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니 새벽에 자주 깨는데 억지로 자느니 가끔 일찍 일어나 다음 날 할 일을 미리 준비하거나 밀린 일들을 처리하면 하루를 훨씬 더 보람차게 보낼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억지로 자려고 하면 요즈음 일어나는 골치 아픈 일이 주로 생각나지만 전날 본 드라마나 방송 프로그램이 머릿 속에서 계속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엔 한국식품에서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 밤새들 보곤 했는데 화질도 안 좋고 또한 그것에 중독되면 일하는데 지장이 있기도 하거니와 원래 영화니 연극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저는 거의 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한국 드라마가 사실 상당히 조잡해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기는 조잡해도 다른 것이 조잡한 건 못 보니까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느 여학생이 연극 티켓 두 장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 당시 제 여친에게 “혹시 재기씨와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얘, Mr. Kim은 영화관만 들어가면 자는데 연극을 좋아하겠니?"해서 못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말에서 우리가 몇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왜 자겠습니까, 아까운 돈내고 들어왔는데. 영화를 그냥 보기만 하면 좋은데(가끔 골프도 보기만이라도 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당연하죠, 지금도 잘 못 알아 듣는데 이민온 지 얼마됐다고)은 꼭 저에게 물어봐요.
"자기야, 쟤가 뭐라고 하는거야" "어? 어, 딴 생각하느라고 깜빡 못 들었어" 못 들을리가 있나요, 못 알아들었지. 그런데 같은 핑계도 한두번이지 맨날 딴 생각만 할 수 없으니까 처음에 들어가서 조금 보는 척하다가 난해한 부분이 나오면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다가 그만 잠이 한번 들어버리기 시작하니까 나중엔 무엇을 보든 클라이막스가 시작되려고 하면 잠이 쏟아집니다.
이게 한번 버릇이 되니까 TV를 보더라도 야구중계도 5회 정도 되거나 골프도 마지막 조 10홀부터 제일 재미있는 장면은 꼭 잠이 들어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여자들은 남자가 자기 외에 다른 여자와 있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점점 이국화가 되는 게 아니고 한국화가 되어 가는 겁니다.
음식도 전엔 양식도 잘 먹고 김치없이도 며칠은 견뎠는데 요즈음은 한식아니면 도저히 먹질 못하겠고, 김치가 없으면 속이 느글거리고, 예전엔 영화배우도 코가 크고 눈이 큰 금발의 서양배우들이 이뻤었는데 요즈음은 그들보다 김태희, 한예슬 등 한국배우들이 훨씬 예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요즈음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을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장면 장면마다 너무 아름답고 스토리 전개가 매우 흥미진진해 어떨 땐 밖에서 동무들이 보자고 해도 그냥 집에서 TV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곧 잠이 들어 버리긴 하지만.
저는 매일 보는 게 아니고 띄엄띄엄 보니까 스토리 전개가 잘 이해가 안될 때 제 안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안사람은 빼놓치 않고 보니까요. "여보, 쟤가 왜 저러는 거야?" "그냥 보기나 해요" "골프치냐? 보기나 하게" 물론 스토리 중간에 몰두해 있는데 귀찮겠죠, 하지만 자기가 날 자는 버릇 들게끔 한 것은 어쩌고.
좌우지간 제가 요즈음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 불후의 명곡, 각시탈, 세바퀴, 개그콘서트, 무신 등 여럿인데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추적자'와 '빛과 그림자'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한국 분들은 제목을 줄여 부르는 게 유행입니다. 가령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일밤', '우리 결혼했어요"를 '우결', '남자의 자격'을 '남격', '개그 콘서트'를 '개콘' 뭐 이런 식인데 그러면 작년에 한 프로그램이 나와 사람들이 뭐라고 줄여 부를까 제가 무척 긴장한 적이 있습니다.
부잣집 사촌지간인 총각 둘과 한 부하 여직원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를 그린 '보스를 지켜라'. 다행히 그 프로가 인기가 없이 끝나는 바람에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만약 줄여 부른다면 뭐가 됐을까요?
얼마 전 동무와 저녁 때 먹을 건 없고 소주 생각도 나서 노스욕 식당에 들렸습니다. 아가씨가 주문받으러 왔습니다. "뭐 드실래요?" "소주 한 병하고 오라 콤보로 주세요" 아가씨와 동무가 저를 쳐다봅니다, '뭐라는거야? 하는 표정으로. 아가씨가 제 동무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물어봅니다. "오라가 뭐예요?" "오라? 오징어 뎀푸라지" 두 사람이 박장대소하며 웃습니다. 이렇게 줄여서 부르면 안 되나요? 꼭 앞 대가리로만 줄일 필요는 없잖아요.
요즈음 이곳에서도 한국 대통령 선거로 떠들썩합니다. 투표하러 가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뽑아야 할 사람 옆에 X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X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X표는 나쁜 뜻으로 사용하는 건데. 아하, 알았습니다. 어차피 정치가는 뽑히고 나면 나쁜 사람이 된다…이런 뜻 아닐까요? 아니면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싫은 사람을 뽑는 건지....
정치하시는 분들 다음부터는 O표 받도록 분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