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조준상 (로열르페이지 한인부동산 대표)

JOHNCHO
71E92F97-878A-4808-BA06-3D3EF2F3364D
79787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34
,
전체: 64,898
Korean Real Estate Post
1995 Leslie Street Toronto ON. M3B 2M3
Web: www.budongsancanada.com
메뉴 열기
JOHNCHO
JOHNCHO
95967
18284
2022-05-26
JC칼럼(100)-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7)

 

(지난 호에 이어)

 원래 부동산 중개회사란 비서진과 경영진 이외엔 모두가 코미숀 스플릿으로 페이가 나가기 때문에 일반 월급을 지불하는 회사와 다르며, 세일즈 하시는 분들이 더 좋은 조건이나 아님 다른 사정에 의해서 회사를 옳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도 내심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의 곁을 떠날 땐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너나 나나, 좋거나 싫거나 서로를 떠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누가 내곁을 떠난다는 것이 마음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아프고 서러운데 아마도 사람이 늙어가고 몸이 쇠약해지면 누가 나를 떠난다는 것이 더 겁나고 두려워지는가 보다.

 

 원래 글이란 남이 읽어줄 때 의미가 생기고 남이 이해할 때 빛이 나는 법인데 도대체 필자의 칼럼을 누가 읽기나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면 원래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적도 없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또 살아왔건 우리 모두의 삶이 어느 쪽으로 향해지건 전혀 관심이 없는 세월은 덧없이 흘러 벌써 2022년도 거의 반년이 지나가는 6월이 되어 버렸다.

 

 원래 봄과 가을이 없는 이 나라는 올해도 역시 갑자기 찾아오는 Sudden Summer가 시작되면서 각 가정이나 직장에도 Air-Con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아직은 서늘할 때도 있긴 하지만 곧 우리는 언제나처럼 너무 덥다며 가끔씩 짜증을 내곤 하지만 그래도 지난 길고 또 길었던 겨울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더구나 지난 2년간 Covid-19 속의 겨울은 우리 노년들에겐 너무나 혹독하고 매서운 또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Covid의 규제가 많이 풀려서 음식점들은 물론 각종의 모임들이나 스포츠 업계도 활기를 띠고 있어 보기가 좋다.

 

 다만 필자가 파트너와 경영하는 골프장엔 Covid 때와 달리 손님이 많이 준 것이, 이제 골프가 아니라도 각종의 스포츠를 여기저기서 즐길 수 있기에 또 각 골프장마다 Covid 때처럼 골퍼들이 몰려들 줄만 알고 가격을 대폭 상승시킨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한편 날마다 치솟고 있는 인플레와 아직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가 꼭 필요한 식자재 값은 물론 석유값 역시 리터당 2불 이상으로 올려놓아 차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혼잡한 시내를 떠나겠다며 또 Covid 시절의 재택근무로 출퇴근이 필요 없다며 416지역을 떠난 일부 사람들은 이제 또다시 출근이 필요한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매번 지불해야 하는 기름값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위로 아래로 출렁거리는 부동산 동향은 우리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고 건축자재 및 인건비는 물론 계속 오르기만 하는 모든 물가들 역시 우리 서민들의 주머니를 울리고, 이젠 친구들이나 혹은 손님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한끼 해도 몇 백불은 아주 쉽게 나오는데다 세금 13%, 또 거기에다 10%의 팁 문화는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계산 결제기 자체에 15%, 20%, 25%로 찍혀 나와 버리니 우리 소비자들에겐 별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

 

 물론 식당에서 고생하며 일하시는 분들에겐 마땅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지금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꽤나 어수선하고 불안한 것 같지만 우리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언제 불안하지 않고 어수선하지 않을 때가 있었을까?

 

 언제나 싸움과 투쟁의 연속일 뿐 그 어느 한때도 평온한 때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기에 우리 역시 평범하게 매일매일을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삶에 꼭짓점을 찾으려 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필자는 이렇게 지금까지 지난 50년 동안 캐나다 이민생활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이제 벌써 세 자식들 모두가 40대 중년이 되었고, 두 아들 중 하나는 정치를 한다며 정말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지런히 정치일은 물론 또 요즈음은 선거운동까지 정말 눈코 뜰새 없는 시간들에 매달려 살지만 매달 받는 월급은 사람과 처지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지만 보잘것 없는 것 같다.

 

 신발이 몇 켤레나 닳도록 온종일 남의 가정 문을 두드리며 한표 한표 호소하며 부탁하고 또 사정까지 하는 모습이 많이도 안타까운 생각에 가끔씩 말리고 싶은 생각도 불현듯 떠오르지만 그래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고 또 기꺼이 마다않고 저렇게 열심히 뛰는 것을 보면 대견한 것도 같아 말리고 싶던 마음을 접고는 한다.

