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이며 학식, 사회적 지위까지 완벽했다. 교육 분야에 평생을 헌신했고, 사립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자라 의사, 변호사가 됐다.
종교심도 깊었다. 재산을 털어 도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지역에 개척교회를 여럿 세웠다.
은퇴를 하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던 어느 날, 예상 못한 불행이 찾아왔다. 평소보다 컨디션에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길어야 몇 달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평소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의 젊은 목사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나 병문안은 거절 당했다. 당분간 조용히 있고 싶다는 가족들의 전언이다. 목사는 “기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갑작스런 불행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이후에도 몇 차례나 병문안은 거절됐다. 이제는 목사가 혼란스러워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목사는 교회 장로들과 함께 병원으로 또 찾아갔다. 병실 앞에서라도 기도하겠다며 가족들을 설득했다. 간신히 병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환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병실 안에 들어가 “장로님” 하며 불렀지만 휙 돌아누울 뿐 말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당혹스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예수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소.”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성격이 좋아 주변에 사람들이 들끓었다. 손 대는 사업마다 잘 됐다. 엘리트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로 수시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권에서까지 러브콜이 이어졌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인생은 한 순간에 삐끗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한 사업은 순식간에 부도로 이어졌다. 그렇게 주변을 맴돌던 선배 후배들은 하나 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가정 불화까지 찾아왔다. 의지할 곳은 평소 좋아하던 술뿐이었다. 그렇게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대학후배가 목사로 있다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예배당에서도 술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설교시간에 꾸벅이며 코를 골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설교 내용이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복음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알코올 중독자였다.
어느 날 밤새 술독에 빠져있다가 주섬주섬 챙겨 입고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다. 교회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다 목사와 마주쳤다. 악수를 나눴고, 그는 마음 속에 품었던 한 마디를 쭈뼛쭈뼛 꺼냈다. “예전에는 제가 왕이고, 예수는 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는 꽝이고, 예수님이 진짜 왕이시네요.”
두 이야기는 직접 눈으로 보거나 겪은 것은 아니다. 어느 책에서인지, 설교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다. 그러니 스토리도 완벽한 팩트는 아닐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형벌을 받았구만 하고 짐짓 설레발을 칠 것이다. 그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대개 호화롭게 잘 먹고, 잘 살면서 불쌍한 거지 나사로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탐욕스런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래서 교회의 설교도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베풀자”로 결론 내려진다. 이런 생각에는 ‘나는 반드시 천국에 가겠다’는 꼼수가 숨어 있다. 예수와 성경과 믿음까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결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인간들의 욕망이다.
누가복음의 흐름을 보면 15장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의 비유가 잇따라 등장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길을 잃은 양이나 집 떠난 불효자식, 탕자가 아니라 목자와 아버지다.
그리고는 16장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가 있고, 이어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지킴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16장15절)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공박하셨다. 이 ‘미움’(브델뤼그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사전을 보면 ‘혐오, 우상숭배’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어 16절에서 눈 여겨 볼 단어는 ‘침입’(비아조)이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쳐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진입해 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는 ‘강제하다, 강제로 모여 들어가다’로 풀이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인간 사이에서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 놓치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 문장은 16장25절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내가 가진 물질적 재산(좋은 것)을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착한 행위를 통해 인간들은 나중에 혹시 받게 될지도 모르는 고난과 괴로움을 미리 피하는 사전조치를 취하고 싶어한다.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더 나아가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포장한다.
여기서 부자가 받았다는 ‘좋은 것’은 헬라어로 ‘아가도스’ 즉 ‘선한, 좋은, 은혜’다. ‘거지’라는 단어는 경제적 빈곤을 의미하는 ‘페네스’가 아니라 ‘완전히 파산한, 부서진, 의지하고 사는’을 뜻하는 ‘프토코스’가 쓰였다. 누가복음 6장20절에서 예수께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실 때 사용한 바로 그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존재의 표본으로 나사로가 등장하는 것이며, 그가 받은 ‘고난’은 ‘카코스’라는 단어로, ‘무가치한, 유해한, 악한’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 받던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 즉 ‘파라칼레오’(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를 받는다.
부자에게 주어진 ‘괴로움’은 ‘오뒤나오’라는 단어인데 ‘슬퍼함, 애도’ 등의 의미다.
아직 죽지 않은 형제 다섯이 걱정된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고, 회개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권함’은 ‘페이도’라는 단어로 ‘화해하다, 권면하다, 확신하다’는 의미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해도 인간의 결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옳다함,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 만을 이야기하며 무가치하고, 유해한 존재로 취급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초청을 받는다. 그것이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의 삶이다. 그들이 ‘강제로 모여’ 천국에 침입하게 된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는 자들의 결말은 슬픔과 애통뿐이다. 그들의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를 모독하는, ‘스스로 옳다 하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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