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조준상 (로열르페이지 한인부동산 대표)

JOHNCHO
D893EA2A-85C3-45F0-99CE-90EEBF614509
79787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189
,
전체: 72,872
Korean Real Estate Post
1995 Leslie Street Toronto ON. M3B 2M3
Web: www.budongsancanada.com
  • 나의 칼럼
메뉴 열기
JOHNCHO
JOHNCHO
96660
18284
2022-06-23
JC칼럼(104)-우리들의 미래와 계획(Our future and Plan)(1)

 

 옛날의 구소련을 복원시켜야만 서방국가의 침략을 막고 또 강대국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며 젊은 시절부터 소련의 복원을 꿈꾸던 푸틴은 어찌 보면 러시아에겐 애국자일 수도 있으나 현재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과연 그의 꿈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홍역을 앓고 있다.

 

 덩달아 중국은 이 어지러운 틈을 이용해 타이완을 위협하고 있고, 팬데믹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 남미 국가들과 유럽쪽 난민들은 미국과 독일 등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몰려들고, 팬데믹 때 경기부양 정책을 펼치느라 각 나라마다 마구 찍어낸 돈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공급망도 엉망이 되다 보니 각 나라마다 인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난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이곳 캐나다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용하고 평온한 삶에 익숙하다 보니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또 전쟁 속에서 매일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과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 안다 하더라도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이 나라 역시 이런 모든 것의 여파로 인하여 식품은 물론 모든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다 보니 이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토론토 역시 웬만한 곳의 식당에서 일인당 $50 가지고도 술 한잔 곁들인 저녁을 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모든 물가가 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긴축을 하고, 그러다 보면 불황이 시작되고 따라서 세계는 또 다른 위기를 직면하게 될 것이니 기업과 개인의 파산이 시작될 것이며 지난 90년대 초와 같은 암흑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어 역시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과 팬데믹같은 전염병도 일찍 종식되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 볼 땐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벌써 유월 하순이 되어 한인동포들의 골프게임도 절정에 달해 각 골프장마다 한인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캐나다에선 최고의 계절이 되었다. 지구 한편에선 여전히 끝날 줄 모르는 전쟁과 다툼의 연속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높고도 아름다운 하늘과 온갖 푸르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따라서 매일 골프장에 출근하며 도장을 찍다 보니 과연 골프가 없었으면 우리들의 삶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도 해본다.

 

 가끔씩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똑같은 생활을 하다 보면 좀 더 보람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되는데, 과연 보람 있는 삶이란 무엇이며 있기는 한 것일까?

 

 신을 믿는 사람들의 일부는 나머지 인생을 선교에 바친다며 선교지에 나가서 때로는 어렵고 힘든 삶을 자처하고, 어떤 사람들은 뒤늦게 귀농을 한다며 시골로 들어가 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세계 곳곳 여행만 하며 사는 사람들, 의료봉사, 불우한 이웃 돕기에 몰두하는 사람들, 따뜻한 곳을 찾아 다니며 골프에 전념하는 사람들, 죽을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과연 무엇이 보람된 삶인 것일까?

 

 사람마다 해석과 정의가 다를 수 있겠지만 어찌 보면 다 부질없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봐도 어찌 살아야 의미와 보람있는 삶이라는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정답이 없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노인과 바다’라는 Ernest Hemingway가 쓴 소설 속의 주인공 쿠바의 어부 Gregorio Fuentes(1897~2002)의 마음도 우리와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필자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자주 세우고, 또 자주 바꾸곤 한다. 그 이유는 세워놓은 계획이 그대로 되지 않고 세월은 고장 없이 자꾸만 흘러서 나이가 늘어나 계획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로할수록 더 심각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그것을 힘들어 하며 사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다. 외로운 것은 본인 혼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다.

 

 내 주위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이별을 앞두고 있는 인생들이니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떠날 수밖에 없어 안타까움도 서운함도 또 외로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다만 원하는 것은 떠나는 길 너무 힘들고 아프지만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축복이요 행복인 것 아닐까? 가끔 서적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와 형제가 지은 죄를 엉뚱한 본인이 받는다는 대목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6422
18284
2022-06-16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10.끝)

 

(지난 호에 이어)

 전에도 기술한 적이 있지만 한자성어에 생로병사(生老病死)란 말이 있는데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란다.