 

 원래 이 나라 정치나 또 투표에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 우리 일부 한인동포들이나 한인 종교단체들에게 정치하는 자식을 둔 아비로서 투표 부탁을 해보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770
18284
2022-05-19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6)

 

(지난 호에 이어)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tavern
 Where we used to raise a glass or two

 Remember how we laughed away the hours
 And think of all the great things we would do

 Chorus!

 Then the busy years went rushing by us
 We lost our starry notions on the way

 If by chance I'd see you in the tavern
 We'd smile at one another and we'd say

 Chorus!

 Just tonight I stood before the tavern
 Nothing seemed the way it used to be

 In the glass I saw a strange reflection

 Was that lonely woman really me

 Chorus!

 Through the door there came familiar laughter

 I saw your face and heard you call my name

 Oh my friend we're older but no wiser

 For in our hearts the dreams are still the same

 Those were the days my friend

 We thought they'd never end

 We'd sing and dance forever and a day

 We'd live the life we choose

 We'd fight and never lose

 Those were the days, oh yes those were the days
 La la la la.

 필자가 많이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인데 Mary Hopkins가 지난 1968년에 부른 아주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한 인생 스토리가 4절의 노래 한마디로 아주 잘 표현되었다. 작곡도 잘하였지만 작사 역시 기가 막힌 노래다. 

 

 이런 노래를 들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며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선술집에 모여앉아 저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의기와 패기가 넘치고 마치 세상은 모두가 우리들 것이고 누구에게도 져보거나 질 생각도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성숙과 환경들이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고 저마다 외쳤던 꿈들과 큰소리들은 각자들의 바쁜 삶속에 잊히고 또 사라져버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가 늙어가고 예나 지금 여전히 변함없는 우리가 매일 출근하던 그 선술집이긴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에는 왠지 낯이 설고 어색한 그 선술집 유리창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그 옛날 패기 넘치던 모습이 아닌 한 노인으로 변해버린 모습은 나를 많이도 놀라게 하고 막상 그 선술집 안에 들어서니 어떤 낯선 노인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돌아보니 아! 바로 그때 그 친구들 중 하나인 바로 그놈, 역시 그놈이나 나나 늙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나 지금이나 망상과 헛된 꿈속에서 헤매는 철부지는 변한 것이 없다는 내용인데 필자에게는 정말 마음에 와닿는 노래이다.

 

 우리의 선배님들이나 아님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늙어가면서 쥐었던 손을 펴고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으며 살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이며 또 이제 와서 알았다 하더라도 진정 그 일이 행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재산이나 사업 또는 자식들까지도 결국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헤어져야할 운명이라면 결국 내손에서 놓아주고 보내야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언젠가 떠날 때는 모두가 빈손일 수밖에 없기에 생긴 말이며, 뿜어내는 담배연기를 주먹 안에 잡을 수 없듯이 이왕 보내야 한다면 잡으려 안달하지 말고 또 나중에 말고 지금부터 서서히 놓아 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지난 40년간 부동산회사에 종사하고 경영을 하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고 또 새 사람 등을 맞이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었는데 아마도 필자가 수십 년 동안 경영하는 사이에 회사를 거쳐 간 분들이 거의 1천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렇게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일부는 다른 회사에서 지금도 일을 하시고 있고 일부는 업계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 등 많이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필자를 떠나신 분들 중에 몇 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회사 경영자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혀 상상치도 못한 그리고 내심 믿고 좋아했던 동료가 떠날 때는 마음이 많이도 아프고 또 섭섭한 일들이 가끔씩 일어난다. 돈과 이해관계보다는 헤어진다는 것이 서글프고 또 싫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601
18284
2022-05-12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5)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한국에서 23년 간의 삶을 살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캐나다에서 시작된 이민생활은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참으로 고독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원래 한국에서 막일을 해본 것이 아니었기에 이곳에서의 공장생활은 어딜 가든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없던 필자에겐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필자에게 육체적으로 많이 힘이 드는 일이었고, 또 가족이 없고 혼자였던 나에겐 갑자기 헤어졌던 친구들을 더 생각나게 만들었다.

 

 혹한 겨울날 눈보라가 치고 영하 25도를 넘나드는 꼭두새벽에 공장에 출근키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그때의 시절은 필자를 깊은 향수병에 젖어들게 했는데 어떤 경우엔 밤 12시에 일을 시작해 아침 8시에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것이 당시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그 자리에 서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필자가 했던 일들 역시 별일이 아니었다 생각이 든다.

 

 당시에 필자가 받은 시급은 약 $1.60 정도였고 오버타임을 하게 되면 $2.40 이상을 받으니 당시 돈이 많이 필요했던 필자에겐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며, 그러다 보니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여러 달을 지내며 힘들었던 공장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쯤에 어느 지인의 소개로 당시에 한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Becker라는 편의점에 매니저로 취직이 되었고 그래도 주 7일 근무에 또 장시간의 일이었지만 공장에서 받는 주급보다는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고, 또 심한 노동이 불필요한 직업이었기에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몇 년 동안 해낼 수가 있었다.

