모아져 있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 부크크출판사 중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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