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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과 이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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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공군비행단에서 이등병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매주 수(?)요일은, 전투체육의 날이었다. 각 대대별로 오후가 되면 필수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스포츠 활동에 참가했다. 
부대 지휘관, 참모들도 운동을 했는데, 그날은 소프트볼 시합이 있었다. 비행단본부 소속 사병 몇 명이 심판으로 차출됐다. 

 

별 하나를 단 비행단장이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팀 투수는 최대한 치기 좋게 아름다운 궤적으로 볼을 던졌고, 단장의 배트는 힘차게 돌았다.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파고들며 강하게 굴러간 공은 내야를 벗어나 외야까지 나갔다. 신이 난 비행단장은 1루를 돌아 2루로 향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2루타가 될 만한 타구는 아니었다. 지휘관 팀의 수비수가 볼을 잡아 재빨리 2루로 뿌렸다. 하필 재수 없이 2루심을 보던 이등병은 그대로 아웃을 선언했다. 볼이 2루수 글러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도 한참 뒤에 비행단장이 베이스를 밟았기 때문이다. 
그때 투수를 하던 대령급 간부가 소리를 치며 득달같이 2루로 뛰어왔다. 세이프라는 것이다. 그는 “이등병 XX, 심판 똑바로 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새가 날아갈 때처럼 양팔을 퍼덕거리며 호통을 쳤다. 만약 공격팀에서 판정 시비를 걸었다면 어쨌든 이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명백히, 비행단장을 상대하던 수비팀의 투수였다.
비행단장도 멋쩍었는지 허허 웃으며 아웃이라고 쿨하게 인정했다. 주심을 보던 같은 내무반의 눈치 빠른 고참 병장이 이등병을 2루심에서 바로 뺐다.

 

군대 안에서 원스타 준장과 이등병의 간격은 이런 것이다. 장교와 사병은 책임과 임무,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반 상식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신약성경 바울서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특히 에베소서 1~3장 사이에 이와 유사한 표현은 무려 19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안에서”라는 말을 여러 각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 표현이 어떤 신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신분, 다른 말로 그들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 “안에서”라는 단어를 끄집어 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신분 때문에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고, 창세 전에 선택을 입었으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살아났으며, 상속자가 되고, 예수의 피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믿음과 확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기준으로 안팎을 구획할 때, 어떤 방식으로 신분이 나눠지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남는다.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 2장6~8절에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안으로” 빨려 들어가 신분이 확정된 자들에게 은혜가 부어진 것은 하나님의 선물 때문이다. 인간들의 행실이나 자격 조건이 아니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이 부분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 따지면 여기에 있다. 그런 예수가 있는 천국이라면 불러도 안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며, 기독교 안에서 조차 복음을 믿었으면 바르게 살아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표적이 등장한다. 소문이 나자 많이 사람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 중에서도 “이 말이 어렵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어렵도다’라는 단어에는 ‘거친, 딱딱하고 굳은 마음, 냉담한’ 등의 뜻도 담겨 있다. 예수께서 설명을 제대로 못해 듣는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의미보다 그냥 예수의 말에 동의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도 예수를 떠났다. 예수 안과 밖의 현실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현장이다.

 

그런데, ‘선물’이라는 단어에는 전제가 있다.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선물이 맞지만, 헬라어 ‘도론’에는 예물, 희생제물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희생의 토대 위에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위해 ‘죄를 대신 지시고, 자신을 내어주시고, 고난을 담당하신’ 성자 예수의 일이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는 그래서 오병이어의 떡으로 사람들에게 먹혔다. 그 예수의 십자가와 그곳에서 흘린 피를 통해 “예수 안”이라는 구획이 획정된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복음으로 믿으라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떠나는 게 일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구약성경 미가서 7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의 면목 없지만, 행복한 외침을 풀어놓는다. 
“내 원수야,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서 미리 흐뭇해 하지 말아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 참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내가 주님께서 행하신 의를 볼 것이다. 그때에 내 원수는 내가 구원 받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나를 조롱하던 그 원수가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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