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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상 (로열르페이지 한인부동산 대표)

JOH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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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71)

 

 JC칼럼- 200

 

(지난 호에 이어)

그 이후 로마황제 티투스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달래려 지금의 유명한 관광지인 당시5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세워 여러 무자비하고 잔인한 경기를 펼치며 백성들의 민심을 사려 했다. 하지만 결국 티투스 황제는 젊은 나이인 40세에 죽고 말았다. 한때는 유대인 여성을 지극히 사랑했고, 가족과 국민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Love Story도 있지만 결국 티투스 황제도, 그 유명하고 화려했던 로마제국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멸망 했고, 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는 아직도 다행인지는 몰라도 이곳저곳 모임을 참석하게 되는데,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보통 음식이 뷔페스타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헌데, 일부 손님들은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음식을 싸는 분들을 보게 된다. 특이한 점은 그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란 걸 알 수 있다. 식사량이 충분하고, 또 나중에 챙겨도 되는데 뭐가 그리도 급하신지 드시는 것보다 싸시는 게 급하신 분들을 본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던 이유인지, 아님 우리 모두 나이가 들면서 식탐이 더 생기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하긴 나와 함께 일하는 친구 하나도 식사가 나오면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먼저 좋은 것을 골라 본인 앞에 쌓아놓고 먹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보기에 추하고 역겨울 수밖엔 없다. 더구나 남이 식사를 살 때는 일부러 비싸고 고급음식을 시키는 모습은 미련하고 못나 보이는데 필자의 의견엔 이런 버릇 역시 우리 나이엔 꼭 필요한 포기를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동 아닐까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포기를 안 하면 누군가가 포기를 시킬 것을 아는 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전에 ‘어떻게 포기하며 살까’ 하는 숙제는 꼭 풀어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언제 어떻게 포기해야만 옳은 것일까? 
물론 자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증을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고 또 일부 사람들이 그런다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도 아니며, 또 포기란 말은 그런 뜻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병원 방문을 자주하게 되는데 왜 그리도 우리의 신체구조가 복잡한지 전문의도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을 볼 수밖엔 없다. 한국이라면 말이라도 잘 통한다 하지만 이곳은 전문의들이 말하는 의학용어는 잘 이해가 안 되고 더 어려운 것은 전문의를 한번 보려면 하루 이틀이 아닌 장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많은 경우에 기다리다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기에다 이곳 의사들의 사무적이고 무감각한 행동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의사들에겐 의료적 행동이 그저 하나의 직업일 뿐이고, 그들 역시 개인과 가정생활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행동이 당연한 데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아프고 급한 놈은 나 본인이지, 의사가 아니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노인들이 한국에 복수 시민권을 신청한다. 오래 살려 한다기보다 그저 죽을 때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삶은 고통이요, 불쌍한 것이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식탐이 동해서 과식을 하든, 욕심이 동해서 음식을 싸든, 평생을 화로에 불살라도 다 태우지 못할 돈을 죽을 때까지 움켜쥐고 죽으니 우리 모두가 한없이 어리석고 우매하고 불쌍한 피조물이다. 싸놓은 돈을 쓰지를 않는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나 돈을 움켜쥐고 매일 더, 더하며 안달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안타깝고 불쌍하긴 마찬가지란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기억하고 또 회계를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살면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은 기억과 회계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며 필자의 생각엔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해서 그것이 끝이 될 순 없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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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70)


 
JC칼럼- 199
 
(지난 호에 이어)

