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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택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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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나는 왜 자꾸 부끄러워지는지…

 

 요즘은 이곳 캐나다에서도 주위를 둘러 보면 삼성 전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로 나서면 옆에 현대차가 지나가는 일은 이제 조금도 낯설지 않다. 입고 있는 옷이나 쓰는 물건이 ‘한국산’이라고 하면 그 물건이 ‘고품질’의 제법 괜찮은 제품이란 뜻으로 알아듣게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한 건 최근까지도 이 곳 북미의 언론매체에서 ‘한국(Korea)’이란 말을 보거나 듣는 일은 여전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 곳 신문에서 ‘Korea’는 거의 늘 볼 수 있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앞에 ‘North’가 붙어 있는. 


사람들은 1500년대 초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처음으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후에도 100년 이상이 걸려서야 겨우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인해 박해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이다. 그는 결국 이 지동설을 믿었던 사실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소신을 굽힌 후에야 겨우 풀려났으나 재판정을 나서면서 나직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재판에 관한 구체적 사실들은 몇 몇 다른 설들이 전해진다.)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는 늘 그렇듯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신라에서도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법흥왕 앞에 이차돈이 나타났다. 그는 불교공인을 적극 주장하면서 자신을 죽임으로써, 대다수가 반대하던 대신들에게 왕의 권위를 세우면서 신하들의 뜻을 꺾을 것을 제안했다. 


왕은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불교공인여부를 논의하게 했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를 했다. 이 때 이차돈이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왕은 모든 대신들이 반대하는데도 혼자서 찬성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차돈을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차돈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부처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목을 베는 순간 우윳빛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를 본 대신들은 누구도 더 이상 불교공인을 반대하지 못 했고 이 후 새로운 사상인 불교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차돈은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위한 순교자가 되었다.


 이 후에도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거나 죽임을 당하는 과정은 반복되어 왔다. 유럽에서는 수백년에 걸쳐 무수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과정을 거쳐 이제는 이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한국도 90년대 말에 급속한 민주화가 이뤄진 후 21세기에 들어서면서는 그런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거의 없어진 듯했다. 그런데, 그 건 나의 착각이었다. 


근래 들어 한국에서는 다수국민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듯하다. 단순히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변한 차원을 넘어 아예 국가가 공식적으로 그런 일에 앞장서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감을 본다. 


다수 국민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공연이 공공연하게 집단 테러적인 협박으로 인해 취소되는가 하면, 국가가 대학교수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막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아무렇지 않게 국회에 제출되기도 한다. 집권세력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들의 권리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최근에는 어느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연구한 끝에 내놓은 저서의 내용이 다수국민이 믿고 있거나 믿고 싶어 하는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 일부를 삭제하게 하고, 벌금을 천만 원씩이나 부과하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판결의 이유를 보면, “책의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그 판사가 말하는 ‘사실’이란 지금의 사회분위기에 맞고 현집권세력과 다수국민들이 믿고 있거나 믿고 싶은 사실이 곧 ‘사실’이고 ‘절대적인 진실’인 듯하다. 


이성적인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아무리 그럴듯한 법률과 제도를 잘 갖추고 있더라도 문명화된 개방사회가 될 수 없다. 그런 사회는 구성원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된 근대적 자유민주국가를 이룰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내가 믿고, 우리가 믿는 사실이 곧 ‘절대적 진리’가 되어 누구도 이를 부정하는 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암흑기의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예전에 역사책에서 읽었던 끔찍한 장면들이 자꾸 겹쳐져 고개를 흔들 때가 많다. 수백년전의 종교재판과 마녀재판의 망령이 어떻게 21세기 한반도에서 버젓이 되풀이 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 한쪽에선 ‘보수’ ‘진보’의 망령에 사로 잡혀 집단적으로 이성적 까막눈이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선 고대왕조국가놀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요즘 들어 부쩍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부끄러워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간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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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마이크만 잡으면

 

