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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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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5)-1812년 전쟁 전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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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프렌치 타운 전투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기 위해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장은 미 북서부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북진을 하였다. 디트로이트요새는 테컴서와 브락 소장 대신 헨리 프락터 소장이 수비하고 있었다.

해리슨과 합동작전을 맡은 제임스 윈체스터 준장은 해리슨 본진 군대와 작전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봉을 앞세워 1812년 1월 18일 디트로이트에서 서남쪽으로 56 KM 떨어진 레이진 강가의 프렌치 타운까지 진격을 하여 교전 끝에 원주민전사를 포함한 영군을 퇴각시켰다.

프렌치타운을 점령했지만 원주민 연합전사들과 프락터 영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1월20일 해리슨은 미군 2개 보병단을 지원하면서 다음 작전을 위해 윈체스터에게 프렌치 타운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된 윈체스터는 수비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해리슨의 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의 프렌치 타운 점령소식을 접한 프락터는 샤니족을 포함한 인디안연합전사 800명과 영국정규군 600명을 통합하여 1월 21일 전투준비를 완료하였다. 테컴서는 와엔다트족의 라운드헤드 추장에게 원주민전투를 맡겼다. 1월22일 동이 트기 전에 원주민 연합전사와 영군은 미군에 기습공격을 하여 무방비상태의 미군은 혼비백산하여 병동에 있던 400명 미군 중 220명이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원한에 찬 라운드헤드 전사들은 사살자의 소지품을 뺏고 두피를 벗겼다.  

윈체스터는 속옷차림으로 미군147명과 함께 라운드헤드의 포로가 되었고 도주하다 잡힌 미군은 원주민 손도끼로 학살당했다. 일부 용감한 켄터키 소총부대는 끝까지 수비를 감행했지만 탄약이 떨어지고 선봉장이 포로가 되어 무조건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프락터는 미군 부상병을 병동에 놔두고 해리슨 본군을 피해 프렌치타운을 떠났다.

1월 23일 라운드헤드는 남은 부상병이 가득찬 병동에 불을 지르고 포로를 모두 학살하였다. 이 참극은 미시간주 최대 참극으로 켄터키 정착인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은 ‘레이진강을 상기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도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해리슨은 디트로이트 탈환작전을 중단했다.

 

요오크(현 토론토)침공

181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소수의 군대로 브락 장군이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온타리오와 이리 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의 소형 전투함들이 필요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킹스턴과 요크항에 조선창을 세우고 전투함을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아이삭 찬시를 해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뉴욕주 새키츠항구에 조선소를 세우고 소형 전투함들을 건조하였다.

1813년 1월 국방부장관직에 새로 취임한 잔 암스트롱 주니어는 온타리오 호수의 군사적 장악을 강조하고, 4월 1일 미 정규군 7천명을 새키츠항구에 배치하여 찬시로 하여금 킹스턴을 장악하게 하였다.

찬시는 소수의 영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킹스턴을 장악했다. 암스트롱은 킹스턴 에서 후퇴한 영군의 재탈환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헨리 디어본 소장을 미 북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킹스턴을 영구히 장악하게 하였다.

찬시와 디어본은 킹스턴에 이미 6천명의 영국 정규군이 상주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실제로 정규군은 600명밖에 안 된다고 보고하는 킹스턴에서 탈출한 미 병사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킹스턴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은 시간이 걸리고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반면에 브록 장군 사망 후 허술한 요오크 항구를 쉽게 점령하여 쾌거를 올리는 것이 계속 패배를 하는 미군의 사기를 올리고 정치적으로도 민주공화당의 입지와 체면을 세우는데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후에 요오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24일 출격한 미군은 26일 요오크가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형 전투함대에 1700여명의 보병을 지휘하는 제뷸란 파이크 준장이 선봉대가 되어 요오크를 접근하고 디어본 사령관은 매디슨 함상에서 관측지휘를 하고 있었다.

4월 27일 미 해군 소형 전투함대의 산탄포격 엄호를 받고 벤자민 포사이트 소령이 이끄는 300여명의 소총부대는 요오크 서쪽 하이파크 지역에 첫 번째로 상륙하였다.

전사한 브락 장군의 후임자 라저 헤일 쉬프 소장의 명령을 받은 300여명의 영 정규군과 300여명의 캐나다민병대 및 50명의 원주민 전사들은 현재CNE지역인 요오크 요새로 계속 상륙하는 미군의 숫자가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 계속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어 요오크 동부 돈밸리를 흐르는 리버 목교를 불태우고 강 동쪽으로 후퇴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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