이제 벌써 낮이 밤보다 매일 짧아지고 있다. 어느덧 필자가 한국을 떠나 이 나라로 이민을 온 지도 50년이 넘었고, 따라서 나이 역시 75세가 됐다. 한국말로 표현한다면 고령의 늙은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젊었을 땐 앞만 보고 달려 옆사람들이 전혀 보이질 않았는데 이젠 자주 옆사람을 보게 된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건강한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건강문제로 고생하시는 분들도 많다. 가정 또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 등 여러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우리들 또는 더 고령의 어르신들을 보니 한 가지 공통된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포기란 것이다. 명예와 재력 아님 미모, 학력, 배경 그 무엇을 소유하고 살았더라도 이젠 좋건 싫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 잃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재력으로 성공하신 분들일수록 포기를 못하고, 아직도 물질을 따라서 방황을 하는 분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찾고 얻어도 내가 즐기고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이제 그 제한된 시간은 아주 짧은 데도 말이다. 내가 소유한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 나이엔 생각을 하고 포기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만 하지 않을까? 그저 하루하루 탐심, 욕심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면 본인에게 너무 가혹한 삶이 아닐까?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서 본인 자신은 물론 남에 대한 배려와 또 나눔이란 걸 배우지 못하고 살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래도 거지같이 살다 끝난 부자보다 부자같이 살다 죽은 거지가 더 나은 삶을 살았다 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니 잘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물론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자식들에게 본인들의 가난을 넘겨주기 싫어 재산을 물려주려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똑같겠지만 그래도 우리처럼 나이가 들면 주위 사람들에게 체면은 차리며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싶다. 

 

하긴 인간 세계로 본다면 부자같이 살다가 부자로 죽는다면 그것이 최고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그리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성경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했으니 말이다. 

 

신구약의 역사가 약 6,000년이고, 인간을 그때에 창조하셨다고 배웠지만 과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인간들의 역사는 수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증거들이 나오다 보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구 재 창조를 믿을 수밖엔 없는데 그것을 따져봐야 소용없는 짓이지만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아낼 수 있는 인류를 역사를 살펴보면 피의 역사 바로 싸움의 역사 밖엔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끔씩 우리 창조주이신 하나님 왜 우리 인간들에게 싸워야만 살 수 있는 DNA를 심어 주셨는지 묻고도 싶지만 작은 머리의 생각에 무슨 답이 있겠나. 특히나 하나님이 택한 백성 유대인들의 고향엔 예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계속 싸우는데 특히나 가장 긴 시간을 로마제국에 의해서 침략을 받고 또 지배를 받았다 하는데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당시의 로마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제국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한 죄의 대가인지 몰라도 당시 로마제국의 재앙과 몰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시작 되었다. 로마는
티투스가 왕권을 물려받은 지 2개월이 지난 서기 79년 갑자기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이태리 나폴리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의 폼페이와 헤르클라레움이란 두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해엔 로마 역사의 가장 큰 화재가 발생하고 그 담해엔 전국에 전염병이 돌면서 나라의 민심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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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61
18284
2024-07-11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9)

 

JC칼럼- 198

 

(지난 호에 이어)

 

성경 말씀대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품고 사는 유대인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를 죽인 민족이기에 예수를 믿고 섬기는 나라들이 더 미워하고 무시를 하며 구박을 가했다. 한 마디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수인 유럽국가들에게 유대인들은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핍박과 차별 그리고 집단 피살까지 당해서 그런지 원래 생활력이 강했던 유대인들은 이자를 받고 돈놀이를 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또 법적으로 허용이 안 되던 유럽국가들 에 거주하면서 재력을 확보해 나갔다. 디아스포라로 살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였던 이자놀이를 하며 점점 금융시장을 장악해 나간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중요하고 또 파워가 되다 보니 축적한 부를 토대로 점차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며, 그들 역시 처음엔 보잘것없는 돈놀이로 시작을 했지만 결국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은행을 열게 되었고, 그 이후 런던, 파리, 빈, 나폴리 등 여러 은행들을 차리며 큰 부를 축적했다. 이뿐 아니라 각 곳에서 유대인들의 독특한 장사 방법으로 부를 쌓다 보니 돈(경제권)을 거머쥔 유대인들은 여전히 차별과 학대 속에서도 그들의 원래 고향인 예루살렘(팔레스타인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건설하고 모여 살자는 시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동안 많은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은 그곳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멋 모르고 많은 돈을 준다는 바람에 당시 거주자들은 땅을 팔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사들인 땅을 그들의 정착촌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의 영토분쟁으로, 전쟁으로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자기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니, 우리 땅이라고 우기는 또 그곳 아니면 갈 곳도 없는 유대인이나 “수천 년 살고 있는 이곳이 내 땅”이라며 도로 내어 놓으라는 아랍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딱하긴 마찬가지다. 또 양쪽 모두 처지는 안 됐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특별하고 뾰쪽한 방법이 없다 보니 계속 저렇게 수천 년 동안 싸우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의 핍박을 받으며 피난을 갔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고향을 찾는다며 그곳으로 많이 밀려들어, 지금은 거의 천만이라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갈 곳도 쉴 곳도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세계가 풀 수 없는 큰일이 된다는 말이다. 머무를 곳이 없고 나라 없는 설움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누가 그 심정을 알 수 있으랴마는 참으로 암담한 일이다.

