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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이야기
allellu


#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계명을 지켜라."

관원이었던 청년은 대답했다.
"내가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 청년을 보셨다.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 부자가 있다.
그가 소유한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내 영혼에게 이르되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성경에는 부자들 이야기가 많다. 심지어 부자인 교회도 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원인과 결과, 노력과 보상. 이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다. 그것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믿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아예 도식화 한다. 예측 가능한 설명, 그래야 사람들이 편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것을 투영한다. 
노력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때 군말이 없다. 노력 없는 보상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 성경 대로 지키면 영생 얻는다. 기도 열심히 하면 응답 받는다. 남들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주신다.” 

 

이것이 인과율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세상에 속한, 종교로서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 설교가 실제 난무하고, 그런 성공담이 간증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런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했던 부자는 돈 많은 사람을 의미할까. 
부자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는 자부심을 재산으로 챙겨 갖고 있었다. 
소출이 풍성했던 부자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착각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은 수치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자아에 도취돼 있었다. 

 

부자들 에피소드에서 핵심단어는 ‘소출’, ‘영생’, ‘계명’ 등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내가’이다.  
사람들은 ‘내가 계명을 지킨다’거나 ‘내가 재산을 모았다’거나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능력까지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부자 청년은 계명을 지킬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도 은근히 과시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 지킴의 대원칙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정리하셨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의 율법지킴은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난다.

 

재물을 많이 쌓아둔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자신의 영혼까지 편히 쉬면서 먹고 마시길 원했다. 그러나 영혼의 소유권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나는 부자’라고 너스레를 떨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었다’는 수치스런 책망을 들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세상이 기대하는 인과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아니 기독교가 선포하는 ‘은혜’라는 복음 안에는 인과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의인과 악인, 종교인과 비종교인,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버린다. 오직 ‘예수’라는 두 글자만 남는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무소유의 삶을 이를 악물고 실천했다 하더라도 그 보상으로 영생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여기 세상에 존재했던 어느 부자의 고백이 있다.  
구약성경 전도서를 남긴 솔로몬의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서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 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와,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라.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라.”(8장17절~9장3절)

 

부자 청년 이야기의 결론은 예수께서 요약하셨다. 
“그런즉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두려움에 찬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답하셨다.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원인, 동력,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솔로몬이 쓴 전도서의 내러티브도 이렇게 이어진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9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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