최근 한국에 있는 옛 직장동료가 자기가 활동하는 클래식기타동호회에서 연주회를 가진다고 알려왔다. 나도 클래식기타를 취미로 즐기고 있어 관심이 많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가볼 수 없어서 무척 아쉽다고 했더니, 연주회가 끝난 후 자기가 연주한 부분을 유튜브에 올린 걸 페이스북에 띄웠다. 기타소리도 맑고 연주도 좋았지만 본인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무대울렁증’으로 인해 연주를 망쳤다고 무척 아쉬워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 두 군데 다소 덜 매끄러운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그만하면 아마추어 동호인으로선 괜찮은 연주였는데도 말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람들 앞에 나가서 얘기하거나 뭔가를 해야 하는 일이 가끔씩 생긴다. 특히 회사에서 기획업무를 하거나 영업을 하는 이들은 남들에게 자신의 기획안이나 상품을 팔아야 하므로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조리있게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또 개인적으로도 하다못해 동창회모임 같은 자리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해야 할 때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모임자리에서 사람들 앞에서 한 마디 해야 할 일이 가끔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중 앞에만 서면 움츠려 들고 다리가 떨리면서 손에 땀이 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증상을 ‘무대울렁증’ 또는 ‘무대공포증’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런 무대공포증이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 공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 크다고 한다. 심지어 직업상 늘 대중 앞에 서는 가수나 연주자, 직업 사회자 같은 사람들도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어느 정도는 이런 공포감을 느낀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Robert Yerkes와 John Dodson같은 학자는 무대공포증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공포심은 우리의 성취능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이 증상이 자신의 발표나 연주를 망친다는 걸 알기에 이 ‘무대울렁증’을 두려워한다. 그렇다 보니 이런 증상에 대한 다양한 해법들도 많이 알려져 있다.


흔히 많이 알려진 전문가들의 조언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발표할 내용을 암기하거나 요점을 정리해 충분히 연습하라. 2. 발표 시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해 청중 몇 명과 미리 익숙해져라. 3. 청중이 속옷 바람으로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라. 4. 농담을 던져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줌으로써 자신과 청중을 느긋하게 만들어라. 이 외에도 껌을 씹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방법으로 몸의 긴장풀기, 명상하기, 카페인 피하기, 운동하기, 최대한 웃기, 좋아하는 시나 노래 읊기, 천천히 말하기, 자신감 있는 척 하기, 긍정적인 생각하기,… 등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알려진 소위 ‘전문가’들의 조언은 일견 그럴 듯 하게 들리지만 사실 자세히 뜯어보면, 조금 심하게 얘기해서 잔뜩 긴장해 있는 사람한테 “긴장을 최대한 풀고 연습 많이 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하면 돼!”라고 하는 것처럼 너무 상식적이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얘기를 한 첫 경험은 친구 결혼식 사회를 맡았을 때였던 것 같다. 친구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한 친구의 사회를 내가 맡았었기 때문에 이전에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구경한 적도 없어 사실 꽤 부담스럽고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다소 긴장한 채로 하객들을 안내하고 좌석을 정리시킨 후 비교적 차분하게 식의 시작을 알렸다. 식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드디어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식순을 하나 빼먹고 다음 순서를 말해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이내 알아차리고 그냥 원래 식순을 다시 얘기하고 진행시켰다. “죄송합니다.”라거나 “정정하겠습니다.”따위의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앞의 내 말을 무시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순서로 돌아가 식을 진행시킨 것이다. 나중에 보니 아무도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소위 전문가들의 무대울렁증해소법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대부분이 그 근본 원인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대증요법에 머물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대공포증은 결국 ‘실수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는 ‘완벽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은 완벽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이를 없애는 방법은 이 ‘잘못된 믿음’을 깨는 것이지 두려움 자체를 바로 없애겠다고 덤벼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평소에 전혀 완벽하지도 않은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한 것처럼 보이고 싶은 잘못된 욕심이 그 무시무시한 무대공포증의 정체라는 걸 깨닫고 나면 해법은 의외로 쉬워진다. “나는 사실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가끔 엉뚱한 실수도 저지르고 말재주도 완벽하지는 않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좀 실수한들 뭔 대순가? 그냥 평소 내 모습을 보여주면 되지 뭐.” 이 게 무대공포증해소법의 정답이 아닐까?


연말이 가까워 오니 크고 작은 모임들이 잦아진다. 모임에 나가면 원하지 않아도 때로는 자기소개도 해야 하고, 인사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마이크 잡고 노래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일에 부담을 느끼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은 분들은 명심하시라. 그대는 그리 완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임을. 그대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들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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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나 잘 살고 있는데

 


나 잘 살고 있는데

 

 


단잠 자고 일어나니
개운하고 기분좋아 큰 기지개 켜는데
“카톡! 행복한 하루 되세요.”한다

 

아침커피 음미하며 컴퓨터를 켜니
“행복하게 사는 법 5가지”
페이스북 친구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침 신문 펼쳐드니
“한국 국민행복지수 OECD 최하위권”
모두 모두 행복 찾아 분발하라 다그친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 반갑다며 얘기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크게 한 자리 했을 인물이…”
혀를 끌끌 차며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넨다