 

한국 역시 그 옛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는데 이제 또 다시 러시아의 푸틴과 북한 김정은의 불장난은 우리 모두를 걱정하게 만들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공산주의 또는 1인 독재는 언젠가 망하고 몰락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이런 과정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독재와 쏘련, 중국의 공산주의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만 정치적인 사상과 이념의 싸움에 몰두하지만 북한은 오로지 3대를 내려오는 김씨 일가의 생존을 위한 싸움만 하는 것 같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거짓과 위선을 하며 생존해 왔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가 온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너무나 작아지고 정보의 홍수시대가 되었기에 손으로 태양을 막는 행동이 통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들도 세상을 배우고 또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바로 김씨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며 그때가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다.

쓰레기 오물풍선까지 날리며 이젠 북한 젊은이들의 피까지 러시아로 팔아야 하는 북한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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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05
18284
2024-07-04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8)

 

JC칼럼- 197

 

(지난 호에 이어)

 

이제 벌써 7월, 지난 며칠 간은 그래도 캐나다의 짧은 여름을 흉내 내듯 제법 더웠다. 이제 앞으로 한 달이면 추석 행사니 뭐니 하면서 또 스산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테니 7월 한 달 동안은 캐나다의 귀한 여름을 맘껏 즐기면 좋겠다.

어찌 보면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너무 덥다, 춥다 하면서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지구촌 여러 곳에선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간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전쟁과 다툼이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지금도 또 미래도 우리 인류는 계속 싸우며 살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 묻고 싶어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쉽게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거기다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과 김정일은 이 지구촌을 더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과연 누가 먼저 핵 버튼을 누를 지는 모르지만 그 시기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 옛날부터 우리 한민족은 오랑캐들의 수많은 침략을 긴 시간 동안 받았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전쟁을 거치고 또 1900년 초에는 36년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나라 없는 뼈저린 아픔과 수모를 겪기도 했다. 세계 2차대전 후에는 해방을 맞자마자 곧 6.25전쟁을 겪었고, 이젠 남과 북 두 나라가 되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또 하나의 계속되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파란만장하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방랑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이야말로 기구한 운명 속에 살고 있다. 성경을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방에서 살다가 신의 음성을 듣고 당시 팔레스타인이 거주했던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손이 번성하며 그의 축복을 훔친 아들 야곱의 시대에 이르면서 때마침 그곳에 흉년이 들어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이집트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400년 동안 노예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가 나타나 출애굽을 하면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또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을 한 끝에 겨우 조상들이 살던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엔 이미 팔레스타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앞세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겨우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사울, 다윗, 솔로몬 왕들을 거치며 예루살렘 성전까지 건축했다. 이제야 좀 편안하게 사는가 했는데 근처의 나라들은 어찌 보면 침략자인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고, 결국 바빌론과 앗시리아에 의해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나라가 없는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의 포로가 되어 온갖 고생을 하다가 그 다음엔 페르시아에 점령을 당하기도 했다. 또 로마에게 지배를 받는 등 오랜 세월을 나라의 주인만 바뀔 뿐 포로 생활은 여전하게 계속되었다. 노예생활이 너무나 힘들어 로마를 상대로 독립전쟁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은 참패를 당하고 오히려 어렵게 세운 예루살렘 성전마저 서쪽벽만 남기고 모두 불타고 부서져 버린다. 이 벽이 지금까지 남아서 아직도 유대인들은 그 벽에 기대며 기도를 하고 있고, 그 벽이 지금에 말하는 통곡과 눈물의 벽이다.