 필자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타향, 낯선 이 땅 캐나다에서 보냈지만 산다는 것이 거의가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 말한다면, 정말 가난이나 육체의 병 때문에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볼 때는 행복한 비명이라 말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잘살건 못살건, 건강하든 병약하든 고통의 가감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 누구의 미래도 불투명하며, 무지할 수밖에 없으니 모두 허사이고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 마찬가지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70-80년의 인생이 고통의 연속일 뿐 누가 어떻게 살았건 모두가 별 보잘것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신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눈과 귀로 또는 몸으로 느낄 수 없는 신은 이렇게 무질서하고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공정치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서 중간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당 아님 지옥뿐, 그 중간이란 절대 존재치 않는다고 말씀에 적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엔 언제나 갑과 을이 있게 마련인데, 갑으로 살자니 죄인이 되고 을로 살자니 세상에선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저 순서를 정하는 데만 쓰이는 갑과 을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세상에는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하지만 그것은 실제 사람 자체의 우열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처해있는 환경과 지위 그리고 부의 차이일 뿐이다. 사람 자체가 더 나은 것은 아닌데, 단지 우리 모두가 그것을 잊고 살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갑질에 대한 이야기들과 실례들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또 보아서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누구도 을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특히 한국 TV화면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만, 국회의원이나 장관들, 재벌 또는 재벌 2세들, 정부 고위간부들이 회중이나 공공 앞에서 비오는 날 실외 연설이나 인터뷰를 할 때 보면 사진에 나와 있는 것같이 본인은 그저 자기 상관에게 비 한방울 튈세라 무릎까지 꿇어가며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을 만약 자식들이나 아내 또는 그의 부모가 본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모두들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을 한 상태나 매일 먹고, 싸고 하는 것을 본다면 그 누구도 더 나을 것이 없는 추하고 약한 인간들일뿐 그 이상이 아닌데 말이다.

 

 얼마 전 아들 선거기간동안 주수상 등 여러 장관들이 선거사무실을 다녀가곤 했지만, 도대체 누가 장관이고 누가 보좌관 또는 운전수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두가 평범한 옷차림은 물론 행동 역시 전혀 누가 갑이고 을인지 알 수가 없어 한국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도 나라마다 오래 내려오는 하나의 풍습인지는 몰라도 이제 우리의 모국 대한민국도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라는데 그에 걸맞게 이런 것 역시 바뀌어야 할 풍습이 아닐까?

 

 이런 모습을 보고 들을 때마다 우리들 자신도 옷을 벗고 샤워를 할 때마다 거울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나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갑질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며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법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도 남에게 갑질할 이유나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무도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영원히 소유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지나가는 나그네들일 뿐이며 단지 사는 동안만 빌려 쓰고 있는 것일 뿐 결국 모든 것을 이 세상에 놓아두고 가야만 하는 하숙생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라의 부동산 소유권을 표현하는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Tenant란 말이 들어간다. 하나는 Joint Tenancy, 또 하나는 Tenancy in Common이라 등기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지구촌의 세입자(Tenant)일뿐 소유자는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닐까?

 

 얼마 전 한국에서 유명 연예인으로,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도 TV에 코미디언으로 자주 나오던,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전국노래자랑의 MC로 이름을 떨쳤던 송해 선생의 이별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연예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95세란 나이는 우리 모두에겐 정말 많은 나이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95년 역시 한순간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절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갑질은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그 누구도 남에게 갑질할만큼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 놀고 먹자는 말은 아니고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투자하는 것은 맞는데 내가 노력해서 무엇을 얻었다 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다. 나의 육체도 재산도 건강까지도 남보다 우위라고 여겨 알게 모르게 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남에게 갑질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6279
18284
2022-06-09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9)

 

(지난 호에 이어)

 이렇게 우리 동포 1세들의 몸은 비록 이 낯선 캐나다 땅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한결같이 모국 한국을 향해 있고 또 그리워지다 보니 한국 정치상황에도 그리 열을 내나 보다.

 

 다행히도 필자의 아들 Stan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간간히 여러가지 사연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한인동포들과 또 일부 단체장님들의 열띤 응원과 성원으로 비록 2천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긴 하였지만 어찌 보면 무명의 상대방 후보자를 생각해볼 땐 본인은 더 겸손하고 분발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물론 누구의 자식들도 맘이나 몸도 부모가 원하는대로 따라주지 않고, 누군가 말했듯이 골프나 자식이나 내 맘대로 안되고 또 본인들의 인생이니 함부로 참견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부모라 해서 부모의 말과 뜻이 항상 옳은 것만도 아닌 것이니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내가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걸 원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 때가 있는 법인데, 이번 선거 때 역시 참으로 여러군데 동분서주하며 한인회를 비롯해 나와 내 아내는 많이도 뛰어다닌 것 같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선거가 끝나니 동포분들의 민원들이 필자를 통해서도 많이 들어오는데, 들어오는 민원들의 대다수가 주정부 관할이 아니고 또한 일개 주의원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가끔 기회가 생길 때 아들에게 말을 하면 핀잔을 맞을 때도 있다.

 

 한참 계절답지 않게 무더운 날들이 계속되더니 요즘은 그래도 적당한 여름날씨가 계속되니 그래도 살만한 캐나다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제 두세 달 후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생각하니 벌써 지레 겁이 나는 건 아마도 나이탓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며, 요즘 갑자기 오르고 또 오르는 이자율 때문에 비록 물가와 집값은 안정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근근이 지탱해오던 우리들의 서민경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걱정을 해본다.