 

 다만 필자는 결혼한 부부가 하는 일을 혼자 했기에 일하는 사람들을 더 고용해야 했고 따라서 버는 수입은 덜했지만 그런대로 돈 버는 재미와 함께 일하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적응을 할 줄 아는 동물이라서 그런지 수년 동안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이었지만 한국음식이나 또 한국사람들이 별로 생각이 나지 않을만큼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젊은 나이라 그래선지 그 일 역시 2-3년을 하고 나니 흥미를 잃게 되었고, 돈이 좀 모이게 되자 더욱 일하기가 싫어졌고 결국엔 그 일도 그만두고 한국엘 나가게 되었다.

 

 한국에 한두 달 머무는 동안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나마 모아놓았던 돈도 모두 써버린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캐나다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막상 돌아오니 갑자기 없어져버린 직장을 다시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많이도 성급했고 철이 없었던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민생활을 몇 년 하고 나니 귀가 어는 정도 열리고 또 말도 제법 할 줄 아는 처지가 된지라 다시 Becker 편의점에 매니저로 고용이 되었고 몇 달 후 아내가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땐 돈에 대한 걱정은 없이 살 수가 있었고 몇 년 동안의 편의점 경영을 하다가 1979년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의 직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지난 50년 동안 여기저기 짧은 기간들이었긴 하지만 이것저것 손을 대어 본 것들도 있지만 워낙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소유치 못했던 필자의 대체적인 본업들은 이것들이 전부다.

 

 이렇게 이민생활 50년을 살면서 아들 둘 그리고 딸 하나를 낳아 벌써 그들이 결혼을 해 벌써 40대 중반이 되고 아직은 어린 2, 3세 되는 손녀딸이 둘이 생겼다.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늦긴 했어도 요즘같은 세상이라면 아이들을 가지려 힘쓰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해도 간다.

 

 지난 50년간 어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도 많이 변했겠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변한 곳은 우리가 떠나온 모국 대한민국이라 생각이 드는데 경제적은 물론 생활수준은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를 훨씬 능가해 어찌 보면 우리가 후진국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도 하지만 이젠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 생각할 때는 그곳 생활이 부럽기도 하고 다만 정치계는 물론 교육계, 의학계 등 모든 분야에 부정과 부패의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가 살던 대한민국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지금 역시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계속 오르는 물가는 물론 이젠 세계적으로 올라만 가는 은행 이자율은 우리 모두를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고, 우리 모두는 설마하면서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세월은 흘러 벌써 5월 중순이 되었고 계절적으로는 캐나다로서는 최고의 즐거운 계절이지만 어찌 마음은 아직도 한겨울처럼 무겁기만 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445
18284
2022-05-05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4)

 

(지난 호에 이어)

 당시의 어린이들은 왜 그리도 코를 많이 흘렸는지 초등학생 모두가 가슴에는 이름표 대신 코수건을 매달고 다녔는데 비포장 되어있는 도로에서 일어나던 먼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요즈음의 어린이들에 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느라 그랬었겠지만 우리 모두가 지저분하고 더러웠던 것 같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가는 곳마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나를 보고 낄낄거리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서울생활이 시골생활보단 전깃불도 오래 쓸 수 있고 또 수돗물도 접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와보니 어머니 아버지가 부산을 가셨다며 나와 이종사촌 되는 형님이 집에 와서 하교하는 나를 붙잡고 나보다 14살이나 위였던 형님이 군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며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였다.

 

 원래 필자의 가족은 여자 여섯 그리고 남자 둘이었다는데 세 분의 누님과 당시 군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포함해 가족 8남매 중 지금은 4명만 남게 되었다. 당시엔 거의 가정들이 많은 수의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리 발전되지 못한 의료기술, 또 비위생적인 주변환경, 먹을 것들이 충분치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 등으로 죽긴 하였지만 그래도 인구증가율은 폭발적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전봇대는 물론 이곳 저곳 허름한 벽마다 붙어있는 포스터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자수하여 광명 찾자, 그리고 극장에서 상영되던 영화 포스터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와 학교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다니던 학교에서 일찍 하교를 시키고, 다시 학교를 나가자 갑자기 칠판에 가득히 적혀있는 혁명 공약을 외우라며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나중에 정권을 이양하고 등등. " 여섯 가지나 되는 혁명공약을 아침마다 외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61년에 일어난 5.16혁명이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희생을 당했는데 실패하면 역적이고 성공하면 영웅이 되어버리는 역사이긴 하지만 글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밤새도록 따져도 알 수가 없는 일 같다. 어쨌든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영장이 나오고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당시 필자는 형님이 군대에서 돌아가셨기에 독자로 일찍 제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격화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갑자기 만들어낸 잠깐동안만 행해진 깜작 법 개정 때문에 군 생활을 1년도 안 되어 남보다 일찍 제대를 하게 되고, 다시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하고, 또 졸업을 하자마자 이곳 캐나다에 오게 된 나는 이제 벌써 노년이 되어 이렇게 지나온 뒷길을 돌아보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대학을 졸업해도 아주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거나 아님 튼튼한 줄이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가 쉽지 않은 때에 마침 이곳 캐나다에 삼촌이란 연줄로 인하여 23년의 한국 생활을 마치게 되고 지금은 이 낯선 땅 캐나다에 와서 벌써 50년이란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의 지난 23년간의 인생 속에 만났던 그 수많은 모든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몰라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하고 살았든, 모두가 사느라 힘이 들었고 고생들을 많이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며 이제는 아직도 어디엔가 살아 있다면 어디선가 필자와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한국에서의 인생은 그저 그렇게 끝이 나고 이제 지난 50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돌아보니 어찌 보면 고생이었다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정확히 받을 수가 있고, 일확천금의 기회나 아님 부정부패를 하여 돈을 벌 수도 없고 오히려 세금도 많이 내야 하고, 또 겨울이 너무 길고 어찌 보면 삭막하고 재미없는 나라, 매일 살아가는 문화생활도 한국보다 뒤지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가 선진국이고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살기에는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286
18284
2022-04-28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3)