이렇게 로마인들에게 반항과 혁명을 일으킨 결과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피난민(디아스포라)이 되어 여러 나라로 이주를 했다. 하지만 아무도, 어떤 나라도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그곳엔 지금 로마정권에 의해 부서졌고, 간신히 남아있는 통곡의 벽 그리고 이슬람 사원이 함께 세워져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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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6-20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7)

 

JC칼럼- 196

 

(지난 호에 이어)

오늘은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다는 하지이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란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내일부터는 낮이 짧아지기 시작한다는 말이고, 이제 올해도 절반이 지나간다는 말이다.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겠지만 밤이 길어진다는 것이 싫고 왠지 기분까지 우울해진다.  

필자는 어둠을 많이 싫어하며 지금도 잠잘 때 불을 켜놓고 자는 버릇이 있다. 교회에서도 기도 하자며 불을 끄는 것조차 싫어한다. 왠지 어둡고 고요함은 필자를 두렵게 하고 또 외롭게 만든다. 오래 전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 부모님들은 매일 자식들 굶길까 봐 밤낮으로 힘든 일을 하셨다. 때문에 지금의 풍요로운 시절에 하나의 새로운 불치병처럼 다가온 외로움을 모르고 사셨다. 어쩌면 외로움이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고민 아닌 고민이며, 쉬운 말로 배부르고 등 따시면 생기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서 생긴 현대의 ‘사치병’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 북한 사람들이 본다면 그리 말하지 않을까?

 

지난주 토요일엔 필자와 파트너가 경영하는 골프장에서 한인회 골프대회가 열렸다. 서로가 진행에서 약간의 미숙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한인동포들과 단체들의 참석으로 성공적인 행사를 치렀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수년동안 소식들을 모르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 서로가 한인회를 돕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좋은 행사였다.

특히나 여자의 몸으로 한인회장직을 맡아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헌신을 다하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회장 본인이 저렇게 모범을 보이며 봉사를 하니 이사로서 또는 임원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따라서 봉사를 하는가 보다.

저녁 모임에는 지난 수년간 토론토총영사로 수고하시고, 이제 곧 다른 나라로 떠나는 김득환 총영사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원래 사람이란 자기를 나타내고 또 이익을 위해서 일이나 봉사를 하지만 한인회의 골프행사는 행사를 돕는 Volunteer와 회장단 그리고 모든 임원들이 솔선 수범하면서 굳은 일을 마다 않고 서로 자청하는 모습들이 정말 보기 좋았다. 물론 개인당 $220이란 금액은 적은 돈이 아닌 데도 골프를 친다는 것은 한인회를 돕겠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착한 사람들이 아닐까?  

 

필자 역시 봉사단체는 아니지만 부동산회사를 몇십 년 경영을 해 왔고 이젠 퇴직할 나이가 넘었지만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문지방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몇십 년을 함께 일을 하시는 의리의 세일즈맨들, 착하고 정겨웠던 수많은 고객님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서로가 함께 늙어온 사무직원들 모두가 언제나 다시 만나 함께 하고픈 사람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추억을 되새겨 볼 때 정말 이런 것이 바로 삶의 축복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고 또 나이가 들수록 공동체나 직장에서도 점점 필요치 않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마음과 몸이 편해지는 것 같으니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누가 날 필요로 하건 말건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도 옛날 같지 않아 치안이 불안해지고 매일매일 차 도둑은 물론 총기 사건이 벌어진다. 미국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이곳 캐나다 역시 매일의 일상이 되고 있으니 이제 지구촌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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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6-13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6)