 

 지난 수십년간의 최고점 이자율(모게지)을 살펴볼 때 1970년대 후반의 9%, 80년대 초반의 21%, 그리고 1990년의 13.5%, 지금의 아니면 곧 다가올 3%대의 우대금리를 비교해 본다면 아직도 이자율 오름세의 갈길은 멀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독자분들도 피부로 느끼고 또 들어서 아시겠지만 지난 두 달간 연속 부동산 마켓은 거래량이 줄고 가격변동이 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우선 소비자 심리를 위축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경제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언제나 그래왔듯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항상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어떤 유튜브를 보니 이자율과 부동산 오름세는 관계가 없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며 참으로 한심하다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은행 이자율은 언제나 부동산 가격 변동에 큰 역할을 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자율의 오름세는 이제 시작일 수도 있고 또 우리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기름값은 이미 $2를 훌쩍 넘어 팬데믹 시절 재택근무를 한다고 지방으로 내려가 집을 구매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렇게 이자가 오르고 모든 물가가 오른다 해서 세상이 망하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기회란 위기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기에 우리 독자 여러분들도 지혜롭게 투자를 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시간들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언제나 칼럼을 쓸 때 독자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처지와 나이들이라 생각을 하고 쓰는 탓에 독자층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내가 알고 경험한 것만 표현할 수밖에 다른 재주가 없으니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어찌되고 처지가 어찌되었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나 다가오는 내일을 생각하고 또 계획해야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오로지 인간일 뿐인 우리가 세우는 계획과 미래의 설계가 헛되고 실행되지 않는다 해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우리 모두를 후퇴시킬 뿐 우리의 삶의 질은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의 양도 늘려주질 못한다는 것이며 우리의 꿈마저도 빼앗아 가버린다는 말이다.

 

 이제 벌써 우크라이나 전쟁은 100일이 지나고 아직도 언제나 끝날지 모르는 와중에 벌써 사람들은 이젠 먼 나라의 또 남의 일인 듯 익숙함에 젖어들고 또 잊어가고 있는 사이 지금도 그곳에선 매일 무섭고 잔인한 학살과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푸틴이 지치고 또 흥미를 잃게 될 때는 혹시 우크라이나도 한국처럼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고 지금의 남북한처럼 서로가 오도가도 못하는 나라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해보지만, 설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국민들이기에 그렇게 쉽사리 오래 전부터 귀와 눈과 입이 막힌 북한인민들처럼 쉽게 공산화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6099
18284
2022-06-02
JC칼럼(101)-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8)

 

(지난 호에 이어)

 필자도 아들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엔 미처 깨닫지 못한 일이지만 우리 한인 동포사회에서 한인 정치가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우리 1세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자손 2, 3세 정치가들을 배출해야만 우리 한인동포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또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 우리 한인동포 2, 3세를 꼭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한인들 단체나 또는 개인들의 특히나 교회 쪽에서의 민원은 정말 많다는 말인데 만약 한인 정치가가 한 명도 없다면 정말 막막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고마운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깨달은 일부 단체장님들과 개인 한인동포들은 발로 또 금전으로, 전화로 등 여러 면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의 열성과 열정은 정말로 대단하지만 문제는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은 많이 저조하다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을 포함해서 특히나 우리 자손들인 2, 3세들이 투표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투표 제도는 한국과 조금 다른 것이 매일매일 투표하는 투표자의 명단이 후보자들에게 곧바로 전달이 되는데 다만 누구를 찍었느냐는 표시가 안 되지만 투표자의 이름과 주소가 즉시 전달되기에 우리 한인들이 얼마나 또 누가 투표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정치가들이 어느 특정 민족이 얼마나 투표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며 결국 표를 제일 중요시 할 수밖에 없는 정치가들의 관심과 발길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듯이 정말 많은 한인동포들의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 월드컵 때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같은 한국인이라 본인이 선호하는 당을 초월하면서까지 그래도 피를 나눈 동족이라며 동분서주 하시는 모습들을 보면 많이 미안하기까지 하다.

 

 각 언론사들, 단체장님들, 또 개개인들 모두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을까? 특히나 한인비즈니스협회(구 북부번영회) 회장이신 채현주 회장님은 본인이 코로나 사태로 힘든 시절에 도움을 받았다며 자기 일도 아니고 자기 자녀 일도 아닌 일에 과연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발이 부르트도록 자기 본업을 제쳐놓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마치 한 장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착각을 할 정도니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원래 필자의 아들이 싸우는 지역이 자유당 텃밭인 Willowdale이라 보수당으로서는 어려운 지역이긴 하지만 이제 바로 내일이 선거일로 정해졌고 필자가 쓴 이글이 읽혀질 때쯤이면 벌써 선거결과가 어찌 나왔던 본인이나 도와주시는 분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니 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아들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서 이분 저분 찾아 다니다 보니 아주 오랫동안 뵙지 못한 분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이미 돌아가셨단 말을 들을 때면 그분들의 살아생전 모습들이 아련히 떠오르며 일찍이 이 나라에 이민을 오셔서 고생하시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워낙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들이 강했던 우리 한인 부모님들 덕에 그들이 남기고 떠나신 후예들은 거의가 좋은 직업들과 훌륭한 가정들을 꾸미고 비교적 안정된 삶을 꾸리며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우리 한인동포 이민생활은 성공한 것 아닐까?