 

(지난 호에 이어)

저녁에는 시냇물가에 높게 쌓아놓은 성뚝에 어머니와 겨울 준비를 위한 땔감을 사기 위해 올라가면 수많은 나무꾼들이 지게마다 섬만한 나무들을 쌓아놓고 저마다 손님을 기다리며 곰방대(지금의 담배 파이프)를 길게 빨면서 고달픈 인생사를 한탄이라도 하는 듯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노을이 저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던 표정들이 지금도 역력하다.

 

어린 시절엔 아무 이유나 계산없이 친구를 사귀게 되고 나이가 들수록 이유가 있어야 친구를 사귄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필자는 동네 친구들이 정말 많이도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때의 코흘리개 친구들의 수많은 얼굴들이 끝도 없이 또 자꾸만 떠오른다. 이제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멀고 먼 이 땅 캐나다라는 나라에 와서 텅 빈 허공 속에서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한 대비나 계획을 세우고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원래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고 또 완전치 못하기에 살아가면서 안전하고 영원한 것을 찾다 보니 신을 믿을 수밖엔 없고 또 신을 찾지 못하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서까지 섬기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살던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쯤 되던 해에 무심코 어머니를 따라서 어느 한 교회 전도관이라는 곳을 들러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당시 박태선 장로라는 사람이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는데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교회당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울고불고 저마다 조그만 병에 든 생명수를 산다며 긴 줄을 서있던 아줌마와 아저씨들의 얼굴들이 기억난다. 그곳에 있던 필자는 지루하기도 하고 가끔씩 갑자기 소리치는 설교자가 두렵기도 했지만 가끔씩 내 손에 쥐여지는 신앙촌이라는 곳에서 만들었다는 카라멜은 정말 맛있었고 달콤했었다.

 

당시엔 본인이 구세주 메시야라 떠들며 태초의 아담과, 예수는 실패했고 세 번째인 자가야말로 진짜라며 본인이 감람나무란 호칭까지 받던 그가 역시 또 하나의 사이비 종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필자가 성인이 돼서의 일이지만 그 당시엔 본인 박태선은 물론 그의 두 아들까지도 당시의 7공자라는 퇴폐단체에 이름까지 올리며 대단한 권세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얼마 전 죽은 또 하나의 사이비 문선명의 한국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까지 퍼져나간 통일교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엔 경기도 소사와 덕소에 신앙촌이라는 마을도 세우고 비누, 과자, 화장품까지 만드는 하나의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당시 박정희 정권도 무시 못했던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박태선의 종교(천부교)와 가족 일가의 역사가 있었다.

 

어찌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사이비 종교들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우리 인간들이 정신적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상 다가오는 미래에도 이런 것들은 영원히 존재하며 계속 생길 것이다.

 

그 당시에 필자의 기억으로는 나의 어머니 친구 몇 분들이 온 재산을 다 팔고 신앙촌으로 이사를 한다며 서둘던 아줌마들의 얼굴이 기억나는데 어린 마음에도 어찌 그리 그분들이 한심해 보였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가 전도관이란 교회당에 들어가면 제일 많이 부르던 노래 중 하나가 "오늘도 모여왔네 어린 성도들, 천련성 들어가려고. " 그가 주는 생명수를 마시고 저를 따르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미리 마련한 천년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정말 웃지 못할 희극 아닌 희극에 휘말려 나이와 인텔리를 막론하고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온 재산을 다 가져다 바치는 그들은 당시 어렸던 필자에게도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각 반의 선생님들이 공부하던 모든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줄을 세우며 길거리를 걷게 했는데 우리는 물론 거의 대다수가 영문도 모르고 길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는데 당시엔 우리보다 큰 중.고등학교, 대학생들의 일부는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누비던 생각이 나는데 그것이 바로 1960년 4.19 학생 혁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130
18284
2022-04-21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2)