 

JC칼럼- 195

 

(지난 호에 이어)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바로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다. 옛날에 만났던 이성들, 그리고 자기가 공부했던 전공, 이전에 하던 일 등, 이 모든 것보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 하고 있는 일 등이 나의 운명이며, 또 바로 지금의 처지가 나에겐 최고였기에 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정해진 운명 안에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지금의 삶이 너무도 힘이 들고 또 현실이 싫어서 그것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갑자기 대책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옛 애인 아니면 새 이성을 만나는 등 돌발 행동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잘되면 좋겠지만 자기의 행동 때문에 같이 하던 사람이나 가족들이 불행하고 힘들어진다면 그것 역시 본인이 책임질 일이다.

본인의 행복이 가족의 불행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알고 배운 상식과는 다르지만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판단이나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바로 이 운명이 나에겐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자는 뜻이며, 그것은 내가 사는 동안 나를 좀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시지프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가 신에게 반항하는 오직 단 하나의 길은 신이 내린 벌을 계속해서 꾸준히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며, 비록 그것이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필자의 의견엔 그것은 반항이라 표현은 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반항이 아니라 굴복한 것이라 판단 되지만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한다면 우리 인간은 때때로 시도는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이미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모두 외길로 가야만 하는, 선택이 없는 우리들인데 누가 어디가 뭐가 잘났다고 감히 남에게 갑질을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난하고 배고픈 때가 없었다면 어찌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를 알 수 있으며, 아픈 때가 없었다면 어찌 건강에 대한 감사를 알며, 공산당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면 어찌 민주주의가 좋은 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지난 후에 깨닫고 또 후회를 하게 되는데 함께 사는 배우자 역시 옆에서 잔소리 하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야 그 잔소리가 그리워지고 또 고마움을 알듯이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그렇게 또 멍하게 살면서 깨닫고 또 잊으며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벌써 6월 중순이 되었고, 이곳 캐나다에선 최고의 계절이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쉽고 또 잡아두고 싶기만한 계절이다. 출퇴근 할 때마다 문 앞에 서 있는 라일락나무에서 찐한 향기를 안겨주던 꽃들이 벌써 시들어가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보니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순응할 수밖에는 없는 피조물의 운명이 아닌가.

 

사춘기 시절엔 일부러 빗속을 걸으며 상념에 젖어들던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상늙은이가 어쩔 수 없이 빗속을 걸으며 상념에 젖어드는 생각들이 어쩜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젊었을 땐 가을철 낙엽 하나가 바람에 굴러가도 서로가 낄낄거리며 폭소를 자아내던 우리들이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낙엽 하나가 떨어져 굴러가면 그것마저도 슬퍼지는 이유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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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6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5)

 

JC칼럼- 194

 