 

 당시 동양인들이 많이 없었을 때는 가는 곳마다 손가락으로 실눈을 만들어 보이고 행동으로 말로 놀림을 당하며 살아왔던 우리 1세들이야 그렇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 역시 학교를 다니며 이유와 영문도 모르고 얼굴이 노랗고 눈이 작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으며 공부를 해야 했던,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라온 것을 생각하면 왜 굳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자식들에게 마음고생을 시켜야 했었는지 지금도 마음이 찡하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더욱 공부를 남보다 열심히 할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한민족의 DNA역할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람에 따라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필자의 욕심으로는 오랫동안 그들에겐 한인의 피가 있다는 Identity를 잊지 않았음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부질없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곧 세계가 열광하는 월드컵 축구가 시작이 되는데 모쪼록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이 좋은 성적을 이루어 온 세상에 우리나라의 명성을 떨치며 또 한 번 세상을 놀래게 만들었음 하는 마음이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된다.

 

 비록 이 나라 캐나다에 살고는 있지만 만약 캐나다와 한국의 축구경기가 성사된다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히 한국을 응원할 것이란 마음은 아마도 우리 한인동포 모두의 마음 아닐까?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967
18284
2022-05-26
JC칼럼(100)-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7)

 

(지난 호에 이어)

 원래 부동산 중개회사란 비서진과 경영진 이외엔 모두가 코미숀 스플릿으로 페이가 나가기 때문에 일반 월급을 지불하는 회사와 다르며, 세일즈 하시는 분들이 더 좋은 조건이나 아님 다른 사정에 의해서 회사를 옳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도 내심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의 곁을 떠날 땐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너나 나나, 좋거나 싫거나 서로를 떠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누가 내곁을 떠난다는 것이 마음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아프고 서러운데 아마도 사람이 늙어가고 몸이 쇠약해지면 누가 나를 떠난다는 것이 더 겁나고 두려워지는가 보다.

 

 원래 글이란 남이 읽어줄 때 의미가 생기고 남이 이해할 때 빛이 나는 법인데 도대체 필자의 칼럼을 누가 읽기나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면 원래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적도 없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또 살아왔건 우리 모두의 삶이 어느 쪽으로 향해지건 전혀 관심이 없는 세월은 덧없이 흘러 벌써 2022년도 거의 반년이 지나가는 6월이 되어 버렸다.

 

 원래 봄과 가을이 없는 이 나라는 올해도 역시 갑자기 찾아오는 Sudden Summer가 시작되면서 각 가정이나 직장에도 Air-Con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아직은 서늘할 때도 있긴 하지만 곧 우리는 언제나처럼 너무 덥다며 가끔씩 짜증을 내곤 하지만 그래도 지난 길고 또 길었던 겨울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더구나 지난 2년간 Covid-19 속의 겨울은 우리 노년들에겐 너무나 혹독하고 매서운 또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Covid의 규제가 많이 풀려서 음식점들은 물론 각종의 모임들이나 스포츠 업계도 활기를 띠고 있어 보기가 좋다.

 

 다만 필자가 파트너와 경영하는 골프장엔 Covid 때와 달리 손님이 많이 준 것이, 이제 골프가 아니라도 각종의 스포츠를 여기저기서 즐길 수 있기에 또 각 골프장마다 Covid 때처럼 골퍼들이 몰려들 줄만 알고 가격을 대폭 상승시킨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한편 날마다 치솟고 있는 인플레와 아직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가 꼭 필요한 식자재 값은 물론 석유값 역시 리터당 2불 이상으로 올려놓아 차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혼잡한 시내를 떠나겠다며 또 Covid 시절의 재택근무로 출퇴근이 필요 없다며 416지역을 떠난 일부 사람들은 이제 또다시 출근이 필요한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매번 지불해야 하는 기름값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위로 아래로 출렁거리는 부동산 동향은 우리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고 건축자재 및 인건비는 물론 계속 오르기만 하는 모든 물가들 역시 우리 서민들의 주머니를 울리고, 이젠 친구들이나 혹은 손님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한끼 해도 몇 백불은 아주 쉽게 나오는데다 세금 13%, 또 거기에다 10%의 팁 문화는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계산 결제기 자체에 15%, 20%, 25%로 찍혀 나와 버리니 우리 소비자들에겐 별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

 

 물론 식당에서 고생하며 일하시는 분들에겐 마땅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지금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꽤나 어수선하고 불안한 것 같지만 우리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언제 불안하지 않고 어수선하지 않을 때가 있었을까?