 

지금도 세상 한 자리 차지하고 나 잘 살고 있는데
밥 잘 먹고 잘 마시며 나 잘 살고 있는데
행복이 뭔지 몰라도 나 잘 살고 있는데

 

별 볼 일 없어도 별 일 없이
나 자알 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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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아는 만큼 보인다-<강물따라 역사는 흐르고>(손영호 저)를 읽고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글 속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벌거벗은 모습을 세상에 내보이는 행위와 같다. 깊이 있고 아름다운 생각을 세상에 알려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난 척 하고 쓴 글이 오히려 자기의 부끄러운 속살을 만천하에 내보이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속에서 그 사람의 지식의 정도와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건 늘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며, 어떤 사람이 쓴 글에 대해서 평을 하거나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한다는 건 더욱 조심스럽고 부담스런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1권의 머리말에 써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원래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부친 발문에서 따온 것이다. 그 원문은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인데,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는데 그렇게 모으는 것은 단순히 그냥 모으는 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면에 적용이 되는 말인데, 특히 낯선 곳을 여행할 때에 더욱 실감하게 되는 말이다. 최근 영화칼럼니스트 겸 여행작가인 손영호씨가 출간한 책 <강물따라 역사는 흐르고>를 읽으면서 나는 이 말을 다시 떠올렸다, 책을 읽어가면서 그 속에 담긴 방대한 정보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폭넓은 지식과 견문은 책 전체를 통해서 나타난다. 낙동강 구간에서 ‘지옥의 길’이라고 할 정도로 악명 높아 일명 “빡신 고개”로 알려진 박진고개를 넘는 장면에서는 힘든 고갯길을 넘어가면서 느끼는 고통과 절망감을 풀어 나가다가 문득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시작되는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나오는가 하면, 그 곳 시멘트 벽에 다른 여행객들이 새겨놓은 낙서들을 보다가 갑자기 영화 “The Mission”의 로드리고 맨도사를 떠올리며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나오고 세라 브라이트만의 ‘넬라 판타지아’ 얘기로 이어가는 글은 저자의 풍부한 감성과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경남 함안군 악양루에서는 중국 절강성 소주 출신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가 나오고 전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을 보좌했던 주룽지 전국무원총리가 이 시를 늘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중국역사와 현대사를 꿰뚫고 있는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여행기가 아닐까 싶다.


표충사에 가서는 그 절의 주불전이 대웅전이 아니고 대광전인 점을 지적하면서,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대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데, 이 절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셨고, 오른쪽에 약사여래불, 왼쪽에 아미타불을 봉안한 점을 지적한다. 이어서 해인사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설명한 후 이는 중국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중 봉선사 석굴의 불상 배치와 똑같다고 적고 있다. 다시 한번 저자의 폭넓은 견문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예들은 책을 한 쪽 한 쪽 넘길 때마다 군데군데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에는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과 제주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본 풍광에 대한 단순한 서술뿐 아니라 저자의 폭넓은 견식이 빼곡히 담겨 있다. 책을 펼치면 마치 이 가을날에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놓은 것처럼 보석 같은 내용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단순 여행기의 차원을 넘어선 훌륭한 인문지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단순히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과 제주도 일주 1000 Km를 여행한 게 아니라 가야국에서부터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을 넘나들고 거기서 다시 중국, 인도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뛰어넘으며 1백만 킬로미터 이상의 여행을 한 듯한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글 내용도 그렇거니와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도 자세히 보면 한 장 한 장이 예사롭지 않고 웬만한 사진작가의 작품 이상으로 구도나 선명도가 뛰어나서 저자의 미적 감각을 짐작케 한다.


이 책에 나오는 3대강과 제주도 종주여행은 사실 저자의 부인 이양배씨가 “4대강종주 및 국토종주”를 하는 과정 중 일부 구간을 저자가 곁다리로 동행하게 됨으로써 나온 기록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저자 손영호씨가 아니고 그의 부인 이양배씨라고 할 수 있다. 예쁘장하고 가냘픈 체구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와 강단이 나오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양배씨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은 힘든 이민생활을 하는 독자들에게 강물따라 흐르는 고향의 역사와 문화 등을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손영호씨의 첫 저서가 산고(産苦)를 겪고 세상에 나왔으니 앞으로 영화이야기, 중국이야기도 잇달아 출판하여 저자의 그 넓고 깊은 견문과 지식을 많은 사람들이 나눠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강물따라 역사는 흐르고’ 책을 구입하실 분은 본보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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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조삼이모사면 족호아?