우리 모두가 때를 기다리는 사형수(Condemned)일 뿐인데 과연 누가 누구에게 갑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보면 그 누구도 잘난 것도 또 못난 것도 없으며, 부유도 가난도 지식도 권력도 사랑도 모두 순간적 착각일 뿐 그 무엇도 남이나 자신에게도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남에게 갑질을 하며 살 이유도,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는 성공적인 삶의 기준을 부유, 행복, 건강, 지식, 학력, 권력, 가정, 사랑, 지위 등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 세계의 성공이란 오로지 천당에 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잠깐인 이 세상과 영원한 천국을 두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선택과 판단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단지 천국은 우리가 보질 못했으니 100% 믿질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나 하며 중간지점을 찾으며 세상과 내세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에서도 잘 살고, 또 천당도 가기 위해 가끔씩 교회도 나가고 또 헌금도 하며, 죄를 안 지으려 노력을 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 양 다리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가끔씩 뉴스를 통해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일부 목사, 장로, 집사, 선교사라는 사람들의 악행과 사기 소식을 들으며 흥분하는데, 그런 일들은 지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옛날부터 계속했던 것이다. 또 미래에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악인이고 살인자 가인의 후예들이며, 악과 죄를 이미 소유하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70-80년 주어진 시간 안에 속죄를 하라고 기회를 주셨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 세상엔 열심히 공부해서 얻어지는 지식이 있고, 원래 가지고 태어난 인성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지식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고 인성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는데 교양과 지성으로 나타나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배운 지식으로 교양과 지성으로 표방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이성을 잃고 본인이 원래 모습인 교만과 오만함으로 인한 갑질을 하게 되면서 남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하나님도 교만한 자들을 그리도 싫어하셨나 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정신없이 먹고 싸고 자고 하는 동안 세월이 지나며 어느새 늙어가고 결국 남의 도움을 받다가 빈손으로 죽는 것을 인지하면서 살고 있다면 그 누구도 남에게 갑질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저 때를 기다리는 사형수일 뿐이란 말이다.

교회에 헌금을 남보다 더 하고, 단체나 사회를 도와주고 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를 할 때마다 우린 은근히 남에게 알리고 남이 알아 주기를 원하게 된다. 그것 역시 남에게 갑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기부와 도네이션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 역시 남에게 가하는 갑질이며 위선인 것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서 헌신을 하면서 자기 만족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헌신이며 또 보람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 것이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이 남을 위해 헌신을 했더라도 언론이나 남들이 칭찬을 해줄 때는 왠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가고 으쓱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역시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뒤를 자주 돌아보게 되면서 껄껄껄하며 살고 있는데 지난 과거에 누굴 만났건 또 무슨 일을 했든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하는 일들이 나의 미리 정해진 운명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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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3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4)

JC칼럼- 193

 

(지난 호에 이어)

 

벌써 5월도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이제 곧 6월 그리고 7월, 8월 중순이 지나면 서서히 찬바람이 느껴지고 그러다 기나긴 겨울을 걱정하면서 또 한 해를 지나게 된다. 우리는 덧없는 세월을 탓하고 또 원망하면서 선택이 전혀 없는 오직 한길로 향한다. 

 

최근 필자가 경영하는 골프장에 도착했더니 여러 대의 경찰차와 소방차들 그리고 앰뷸런스 등 여러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골프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손님 한 분이 골프를 치다 그만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젊은 사람은 아니고 7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CPR 등 응급처치를 해 보았지만 결국 숨졌다. 
팀원 중 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골프 투어는 계속되는 것을 보니 역시 그 누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산 사람들은 그저 또 그렇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나 보다. 이렇게 대중들이 모이는 사업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는데, 골프장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골프장은 연중 Mother's day가 가장 한산하고 Father's day가 제일 바쁘다. 올해 역시 지난 Mother's day엔 골프장이 텅텅 비었다. 요즈음엔 엄마들도 골프를 많이 치는데 이해가 잘 안된다. 반대로 음식점엔 한인식당을 포함해서 모든 식당이 온종일 바쁘다. 
이렇게 우리들이 종사하는 사업의 종류와 또 계절, 절기에 따라 울고 또 웃는다. 내년엔 Mother's day half price sale이라도 해볼 작정이다. 

 

우리가 매일 읽고 따르려 노력하는 말씀이 성경책인데 어찌보면 도저히 이해 되지도 또 따를 수도 없는 말씀이 많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정확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으로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마음을 비추며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요즈음 같이 세상 곳곳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거짓과 사기, 위선 그리고 횡령이 판을 치는, 그 누구도 믿고 따를 수 없는 세상이 왔는데 이때 즈음엔 성경이 말하는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시기인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서, 누가, 아니면 이상한 단체가 나타나서 세계의 평화와 통일을 외치며 모든 종교인들을 핍박한다는 바로 그때 말이다. 