 

 언제나 싸움과 투쟁의 연속일 뿐 그 어느 한때도 평온한 때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기에 우리 역시 평범하게 매일매일을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삶에 꼭짓점을 찾으려 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필자는 이렇게 지금까지 지난 50년 동안 캐나다 이민생활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이제 벌써 세 자식들 모두가 40대 중년이 되었고, 두 아들 중 하나는 정치를 한다며 정말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지런히 정치일은 물론 또 요즈음은 선거운동까지 정말 눈코 뜰새 없는 시간들에 매달려 살지만 매달 받는 월급은 사람과 처지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지만 보잘것 없는 것 같다.

 

 신발이 몇 켤레나 닳도록 온종일 남의 가정 문을 두드리며 한표 한표 호소하며 부탁하고 또 사정까지 하는 모습이 많이도 안타까운 생각에 가끔씩 말리고 싶은 생각도 불현듯 떠오르지만 그래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고 또 기꺼이 마다않고 저렇게 열심히 뛰는 것을 보면 대견한 것도 같아 말리고 싶던 마음을 접고는 한다.

 

 원래 이 나라 정치나 또 투표에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 우리 일부 한인동포들이나 한인 종교단체들에게 정치하는 자식을 둔 아비로서 투표 부탁을 해보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770
18284
2022-05-19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6)

 

(지난 호에 이어)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tavern
 Where we used to raise a glass or two

 Remember how we laughed away the hours
 And think of all the great things we would do

 Chorus!

 Then the busy years went rushing by us
 We lost our starry notions on the way

 If by chance I'd see you in the tavern
 We'd smile at one another and we'd say

 Chorus!

 Just tonight I stood before the tavern
 Nothing seemed the way it used to be

 In the glass I saw a strange reflection

 Was that lonely woman really me

 Chorus!

 Through the door there came familiar laughter

 I saw your face and heard you call my name

 Oh my friend we're older but no wiser

 For in our hearts the dreams are still the same

 Those were the days my friend

 We thought they'd never end

 We'd sing and dance forever and a day

 We'd live the life we choose

 We'd fight and never lose

 Those were the days, oh yes those were the days
 La la la la.

 필자가 많이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인데 Mary Hopkins가 지난 1968년에 부른 아주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한 인생 스토리가 4절의 노래 한마디로 아주 잘 표현되었다. 작곡도 잘하였지만 작사 역시 기가 막힌 노래다. 

 

 이런 노래를 들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며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선술집에 모여앉아 저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의기와 패기가 넘치고 마치 세상은 모두가 우리들 것이고 누구에게도 져보거나 질 생각도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성숙과 환경들이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고 저마다 외쳤던 꿈들과 큰소리들은 각자들의 바쁜 삶속에 잊히고 또 사라져버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가 늙어가고 예나 지금 여전히 변함없는 우리가 매일 출근하던 그 선술집이긴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에는 왠지 낯이 설고 어색한 그 선술집 유리창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그 옛날 패기 넘치던 모습이 아닌 한 노인으로 변해버린 모습은 나를 많이도 놀라게 하고 막상 그 선술집 안에 들어서니 어떤 낯선 노인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돌아보니 아! 바로 그때 그 친구들 중 하나인 바로 그놈, 역시 그놈이나 나나 늙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나 지금이나 망상과 헛된 꿈속에서 헤매는 철부지는 변한 것이 없다는 내용인데 필자에게는 정말 마음에 와닿는 노래이다.

 

 우리의 선배님들이나 아님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늙어가면서 쥐었던 손을 펴고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으며 살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이며 또 이제 와서 알았다 하더라도 진정 그 일이 행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재산이나 사업 또는 자식들까지도 결국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헤어져야할 운명이라면 결국 내손에서 놓아주고 보내야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언젠가 떠날 때는 모두가 빈손일 수밖에 없기에 생긴 말이며, 뿜어내는 담배연기를 주먹 안에 잡을 수 없듯이 이왕 보내야 한다면 잡으려 안달하지 말고 또 나중에 말고 지금부터 서서히 놓아 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지난 40년간 부동산회사에 종사하고 경영을 하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고 또 새 사람 등을 맞이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었는데 아마도 필자가 수십 년 동안 경영하는 사이에 회사를 거쳐 간 분들이 거의 1천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렇게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일부는 다른 회사에서 지금도 일을 하시고 있고 일부는 업계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 등 많이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필자를 떠나신 분들 중에 몇 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회사 경영자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혀 상상치도 못한 그리고 내심 믿고 좋아했던 동료가 떠날 때는 마음이 많이도 아프고 또 섭섭한 일들이 가끔씩 일어난다. 돈과 이해관계보다는 헤어진다는 것이 서글프고 또 싫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601
18284
2022-05-12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5)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한국에서 23년 간의 삶을 살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캐나다에서 시작된 이민생활은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참으로 고독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원래 한국에서 막일을 해본 것이 아니었기에 이곳에서의 공장생활은 어딜 가든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없던 필자에겐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필자에게 육체적으로 많이 힘이 드는 일이었고, 또 가족이 없고 혼자였던 나에겐 갑자기 헤어졌던 친구들을 더 생각나게 만들었다.