 

(지난 호에 이어)

 당시엔 잘 사는 사람들이라야 끼니를 건너지 않고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칭했고, 부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는 매주 학교나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주는 이미 지방과 영양분을 빼어버린 우유가루와 강냉이 가루의 배급을 받고, 또 미국을 비롯한 타국에서 모아진 구호물자란 이름이 붙은 옷가지를 얻어다 입고 다니던 시절이고, 세상 돌아가는 실정을 알고 이해하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어렸던 필자는 그런 비극 중에 비극의 슬픈 시절이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지나간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던 유치원 시절이 끝나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유치원 원장 선생님 이름으로 시작하여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 선생님들의 이름, 그리고 얼굴들, 유치원 원가와 학교 교가 등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만 이제 모두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생각하니 참으로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것 같다.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고 하교할 때면 학교 앞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조그만 다라나 당시엔 나무로 만든 빈 사과상자 위에 씹으면 달짝지근한 수수깡 대나 혹은 민물에서 잡은 올갱이(민물 소라)를 삶아 한 홉씩 또는 산에서 캐온 칡뿌리 등을 널어놓고 몇 푼 안되는 코 묻은 돈을 벌어보려 하지만 워낙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필자의 기억엔 그것들을 사먹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나마 학교 앞에는 공책, 필통, 연필과 그리고 사탕이나 비과(당시 일본 카라멜), 군인들이 먹는 건빵 등 몇 가지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는 하나의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그 집 아들 이재승이란 친구와 한반이었던 나는 그를 많이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눈깔사탕(왕사탕)이란 것이 있었는데 워낙 사탕의 알이 커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은데 그 당시의 우리들에겐 한 알을 입에 넣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단맛을 즐길 수 있었기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최고의 주전부리 종목이었다.

 

 필자는 부모님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1학년 때인가 교회당 안에서 헌금봉투를 주웠는데 얼마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엔 나이가 많이 어렸다 해도 남의 것을 훔친다는 죄의식이 있었음에도 그 돈으로 교회 앞 구멍가게를 들러 사탕 한 움큼을 집어들고 동네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그만 어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야단을 경치게 맞고 그 이후론 한참이나 혹시 하나님이 날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교회 가기가 겁이 나고 밤에 잠을 설친 기억이 난다.

 

 당시엔 학교를 다니며 기다려지는 날들이라야 기껏 매년 가을쯤 행해지는 원족(소풍)가는 날과 가을 학교 전체의 운동회를 하는 날 뿐이었고 해마다 그때만 기다리며 마음이 설레던 때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때만이 찐밤, 찐고구마, 옥수수, 김밥, 단감 등 먹거리가 풍성하고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리도 여름날의 매일이 길었던지 무료하고 지루하던 하루를 지내는 것이 지금의 일주일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햇볕이 불볕처럼 느껴지던 긴 여름날에 끊임없이 들리던 매미의 구성진 울음소리와 함께 집 앞에 가꾸어 놓은 꽃밭과 넓기도 했던 텃밭엔 수박, 참외, 토마토, 배추, 열무, 오이, 가지 등 여러 가지 채소 그리고 옥수수, 참깨, 들깨 등 많은 곡물들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아침이면 활짝 피어나던 나팔꽃, 채송화, 봉숭아 그리고 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매미를 대신하는 귀뚜라미의 우는 소리 역시 구성진 것은 마찬가지로 저녁상을 물리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 화투장을 돌리며 한숨을 쉬는 어른들의 푸념을 위로라도 하듯 긴 시간 동안 모두가 잠들 때까지 울어대던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교 후엔 지금은 안 계시지만 당시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유난히도 약하셨던 작은누나와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메뚜기를 잡는다며 온동네 논밭을 휘저으며 다니다 논 주인에게 쫓겨 다니고 뜰채를 가지고 미꾸라지, 붕어, 송사리를 잡는다며 시냇가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흙탕물 일으킨다며 꾸중을 하던 그 모든 사람들은 이제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000
18284
2022-04-14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1)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가끔씩 본인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된다. 필자의 경우엔 만 3살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또는 또렷하게 생각이 나는데 지나고 보니 필자의 삶은 한마디로 짧게 정리한다면 참으로 별 보잘것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생각이 든다.

 

 필자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한국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3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의 한국은 온나라가 하나의 빈민촌 그대로였다. 그때만 해도 길거리에 나가면 아직도 잔재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의 얼굴이 생각나는데 만나는 미군 병사마다 얼굴이 까만 흑인들이라 미국사람들은 모두가 흑인인 줄만 알았고 또 그때 접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코카콜라였는데(물론 우리같은 서민들은 사서 마실 수도 없었지만) 그것 역시 한국이 소유한 회사인 줄만 알았다.

