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나그네와 종으로 살아가기

필자가 젊은 시절, 교회에서 가장 자주 불렀던 찬양 가운데 하나가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였다. 청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 한국 교회에는 이른바 ‘고지론’​이 큰 호응을 얻었다. 전쟁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해야 승리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정상에 올라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운동이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정직한 방법으로 성공하며,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자는 외침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성경 인물이 요셉이었다. 노예와 죄수라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로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신앙을 지키며 최고 지도자가 된 다니엘,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다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 왕비가 되어 민족을 구한 에스더 역시 대표적인 본보기로 제시됐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스데반의 설교(사도행전 7장)는 이러한 해석과는 조금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되짚으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여기서 발 붙일 만큼의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 괴롭게 하리라.”(사도행전 7장 5~6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을 다스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이 나그네가 되고, 종이 되고, 고난을 겪을 것​을 먼저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세상의 고지를 점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언약을 붙든 나그네의 삶을 통해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하자마자 큰 흉년을 만난다.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기근이 비켜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고, 아내 사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을 드러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당대 최고의 권력자, 파라오를 책망하시고 사라를 지켜내셨다.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다. 창세기 26장에서 흉년을 만나 그랄에 머물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두려워한다. 그 역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언약의 가정을 보호하신다.

이처럼 성경은 믿음의 조상들의 영웅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을 끝까지 붙드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다.

요셉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타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하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총리가 된 것은 그가 성취하려 했던 인생의 목표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델이었다.

스데반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다”(사도행전 7장10절)고 말한다. 강조점은 총리라는 지위가 아니라 환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내신 사역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야곱의 가족도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와 종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출애굽을 이루신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절반 가까이를 출애굽 이야기(행 7:20~44)에 할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즉 애굽에 정착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곳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

룻기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떠난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오지만,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그 가문을 회복시키신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가정사의 회복이 아니라, 다윗과 결국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보를 보여준다.

이처럼 성경은 언제나 인간의 고난과 성공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진실로, 나그네가 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였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이라는 이방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취급을 당했으며, 죄인들의 손에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려 하지 않으셨으며, 사탄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며 절하라고 시험했을 때도 거절하셨다. 사람들은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으로 물러나셨고, 결국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셨다. 함께 매달린 강도를 살려내기 위해, 깡그리 도망친 제자들에게 쏟아부여져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홀로 십자가에서 덮어쓰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의 나그네 이야기, 종이 되는 이야기, 포로가 되는 이야기, 흉년 때문에 이방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는 모두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보여 주는 언약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세상의 꼭대기에 올려 영광을 드러내시기보다, 십자가의 길을 배우게 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스데반은 설교의 마지막에서 이사야 66장을 인용하며 선언한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제국이나 화려한 문명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 세상의 고지를 점령한 성취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오히려 십자가의 피와 정확히 반대의 이야기다.

이 세상의 실체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는 곳이다. 선지자들을 죽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은 곳이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한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항상 성령을 거스르며 의인을 핍박해 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지론은 힘을 잃는다. 성도가 이 땅에서 맡은 사명은 세상의 정상을 점령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요셉처럼 높은 자리를 허락하시고, 다니엘처럼 지도자의 위치에 세우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언약을 보존하고 오직 예수의 피로만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 뿐이다.

성도의 궁극적인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립보서 3장) 우리는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기다리는 나그네(베드로전서 2장)다.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 집이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광야이며, 애굽이요 바벨론이다. 여기서 성도는 세상의 성공 방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배운다. 이방의 땅에서 고난을 견디고, 자신을 내어 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며,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삶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세계관은 세상을 점령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이끌려 가는 데 있다. 언약의 백성은 애굽에 뿌리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출애굽을 기다리는 사람이며, 바벨론에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어린 양의 구원하심만 찬송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순례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고지를 점령한 무용담을 늘어놓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어린양의 공로 만을 찬송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편집인)

부동산캐나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