 

하지만 적 그리스도 출현 이전에 들림(Rapture)이 일어난다 했는데, 아직도 별일이 없는 것을 보면 들림의 때는 이미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 여러 번 기술되었던 의인 즉 들림을 받을 만한 의로운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면 말이다. 
Rapture에 대한 영화도 많이 나왔고 설교시간에도 수없이 듣던 말이지만 한 가지 의문점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 말했는데 과연 들림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혹시나 들림을 받을 자격이나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있기나 한 걸까? 

 

필자는 원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종교는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지식도 없지만 내가 안다는 기독교 역시 무엇이 진실이고 사실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래도 성경말씀이 옳고 바른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과학적 역사적 증거가 없는 한 믿어야 하고 또 믿을 수밖에는 없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서적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를 보면서 인생을 배우고 또 반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K-드라마를 보며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볼 때마다 그들을 비난하고 또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비교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갑질을 할 권리나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우리는 모두가 그 무엇 한가지도 소유한 것이 없는, 그저 때를 기다리는 사형수들(Condemned People)일 뿐, 아무 것도 아니기에 남에게 갑질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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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3)


JC칼럼- 192

 

(지난 호에 이어)
 

아무나 그리고 별일도 아닌 것 때문에 곳곳에서 데모를 하고 경찰은 이미 공권력은커녕 오히려 일부 못된 일반인들에게까지도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 선생님들은 학부모들의 봉이 되었고 범죄인들이 오히려 국회를 장악하며 큰 소리들을 친다. 옛말이 간첩이지 어느 놈이 간첩인지 분간도 안 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의사들, 정치가들 포함해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방종(self-indulgence)이 일상화 되는 것 같다. 정통의 민주주의 국가 캐나다(물론 캐나다는 사회주의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고 미국에서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아마도 그 폭력범은 그 자리에서 사살당할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외치며 방종을 일삼는 한국은 수시로 남에게 피해를 주며 이곳저곳에서 데모를 일삼는다. 특별히 잘못도 없는 대통령을 탄핵한다며 마치 정해진 행사처럼 때마다 난리와 소동을 피우는 일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단지 방종의 태도일뿐이며 바로 민주주의를 빙자하며 행동하는, 곧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공권력이 사라진 민주주의란 곧 멸망의 지름길이 아닐까. 모쪼록 계속 좋은 길로 발전을 거듭하는 나라가 되어 더욱 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하는 걱정스런 마음에서 한마디 한다. 

 

필자는 세 번의 인생을 살아왔는데,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떠나기 전날 밤 당시 친하게 지냈던 필자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나xx’ 이란 여자아이와 함께 보름달에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필자가 기도한 내용은 서울에 가면 적어도 반에서 5등 안에 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는데 서로가 기도한 소원은 오랜 시절 후에 혹시 만나면 서로 말해주기로 하면서 헤어진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녀가 살아있는지, 또 그때 그녀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했지만 그 이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첫 삶이었던 같다. 

 

그러다 서울로 올라간 나는 몇 년간의 학교시절, 그리고 짧은 군대생활까지 방황하면서 철 모르는 시절을 지나다 한국을 떠난 것이 두 번째 삶이 되었다. 이제 50년을 넘게 살아온 캐나다의 이민생활이 나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삶이 된 것이다. 
세월로 따져 본다면 일생 거의가 캐나다에서 살아온 셈이지만 어쩐지 아직도 이 나라가 남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왠지 모르겠다. 호랑이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우리 인간 역시 닮은 것은 아닐까? 