 

 필자는 유치원, 국민(초등)학교 시절을 충청도 청주에서 보내고 국민 6학년 시절부터 서울로 올라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휴전을 한 것이기에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들도 여럿이 남아 있었고 학교 각 반에는 전쟁고아들이 꽤나 있었는데 그중에는 동.서양의 피가 섞인 친구 아이노꼬(あいのこ, 당시 일본말로 놀리는 칭호)들도 여럿이 있었고 그중 거의 다수가 당시의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는 고아원 학생들이었다.

 

 이런 친구들은 필자가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각 학교마다 꽤나 많이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 모두가 전쟁이 남기고간 여러가지 비극들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유치원생 땐 워낙 어린 시절이고 또 당시엔 전쟁고아들이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었기에 별로 전쟁의 후유증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또 그런 것들을 이해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한가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들 중 하나는 아침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밥을 동냥하는 사람들(당시엔 거지떼들이라 칭함)이 모여들고 매일 아침을 준비하셨던 어머니는 거지들을 줘야 한다면서 밥과 반찬을 따로 준비해 두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지금은 몰라도 그때는 저녁보다는 아침이 더 중요했는지 아침에 오는 그들의 숫자는 저녁에 오는 숫자보다 배는 되어 보였다.

 

 당시의 전쟁 때문에 생겼던 고아들과 또 거지생활을 했어야만 했던 그들은 지금은 모두 나이가 이미 70대 중반 이상이 되었을 것이고, 과연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여기 저기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고 특히나 언제 그칠지 모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나라의 아이들 5명 중에 1명꼴로 부모를 잃는 고아들이 생긴다. 침략자 러시아란 나라는 자기네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며 전쟁의 정당화를 외치고 있지만 생각할수록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이 미친X이란 생각이 들고 앞으로 전개될 일들이 언제 어떻게 끝이 날는지 두렵기도 하다.

 

 어린 시절 필자의 마음에 많이 궁금했던 것 중에 한가지로 그 거지들이 어디서 자느냐 물어보는 나의 질문에 어머니의 대답은 다리 밑이라 대답을 하셨고, 그 말을 들은 이후엔 시냇물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많이도 겁냈던 기억이 난다.

 

 간식이 전무했던 그때는 집에서 쌀이나 보리 또는 강냉이를 가지고 튀밥(당시의 충청도 사투리, 지금의 팝콘)을 튀기는 아저씨에게 가져다 주면 가지고 간 곡식의 반은 튀밥을 튀기는 아저씨 몫(돈 대신)이고 나머지 반은 튀밥 통에 넣어 약간의 사카린(당시엔 설탕이란 것이 없었기에 대신하여 음식을 달게 하는 재료)을 넣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쌀 튀밥, 보리 튀밥, 강냉이 튀밥이 우리 어린 시절의 중요한 간식 노릇을 하였다. 왜 튀밥을 튀기는 아저씨들은 다리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혹시나 거지떼들이 몰려와 우리의 튀밥을 뺐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던 생각도 난다.

 

 당시엔 워낙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기에 그저 서로 만나면 하는 첫인사가 “진지 드셨느냐”는 질문일 정도였지만 그래도 서로가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지 서로 간에 인정이 많은 시절이었기에 지금까지 모두가 굶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ilovecanada
김명수
2022-04-17
서로가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지 서로 간에 인정이 많은 시절이었기에 지금까지 모두가 굶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다
95078
JOHNCHO
JOHNCHO
94843
18284
2022-04-07
우리는 이제 어디로?(Where to go now?)(11.끝)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떠나온 모국인 한국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나와 살고 있는 우리 한인동포들의 모임에도 잘 뽑았다는 사람, 잘못 뽑았다는 사람들 간에 대조된 의견들과 서로에게 얼굴을 붉히며 심하게 다툼이 일어나며 벌써부터 청와대 이전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가지 구 정부 새 정부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다가올 한국의 정치 운명도 언제나 그렇기는 했지만 이번 역시 순탄치는 않을 것 같다.

 