 

 교육정책이 해마다 바뀌곤 하다 보니 한자교육에 대한 정책도 수없이 많이 오락가락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히 내 경우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때까지 한자를 계속 배웠고, 고등학교때는 한문과목도 있었다. 아마 제1과 새옹지마, 2과 조삼모사…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인생의 교훈과 지혜가 담긴 고사성어들을 말하자면 원어로 배웠던 셈이다. 


 고사성어들을 한문으로 배우면서 중국에는 이렇게 수많은 고사성어들이 전해 내려오고, 유대인들에겐 탈무드가 있어서 그 걸 통해 값진 삶의 교훈을 후세에 물려주는데 우리는 수천년의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이런 지혜를 체계적으로 전승해 주는 수단이 없음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시간에 배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 중국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狙)는 원숭이를 뜻하는 말이니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숭이를 무척 좋아해서 많은 원숭이를 길렀다. 원숭이를 너무 좋아해서 많이 기르다 보니 그 먹이도 여간 드는 게 아니어서 살림이 점점 어려워져 갔고, 급기야 먹이를 줄여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렇다고 원숭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우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줄 도토리를 이제부터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로 하면 좋겠느냐?” 이 말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저공은 다시 이렇게 고쳐 물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로 하면 좋겠느냐?” 원숭이들은 모두 흡족해 했다.


 오래전 고등학교 한문시간에 이 고사를 배울 때는 저 원숭이들의 단순하고 어리석음을 비웃었었다. 그런데, 이 고사를 배운 후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보면 사람들도 저 원숭이들과 다름없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연말세금폭탄’ 소동으로 정부가 많은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봉급생활자들의 경우 전 연도 수입을 기준으로 하여 매월 일정액의 세금을 원천징수한 후 연말이 되면 한 해 동안의 실제수입을 바탕으로 정확한 세금을 계산하여 정산을 하게 된다. 이 때 미리 뗀 세금이 너무 많을 경우에는 환급을 받게 되고, 너무 적게 떼었을 경우에는 그 차액을 한꺼번에 내야 하므로, 그 때까지 매월 내왔던 금액보다 다소 많은 금액을 연말에 내게 된다. 


 이성적 계산으로 따지자면, 세금을 미리 너무 많이 냈다가 나중에 돌려받는 것보다는 처음에 조금씩만 내고 나중에 정산해서 모자란 부분만큼 더 내는 게 당연히 이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과 언론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공의 원숭이들이 떠올라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국민소득이 중진국 수준을 넘어가면서부터 선거철만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쟁점이 복지이다. 흔히들 많이 하는 얘기가 “우리나라도 이제 어느 정도 잘 살게 되었으니 복지수준을 늘려야 한다”고 한다. 이런 생각에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찬성하는 듯하다. 문제는 복지의 범위를 어느 선으로 할 것인가하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를 두고 의견들이 분분하다. 온갖 논리와 외국의 사례를 들어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며 쉽사리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복지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복지란 한마디로 ‘국가가 개인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이다. 근대민주국가가 성립되기 이전 왕조국가에서처럼 지배계급이 따로 정해져 있어서 백성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정의 세금을 뜯겨야 하는 입장이라면, 국가에서 뭐든지 많이 해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 개개인이 국가운영의 주체로서 국가의 영역과 개인의 영역을 정하고, 그에 따라 국가운영을 위한 비용으로서 세금을 낸다. 이런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이 철저하다면 복지정책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캐나다에서 의료비가 공짜라고 하는 건 잘못된 말이다. 캐나다에서는 평소에 가게에서 껌을 하나 살 때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나중에 아플 때를 대비해서 미리 의료비를 내고 있고, 봉급을 받을 때도 미리 병원비를 내놓고 나중에 타먹고 있는 것이다. 


 쿠바나 북한에서는 의료비나 교육비를 모두 국가에서 부담해 주니 의료와 교육이 공짜라고 하는 건 주공의 원숭이들과 같은 바보들의 계산법이다. 그들은 모든 걸 미리 국가에 다 바쳐 놓고 조금씩 타먹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상교육’, ‘무상급식’이란 말은 국민들을 기만하는 잘못된 용어들이다. ‘국가교육’, ‘국가급식’이라고 해야 맞다. 