 

 혹한 겨울날 눈보라가 치고 영하 25도를 넘나드는 꼭두새벽에 공장에 출근키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그때의 시절은 필자를 깊은 향수병에 젖어들게 했는데 어떤 경우엔 밤 12시에 일을 시작해 아침 8시에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것이 당시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그 자리에 서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필자가 했던 일들 역시 별일이 아니었다 생각이 든다.

 

 당시에 필자가 받은 시급은 약 $1.60 정도였고 오버타임을 하게 되면 $2.40 이상을 받으니 당시 돈이 많이 필요했던 필자에겐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며, 그러다 보니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여러 달을 지내며 힘들었던 공장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쯤에 어느 지인의 소개로 당시에 한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Becker라는 편의점에 매니저로 취직이 되었고 그래도 주 7일 근무에 또 장시간의 일이었지만 공장에서 받는 주급보다는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고, 또 심한 노동이 불필요한 직업이었기에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몇 년 동안 해낼 수가 있었다.

 

 다만 필자는 결혼한 부부가 하는 일을 혼자 했기에 일하는 사람들을 더 고용해야 했고 따라서 버는 수입은 덜했지만 그런대로 돈 버는 재미와 함께 일하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적응을 할 줄 아는 동물이라서 그런지 수년 동안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이었지만 한국음식이나 또 한국사람들이 별로 생각이 나지 않을만큼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젊은 나이라 그래선지 그 일 역시 2-3년을 하고 나니 흥미를 잃게 되었고, 돈이 좀 모이게 되자 더욱 일하기가 싫어졌고 결국엔 그 일도 그만두고 한국엘 나가게 되었다.

 

 한국에 한두 달 머무는 동안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나마 모아놓았던 돈도 모두 써버린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캐나다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막상 돌아오니 갑자기 없어져버린 직장을 다시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많이도 성급했고 철이 없었던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민생활을 몇 년 하고 나니 귀가 어는 정도 열리고 또 말도 제법 할 줄 아는 처지가 된지라 다시 Becker 편의점에 매니저로 고용이 되었고 몇 달 후 아내가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땐 돈에 대한 걱정은 없이 살 수가 있었고 몇 년 동안의 편의점 경영을 하다가 1979년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의 직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지난 50년 동안 여기저기 짧은 기간들이었긴 하지만 이것저것 손을 대어 본 것들도 있지만 워낙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소유치 못했던 필자의 대체적인 본업들은 이것들이 전부다.

 

 이렇게 이민생활 50년을 살면서 아들 둘 그리고 딸 하나를 낳아 벌써 그들이 결혼을 해 벌써 40대 중반이 되고 아직은 어린 2, 3세 되는 손녀딸이 둘이 생겼다.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늦긴 했어도 요즘같은 세상이라면 아이들을 가지려 힘쓰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해도 간다.

 

 지난 50년간 어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도 많이 변했겠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변한 곳은 우리가 떠나온 모국 대한민국이라 생각이 드는데 경제적은 물론 생활수준은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를 훨씬 능가해 어찌 보면 우리가 후진국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도 하지만 이젠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 생각할 때는 그곳 생활이 부럽기도 하고 다만 정치계는 물론 교육계, 의학계 등 모든 분야에 부정과 부패의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가 살던 대한민국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지금 역시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계속 오르는 물가는 물론 이젠 세계적으로 올라만 가는 은행 이자율은 우리 모두를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고, 우리 모두는 설마하면서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세월은 흘러 벌써 5월 중순이 되었고 계절적으로는 캐나다로서는 최고의 즐거운 계절이지만 어찌 마음은 아직도 한겨울처럼 무겁기만 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445
18284
2022-05-05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4)

 

(지난 호에 이어)

 당시의 어린이들은 왜 그리도 코를 많이 흘렸는지 초등학생 모두가 가슴에는 이름표 대신 코수건을 매달고 다녔는데 비포장 되어있는 도로에서 일어나던 먼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요즈음의 어린이들에 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느라 그랬었겠지만 우리 모두가 지저분하고 더러웠던 것 같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가는 곳마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나를 보고 낄낄거리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서울생활이 시골생활보단 전깃불도 오래 쓸 수 있고 또 수돗물도 접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와보니 어머니 아버지가 부산을 가셨다며 나와 이종사촌 되는 형님이 집에 와서 하교하는 나를 붙잡고 나보다 14살이나 위였던 형님이 군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며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였다.