 이왕 뽑힌 대통령이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대통령인데 우리 모두가 약간의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 틈을 타서 북한에서는 바로 지금이 기회다 라는 식으로 이리저리 폭탄을 쏴대면서 긴장된 지구촌을 더 긴장케 만들고 있는데, 어서 하루빨리 이 세상에서 공산주의가 사라지고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독재자들이 없어지고 무모한 전쟁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물론 민주주의의 이론과 체제가 완벽하단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 절대로 실행할 수 없는 이론만 번지르르한 공산주의보단 훨씬 낫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배웠던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문구가 생각나는데 사실 공산주의의 이론은 한마디로 평등하게 모두 잘살자 라는 말인데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마는 이것은 원래 탐욕과 이기와 죄를 품고 태어난 우리 인간이 절대 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돌아가셨지만 지난 한국전쟁 때 이미 북한에서 공산주의 맛을 보시고 월남하신 분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같이 모두 공산주의를 지극히 싫어하시는데 그도 그럴 것이 본인들이 소유했던 재산의 몰수는 기본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질을 강요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심지어 가족 간에도 살기 위해선 서로를 밀고할 수밖에 없고 잘못하면 반동분자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스토리를 너무도 많이 들어서인지 공산주의 하면 겁부터 먼저 나니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국가들에서도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한 무섭고 또 잔인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는 있지만 예를 들어 아주 오래 전 가톨릭 단체들의 수많은 원주민 학살 사건들이나 한국의 제주도 4.3사건 외에도 수많은 말도 안되는 사건들을 보면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한 행동이나 별다를 것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런 역사들을 배우고 알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들을 배우고 살 수 있지만 지금 러시아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듣는 귀와 눈이 가려져 자기네 나라가 남의 나라 국민들의 수많은 무고한 목숨과 재산을 파괴하고 있는 사실도 모른다니 바로 이런 것이 독재자가 다스리는 공산국가라는 말이다.

 

 이렇게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물가 폭등과 인플레를 일으키며 따라서 오를 수밖에 없는 높은 이자율이 자칫 그나마 연명하고 있는 경제 침체를 유발할 수도 있으니 모든 것이 불투명한 현 시점에서도 미래의 삶을 위해 계속 일을 하고 또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투자를 계속하고 또 해야만 하는 우리 모두를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세계가 복잡해지고 세계경제가 불투명해지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토론토 부동산 마켓도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로 돌아서는 것 같다. 지난 25년간 이상 중간마다 약간의 힉컵(Hiccup)은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올라만 가던 부동산의 침체가 시작되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계속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수요를 기대하며 부동산의 폭락 대신 안정세를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이긴 하지만 세상사가 누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의 지구촌엔 어떤 난리가 일어나든 말든 무심한 세월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무심히 흐르며 벌써 여기저기 파란 잔디가 솟아나는 4월이 왔다.

 

 아직도 쌀쌀한 날씨이긴 하지만 이곳 저곳 개나리가 움트고 목련이 꽃을 피우는 모습이 참으로 지난 겨울은 지독하고도 잔인한 겨울이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4737
18284
2022-03-31
우리는 이제 어디로?(Where to go now?)(10)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섭고 두려운 것들 중 하나는 무감각 또 무관심이 아닐까? 세상은 그리 멀지도 않은 옛날이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이리저리 헤매던 시절에 비하면 모든 것이 많이도 풍요로워졌고 사는 것이 편해졌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주위 또 남에 대한 관심은 더 없어지고 무감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무감각, 무관심하던 남의 일들이 언젠가는 나의 문제와 나의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로 그럴 수 있는데 이 전쟁이 장기화되고 또 더 커진다면 결국 그것은 남이 아닌 우리 또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고로 사람이란 절대적인 권력이나 많은 부를 소유케 되거나 아님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 하루 끼니까지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면 바로 인격과 양심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자기 형제나 다름없는 우크라이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러시아의 푸틴은 마치 마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인간의 격을 논할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러다가 세계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본인은 물론 세상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 있겠지만 설마하면서 저렇게 배짱을 부리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세계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치는 바람에 아직도 견디고 있는 우크라이나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고 지쳐가고 있으며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결국 시간이 갈수록 세계전쟁을 두려워하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점점 의기를 잃고 포기를 시작하게 될 것이고 결국 러시아의 막대한 군사력에 상대도 안 되는 우크라이나 군사력은 항복을 할 수밖엔 없으며 결국 마지막엔 안타깝지만 시간과 힘이 소련의 편인만큼 결국 이 전쟁도 소련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푸틴의 독재와 전쟁은 또 다른 이웃나라와 시비를 할 것이고 역시 또 하나의 독재자 중국의 시진핑도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며 세계를 긴장 속으로 몰고 갈 것이며 결국 우리 인류 모두는 또 한번의 몰락을 당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역사를 재현하듯이 지금 상황이 2차 세계대전 때와 너무도 흡사한 것 같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은 서로가 싸울 수밖에 없게 지어졌다(Human are built to fight)라는 말이 사실이고 또 그동안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너무나 긴 시간 동안(2차대전 이후) 평화가 유지되어 왔고 이젠 좋거나 싫거나 3차 세계전쟁이 일어날 수밖엔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 가정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왜 또 우리 인간은 무슨 이유로 누가 만들었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서로 떨어져 살수 없는 게 사람이고 그렇다고 다 함께 모여 살자니 매일 생존경쟁의 본질인 전쟁과 다툼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는 결국 또 서로 싸우며 몰락하고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필자를 포함한 우리 노년층들의 하루하루의 삶은 마치 남은 삶의 시간의 달력을 매일매일 한장씩 찢어 내려가며 때로는 안타깝기도 또 어떤 때는 차라리 안도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후세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하며 살게 될까 걱정을 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나이에 따라서 달력에 아직도 달려있는 남은 장수가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남은 장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찢어내야 하는 한 장의 달력들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쉽기도 할 수 있지만 설령 다시 찢어버린 장수들을 도로 붙일 수 있다 해도 별로 또 누구든 망설이지 않을까?