 

어찌 보면 세상은 공정이란 거의 존재치 않고 모든 것이 소설 시지프스와 이방인 등 여러 유명 소설을 저서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가 그리도 저주하며 비방하던 이 세상의 불 공정(Injustice) 그리고 부조리(Unfair)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인생사를 대항하는 마음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사형수가 되어버린 이방인(The Stranger)이란 소설 속 주인공 뫼르소(Meursault)의 그때 심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고작 살아봐야 70-80인 인생인데 왜 그리 말도 탈도 많은 삶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우리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을 때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우린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믿기 보다는 믿겨져야 믿는 거라는 아리송한 말도 있다. 자기 앞만 보고 산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하늘 높이 올라 세상을 바라 본다면 인간들이 매일 매일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 불공정, 부조리들을 알면서도 나 혼자 믿고 천당을 간다며 노력하고 기도한다는 것조차 부조리이며, 공정치 못한, 비겁하고 신의 말씀에 합당치 못한 행동은 아닐까? 남은 물론 내 민족, 내 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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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2)

JC칼럼- 191

 

(지난 호에 이어)

벌써 개나리도 목련도 다시 한번 내년을 약속하면서 아주 잠깐 얼굴을 내밀며 피고 또 지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우리 한인동포 1세의 노인 분들은 아직도 이곳 저곳에서 산마늘, 고사리, 취나물을 따다가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모습에 마음이 짠하다. 이제 그것도 우리 2세, 3세들에겐 잊혀진 조상들의 역사로 남을 것이고 우리는 너도 나도 먼 길을 떠난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한 일생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한편의 영화를 찍고 그것을 되돌아 보면서 지독한 그리움에 따라오는 고독 그리고 후회를 가슴에 품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또 잊혀진다. 죽음 후엔 또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릴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사라져 간다.

하나의 그리움, 후회, 슬픔, 고통, 고뇌가 함께 하는 삶이 없는 그저 아무 기억도 없는 존재치 않는 무(無)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을 바라며 50보, 100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며칠 전엔 오랜만에 50년 전 이민을 함께 왔던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옛말로 표현한다면 고령의 노인들이다. 다행히 아직 상처를 한 친구는 없었는데, 한 친구의 아내가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어 참여를 못했다.

모두가 수십 년 이민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또 정직하게 살아온 오랜 친구들이다. 자주는 아니고 그저 1년에 한 번씩 모이는 친구들의 대화가 이제 모두 과거의 이야기들일뿐 현재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서 너도 나도 이제 모두가 포기 그리고 순간순간 이별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모두가 저마다 큰소리를 치고 미래의 설계를 하면서 밤을 새우던 그 시절이 마치 엊그제였는데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프 비거리가 얼마고,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가고 손자손녀가 무슨 상을 타고 등등 말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에게 또 자식들에게 또 지나온 삶에 실망을 하면서 조용히 다가오는 운명에 순종하는 모습들이다. 얼굴마다 굵게 또는 얇게 패인 주름 속에서 씁쓸한 웃음들과 함께 여기 저기 숭숭 빠져버린 앞니들 사이로 찐한 외로움들이 흘러내린다. 

어찌 보면 짓궂기도 하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역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세상,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를 우리는 이미 조상들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실감을 하는 어리석기만 했던 우리들은 모임은 그저 초라하기만 했다.

워낙 추운 이곳 캐나다는 벌써 5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쌀쌀하고 또 비도 자주 내린다. 어찌 보면 그나마 유일한 우리 한인동포들의 즐거움은 오늘도 이곳 저곳의 골프장을 누비며 마치 갈 곳과 갈 길을 헤매며 뭔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처럼 별 이유도 없이 멍하게 살아가고 있다. 긴 겨울잠에서 덜 깨어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았던 50-60년 전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선진국 그리고 잘 사는 나라로 바뀌면서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오던 시대는 이미 옛말이 되었고, 이젠 오히려 거꾸로 복수국적이다, 귀화다 하면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하는 동포들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캐나다에 사는 동포 수는 점점 줄어들고 또 유학생까지 줄게 되니 한국인을 상대해서 먹고 사는 영세업자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다. 물론 한국에도 남북간의 문제와 아직도 후진국 수준인 정치문제가 있긴 하지만 세상에 물도 좋고 정자도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필자는 모국 방문할 때마다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수준을 넘어서 이미 방종(self-indulgence)의 단계에 온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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