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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14)
Imsoonsook

 

만실라-레온(20일차 / 20 KM)

 

 

 


 순례길에 오른 지 어언 이십여 일째 접어들었다. 푸석한 눈밭을 헤치며 피레네 산맥을 기어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다. 거북이 걸음으로 두 계절을 넘어서니 뿌듯함과 함께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날들이 그림자 되어 내 뒤를 따른다.


초보 순례자를 그토록 고생시키던 발의 물집도 이젠 굳은살로 박혀 견딜만하고 겉돌기만 하던 묵직한 배낭도 신체의 일부분인양 착 달라붙어 중심을 잡아준다. 내 삶을 지탱하는 일용품들을 온전히 내 몸에 실어서 천천히 살아보리라는 애초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며 하루하루의 고통을 인내로 다스리며 나아가고 있다.


 오늘은 큰 도시 레온(Leon)에서 그 동안 누적된 피로도 풀고 에너지도 충전 할 겸 평소보다 짧게 일정을 짰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매일 바뀌는 낯선 잠자리와 끼니를 더할수록 허기를 부르는 순례자 식단으로 강도 높은 행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감내해야 할 부분임을 인지하며 적응해 왔으나 현저히 떨어지는 체력은 어쩔 수 없다.


 모처럼 휴일을 맞은 기분으로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매일 노상에서 일출과 일몰의 경이로움을 체험했던 그간의 떨림은 잠깐 접어두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즐거운 소일거리를 떠올리며 경쾌한 걸음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시기라도 하듯 코스는 왜 그렇게 오르내림의 연속인지 반나절 동안 가해지는 운동의 강도는 하루치와 다를 바 없었다.

 

 

 

 


느슨해진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서울에서 온 W씨 부부와 앞다투어 난코스를 해결해 갈 즈음 우려했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우의를 꺼내 입으며 앞 뒤 동행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일상처럼 우의를 챙겨 입고 묵묵하게 가던 길을 계속한다. 


그런 모습들이 한없이 고독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자유롭게 보이기도 한다. ‘처연한 아름다움’을 이끌어 낸 빗길의 주인공들, 오늘 하루 모두 편안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행들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출발점에 섰던 사람들이다. 몇 구간만 안보여도 혹시 탈이 난건 아닌지 염려되어 그들의 안부를 수소문하고, 어쩌다 같은 숙소에 들기라도 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꼭 같은 길을 걸었어도 각자 체험한 세계가 다르다 보니 대화의 끝은 쉽사리 나지 않은 채 다음을 기약하기 일쑤다.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신앙심 고취, 한 걸음 도약을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도전,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등 다양한 이유로 고행의 길에 들어섰건만 이내 그것들마저 내려놓고 오로지 걷기에 함몰되어 버린다는 요지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쪽에서 서쪽 끝으로 이어지는 팔백 킬로미터 순례길의 중간 지점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부르고스(Burgos)에서 그 동안 함께 했던 다수의 순례자들이 빠져나간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길은 풍성한 움직임으로 생기가 넘친다. 


새로운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그룹이 있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다섯 명의 프랑스 할머니들로 구성된 일명 ‘할미꽃 그룹’은 만날 때마다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여 지루함을 덜게 해 주었다. 


평균 연령이 칠십 세라는 그들은 일 년에 보름씩, 삼 년에 걸쳐 순례길을 완주할 계획이라며 지친 기색이라곤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비결을 물었더니 십 수 년 동안 프랑스 전역을 돌며 함께 하이킹을 다닌 결과라고 했다. 건강과 친구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할 아름다운 시간들이 함박꽃처럼 화사하게 클로즈업 되어왔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레온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섰다. 아직 아득한 거리지만 오랜만에 입성하게 될 대도시가 얼마나 반가운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늘 복잡한 곳이 싫다고 하면서도 막상 떠나 있으니 그리움이 배가되어 오전 내내 청사진만 그렸다.


우선 순례객들이 많이 몰리지 않는 시가지 초입에다 정갈한 숙소를 마련하고 곧장 슈퍼마켓으로 가서 쇼핑을 해야겠다. 쌀, 삼겹살, 채소, 과일 등등. 그 동안 잊고 지냈지만 결코 놓지 못한 식품들을 마음껏 요리하여 거나한 상을 차리리라. 


그리곤 모아둔 옷가지들을 손빨래 하여 뒤꼍에 널어야겠다. 언뜻언뜻 비취는 햇살이 얼마나 도와줄지 알 수 없지만. 내일은 에너지 충만한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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