 

 원래 필자의 가족은 여자 여섯 그리고 남자 둘이었다는데 세 분의 누님과 당시 군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포함해 가족 8남매 중 지금은 4명만 남게 되었다. 당시엔 거의 가정들이 많은 수의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리 발전되지 못한 의료기술, 또 비위생적인 주변환경, 먹을 것들이 충분치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 등으로 죽긴 하였지만 그래도 인구증가율은 폭발적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전봇대는 물론 이곳 저곳 허름한 벽마다 붙어있는 포스터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자수하여 광명 찾자, 그리고 극장에서 상영되던 영화 포스터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와 학교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다니던 학교에서 일찍 하교를 시키고, 다시 학교를 나가자 갑자기 칠판에 가득히 적혀있는 혁명 공약을 외우라며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나중에 정권을 이양하고 등등. " 여섯 가지나 되는 혁명공약을 아침마다 외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61년에 일어난 5.16혁명이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희생을 당했는데 실패하면 역적이고 성공하면 영웅이 되어버리는 역사이긴 하지만 글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밤새도록 따져도 알 수가 없는 일 같다. 어쨌든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영장이 나오고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당시 필자는 형님이 군대에서 돌아가셨기에 독자로 일찍 제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격화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갑자기 만들어낸 잠깐동안만 행해진 깜작 법 개정 때문에 군 생활을 1년도 안 되어 남보다 일찍 제대를 하게 되고, 다시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하고, 또 졸업을 하자마자 이곳 캐나다에 오게 된 나는 이제 벌써 노년이 되어 이렇게 지나온 뒷길을 돌아보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대학을 졸업해도 아주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거나 아님 튼튼한 줄이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가 쉽지 않은 때에 마침 이곳 캐나다에 삼촌이란 연줄로 인하여 23년의 한국 생활을 마치게 되고 지금은 이 낯선 땅 캐나다에 와서 벌써 50년이란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의 지난 23년간의 인생 속에 만났던 그 수많은 모든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몰라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하고 살았든, 모두가 사느라 힘이 들었고 고생들을 많이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며 이제는 아직도 어디엔가 살아 있다면 어디선가 필자와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한국에서의 인생은 그저 그렇게 끝이 나고 이제 지난 50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돌아보니 어찌 보면 고생이었다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정확히 받을 수가 있고, 일확천금의 기회나 아님 부정부패를 하여 돈을 벌 수도 없고 오히려 세금도 많이 내야 하고, 또 겨울이 너무 길고 어찌 보면 삭막하고 재미없는 나라, 매일 살아가는 문화생활도 한국보다 뒤지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가 선진국이고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살기에는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286
18284
2022-04-28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3)

 

(지난 호에 이어)

저녁에는 시냇물가에 높게 쌓아놓은 성뚝에 어머니와 겨울 준비를 위한 땔감을 사기 위해 올라가면 수많은 나무꾼들이 지게마다 섬만한 나무들을 쌓아놓고 저마다 손님을 기다리며 곰방대(지금의 담배 파이프)를 길게 빨면서 고달픈 인생사를 한탄이라도 하는 듯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노을이 저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던 표정들이 지금도 역력하다.

 

어린 시절엔 아무 이유나 계산없이 친구를 사귀게 되고 나이가 들수록 이유가 있어야 친구를 사귄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필자는 동네 친구들이 정말 많이도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때의 코흘리개 친구들의 수많은 얼굴들이 끝도 없이 또 자꾸만 떠오른다. 이제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멀고 먼 이 땅 캐나다라는 나라에 와서 텅 빈 허공 속에서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한 대비나 계획을 세우고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원래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고 또 완전치 못하기에 살아가면서 안전하고 영원한 것을 찾다 보니 신을 믿을 수밖엔 없고 또 신을 찾지 못하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서까지 섬기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살던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쯤 되던 해에 무심코 어머니를 따라서 어느 한 교회 전도관이라는 곳을 들러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당시 박태선 장로라는 사람이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는데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교회당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울고불고 저마다 조그만 병에 든 생명수를 산다며 긴 줄을 서있던 아줌마와 아저씨들의 얼굴들이 기억난다. 그곳에 있던 필자는 지루하기도 하고 가끔씩 갑자기 소리치는 설교자가 두렵기도 했지만 가끔씩 내 손에 쥐여지는 신앙촌이라는 곳에서 만들었다는 카라멜은 정말 맛있었고 달콤했었다.

 

당시엔 본인이 구세주 메시야라 떠들며 태초의 아담과, 예수는 실패했고 세 번째인 자가야말로 진짜라며 본인이 감람나무란 호칭까지 받던 그가 역시 또 하나의 사이비 종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필자가 성인이 돼서의 일이지만 그 당시엔 본인 박태선은 물론 그의 두 아들까지도 당시의 7공자라는 퇴폐단체에 이름까지 올리며 대단한 권세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얼마 전 죽은 또 하나의 사이비 문선명의 한국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까지 퍼져나간 통일교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엔 경기도 소사와 덕소에 신앙촌이라는 마을도 세우고 비누, 과자, 화장품까지 만드는 하나의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당시 박정희 정권도 무시 못했던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박태선의 종교(천부교)와 가족 일가의 역사가 있었다.

 

어찌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사이비 종교들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우리 인간들이 정신적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상 다가오는 미래에도 이런 것들은 영원히 존재하며 계속 생길 것이다.