 

 먼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고 기껏 돈 몇푼 기부하며 잘되길 바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아직까지 억지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으며 또 4백만이 넘는 피난민들은 누가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보살필 것이며 아직도 속을 알 수 없는 얄미운 중국이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도의 태도는 어떻게 어느쪽으로 방향을 잡을지 도무지 추측이 안 되는 이런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4610
18284
2022-03-24
우리는 이제 어디로?(Where to go now?)(9)

 

(지난 호에 이어)

 한국 돈 10억이래 봐야 여기 돈으로 one million 밖에 안되는 돈인데 그 돈을 원해 10년이란 긴 세월 계약결혼을 하는, 누군지 모르는 그 여자도 궁금하고 딱하지만, 그 당시의 판단으론 그렇게 살겠다는 친구도 미친X이고,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며 엉거주춤했던 나 역시 미친X은 마찬가지라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고 또 이미 7-8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그의 계획대로 잘살고 있는지 역시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과 인생관이 다르고 생각이 서로 다르니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은 필자가 판단할 몫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후회를 할 땐 이미 늦은 것이라 말하는데 그래도 젊었을 땐 후회를 하면서도 다음이란 고마운 기회가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다음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 찾아왔던 기회들을 놓친 것, 여러 곳 여행을 못간 것, 공부를 열심히 또 더하지 못한 것, 자식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한 것, 부모에게 효도치 못한 것, 서로에게 더 잘하지 못한 것, 그 사람과 헤어졌던 것 등 여러가지를 이미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이 이미 지나버렸고 늦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린 지금의 나이와 처지가 어디에 와있는지 잘 판단하여 이 시간 이후로는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나가 남아있는 과제요 또 숙제인 것이다.

 

 벌써 삼월 중순이 지나 곧 4월이 되며 이제 곧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던 철새들과 함께 미국 플로리다로 골프여행을 떠나셨던 한인동포 분들도 돌아오실 차비를 하는 시절이 되었다.

 

 다음 달이면 한인동포 분들이 많이 즐기시는 골프장들이 개장하고 각종 야외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올핸 그토록 지루하고 길었던 팬데믹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나라 경제는 물론 우리 한인동포사회도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도 옛날처럼 모든 분야에 다시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지난달에 있었던 그리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오타와 등 미국 국경지역에서 별로 국민들이나 언론계의 호응도 받지 못하고 또 특별한 명분도 없었던 일부 Trucker들의 데모와 폭동 사태는 우리 캐나다 위상에 큰 상처를 입힌 것 같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이민이 용이하고 또 살기 좋다는 캐나다에 안보와 안전에 별로 얻은 것도 없이 먹칠만 해버린 셈이 되어 버렸는데 매년 몇 십만의 이민자들이 이 나라에 가지고 오는 부(富)를(물론 거기에 따르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캐나다로서는 신경을 쓸 수밖엔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지난 몇년간 부동산 오름세를 지켜보며 많은 사람들과 또 전문인들이 온갖 예측과 추측을 했지만 모두가 정확하지 못했고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부동산 가격은 하루하루 무섭게 뛰어오르고 있다.

 

 옛날엔 새 콘도 분양을 할 때 건축업자나 개발사, 그리고 판매업자 등 모두가 구입하는 가격과 그간의 가격 오름세와 세입자가 매달 낼 수 있는 금액을 따지며 구입시기와 가격을 맞추며 설명도 하고 또 그것에 따라서 구입 의사를 결정했는데 이젠 계산을 아무리 해봐야 앞뒤가 맞지도, 설명을 하려도 설명이 아예 안 되는 또 그런 옛 계산방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저 새 분양 콘도만 나오면 그때 가서 보자는 묻지마 식의 투자가 되어버렸다.

 

 몰려오는 이민자들의 살 곳도 문제지만 종이돈을 가지고 있어 보았자 앞으로 인플레 때문에 종이돈의 가치가 점점 하락할 것이라는 생각에 증권이든 부동산이든 무조건 은행만 피하고 보자는 식의 생각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 생각은 건설업자, 건축업자, 시행사 모두 마찬가지로 앞으로 끝없이 오르기만 할 자재값 그리고 인건비를 미리 계산하고 분양가를 정하다 보니 분양가 자체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고 현재로선 그 누구도 오르기만 하는 부동산 가격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아직도 이 지구촌 곳곳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 각 나라간의 얽히고 설킨 문제들은 물론 여러 가지 앞날이 불투명한 일들이 산재해 있지만 이런 일들에 무감각해지고 또 설마 하는 생각에 우리 모두는 매일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