 

그 당시에 필자의 기억으로는 나의 어머니 친구 몇 분들이 온 재산을 다 팔고 신앙촌으로 이사를 한다며 서둘던 아줌마들의 얼굴이 기억나는데 어린 마음에도 어찌 그리 그분들이 한심해 보였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가 전도관이란 교회당에 들어가면 제일 많이 부르던 노래 중 하나가 "오늘도 모여왔네 어린 성도들, 천련성 들어가려고. " 그가 주는 생명수를 마시고 저를 따르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미리 마련한 천년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정말 웃지 못할 희극 아닌 희극에 휘말려 나이와 인텔리를 막론하고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온 재산을 다 가져다 바치는 그들은 당시 어렸던 필자에게도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각 반의 선생님들이 공부하던 모든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줄을 세우며 길거리를 걷게 했는데 우리는 물론 거의 대다수가 영문도 모르고 길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는데 당시엔 우리보다 큰 중.고등학교, 대학생들의 일부는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누비던 생각이 나는데 그것이 바로 1960년 4.19 학생 혁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JOHNCHO
95130
18284
2022-04-21
우리가 걸어왔던 길(The journey we have taken)(2)

 

(지난 호에 이어)

 당시엔 잘 사는 사람들이라야 끼니를 건너지 않고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칭했고, 부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는 매주 학교나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주는 이미 지방과 영양분을 빼어버린 우유가루와 강냉이 가루의 배급을 받고, 또 미국을 비롯한 타국에서 모아진 구호물자란 이름이 붙은 옷가지를 얻어다 입고 다니던 시절이고, 세상 돌아가는 실정을 알고 이해하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어렸던 필자는 그런 비극 중에 비극의 슬픈 시절이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지나간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던 유치원 시절이 끝나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유치원 원장 선생님 이름으로 시작하여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 선생님들의 이름, 그리고 얼굴들, 유치원 원가와 학교 교가 등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만 이제 모두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생각하니 참으로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것 같다.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고 하교할 때면 학교 앞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조그만 다라나 당시엔 나무로 만든 빈 사과상자 위에 씹으면 달짝지근한 수수깡 대나 혹은 민물에서 잡은 올갱이(민물 소라)를 삶아 한 홉씩 또는 산에서 캐온 칡뿌리 등을 널어놓고 몇 푼 안되는 코 묻은 돈을 벌어보려 하지만 워낙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필자의 기억엔 그것들을 사먹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나마 학교 앞에는 공책, 필통, 연필과 그리고 사탕이나 비과(당시 일본 카라멜), 군인들이 먹는 건빵 등 몇 가지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는 하나의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그 집 아들 이재승이란 친구와 한반이었던 나는 그를 많이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눈깔사탕(왕사탕)이란 것이 있었는데 워낙 사탕의 알이 커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은데 그 당시의 우리들에겐 한 알을 입에 넣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단맛을 즐길 수 있었기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최고의 주전부리 종목이었다.

 

 필자는 부모님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1학년 때인가 교회당 안에서 헌금봉투를 주웠는데 얼마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엔 나이가 많이 어렸다 해도 남의 것을 훔친다는 죄의식이 있었음에도 그 돈으로 교회 앞 구멍가게를 들러 사탕 한 움큼을 집어들고 동네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그만 어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야단을 경치게 맞고 그 이후론 한참이나 혹시 하나님이 날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교회 가기가 겁이 나고 밤에 잠을 설친 기억이 난다.

 

 당시엔 학교를 다니며 기다려지는 날들이라야 기껏 매년 가을쯤 행해지는 원족(소풍)가는 날과 가을 학교 전체의 운동회를 하는 날 뿐이었고 해마다 그때만 기다리며 마음이 설레던 때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때만이 찐밤, 찐고구마, 옥수수, 김밥, 단감 등 먹거리가 풍성하고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리도 여름날의 매일이 길었던지 무료하고 지루하던 하루를 지내는 것이 지금의 일주일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햇볕이 불볕처럼 느껴지던 긴 여름날에 끊임없이 들리던 매미의 구성진 울음소리와 함께 집 앞에 가꾸어 놓은 꽃밭과 넓기도 했던 텃밭엔 수박, 참외, 토마토, 배추, 열무, 오이, 가지 등 여러 가지 채소 그리고 옥수수, 참깨, 들깨 등 많은 곡물들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아침이면 활짝 피어나던 나팔꽃, 채송화, 봉숭아 그리고 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매미를 대신하는 귀뚜라미의 우는 소리 역시 구성진 것은 마찬가지로 저녁상을 물리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 화투장을 돌리며 한숨을 쉬는 어른들의 푸념을 위로라도 하듯 긴 시간 동안 모두가 잠들 때까지 울어대던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교 후엔 지금은 안 계시지만 당시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유난히도 약하셨던 작은누나와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메뚜기를 잡는다며 온동네 논밭을 휘저으며 다니다 논 주인에게 쫓겨 다니고 뜰채를 가지고 미꾸라지, 붕어, 송사리를 잡는다며 시냇가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흙탕물 일으킨다며 꾸중을 하던 그 모든 사람들은 이제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