 한국에 새 대통령이 들어선지 석달도 되지 않아 11조300억원의 추경예산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와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국가에서 뭔가를 많이 해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민주국가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전제군주국가의 백성과 같은 사고방식에 갇혀 있거나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주인의식이 확실한 사람은 누구의 간섭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기를 원하지만,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모든 걸 누군가에게 맡기고 모든 일을 누군가가 알아서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다. 민주국가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를 해주는 복지란 ‘개인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뭔가를 개인차원에서 각자 해결하지 않고, 국가차원에서 공동으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 각자의 주머니에서 미리 국가에 더 내놓은 돈을 나중에 타먹는 것이거나 미리 빚을 내서 쓴 뒤 후손들이 부담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국가에서 공짜로 해주는 걸로 착각하는 건 저공의 원숭이들보다 더 어리석은 계산법이다. 원숭이들은 세금을 부담할 필요없이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는 입장이니 저녁에 하나 더 받는 것보다 몇 시간이라도 빨리 아침에 미리 하나 더 챙기는 게 이익이다. 하지만, 국가재정을 자기 주머니에서 낸 세금으로 채워야 하는 국민들의 입장은 다르다. 민주국가의 시민이 주인의 재정에 기여할 필요없이 일방적으로 받아먹기만 하는 원숭이들과 같은 계산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원숭이처럼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다. 조삼이모사면 족호아? (朝三而暮四足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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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헌 법’이 되어 버린 헌법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후 지금껏 이런 저런 자리에서 수도 없이 불러 왔던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이다. 일제 강점기에 천재예술인으로 불렸던 안석주가 노랫말을 썼고, 그의 아들이며 당시 음악대학을 다니던 작곡가 안병원이 곡을 붙였다. 


 원래 이 노래는 1947년 한국방송의 삼일절 특집 방송드라마주제곡으로 발표되었고,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로 만들어졌다. 이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남북의 분단이 기정사실화됨에 따라 후에 교과서에 실릴 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노랫말이 바뀌었다.


 원래 남한에서만 불리던 이 노래는 80년대 이후 공식 비공식적으로 남북간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북한에도 널리 퍼져 가히 ‘한민족의 노래’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민족 7천만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작곡자 안병원씨는 1974년 캐나다로 이민 와 토론토에서 살다가 2015년 봄에 별세하셨기에 토론토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는 더욱 가슴에 와닿는 노래이다.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반도에 최초의 한민족 통일국가가 들어선 이후 후삼국으로 잠시 다시 쪼개진 기간을 거친 다음 고려 건국 이래 천년이 넘도록 이어져 왔던 민족통일국가가 다시 쪼개진지도 70여년이 지났으니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의 통일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바라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도 절실한 일이다. 


 통일은 우리민족에게 그토록 당연하고 절실한 일이기에 국가의 기본이념과 지향하는 바를 밝혀놓은 헌법에도 이 점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북한지역도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4조에서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밝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이 점을 적시하고 있다.


 헌법 제4장에서는 누가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제66조 2항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3항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이달 초 세계주요 20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문대통령은 퀴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대한민국의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며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 ……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잘 사는 한반도입니다. ……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라고 했다. 


 문대통령은 헌법상에 명시된 우리의 국토인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정상적인 국가행정력이 미치는 국토로 회복하여, “영토 보전”을 해야 할 의무를 지킬 생각이 전혀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아예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구상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3대세습 봉건적 독재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적 공존을 지향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저 전쟁이 없는 “평화”만 유지된다면 영구적인 분단국으로 고착화시키는 것이 문대통령과 새정부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는 점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헌법 4조와 66조에 명시된 의무를 하지 않겠다고 세계만방에 아주 똑 부러지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불과 두 달전에 헌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선출된 대통령을 “헌법 수호의 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탄핵한 후 헌법 제69조에 따라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선서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렇게 새로 취임한 현직 대통령이 헌법에 명기된 의무를 더 이상 이행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고, 탄핵된 대통령은 현재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아니할 권리’, ‘적법한 절차에 의한 처벌’, ‘무죄추정의 원칙’,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불리한 진술 강요 금지’ 등등 … 헌법에 보장된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권리마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의 대다수는 아무 말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대통령에게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헌법은 그저 낡은 종이에 형식적으로 적혀 있는 ‘헌 법’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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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대통령의 일곱시간

 

 

대통령의 일곱시간(2.끝)

 

 박대통령은 재임기간중 통진당 해산, 전교조 법외노조화, 김영란법 제정, 공무원 연금과 교원연금개혁, 역사교과서국정화, 노동개혁 등 많은 개혁을 추진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는 듯 했지만, 결국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 당함으로써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지도자로서 처참한 실패다.

 

 이런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이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위에서 지적한 그의 리더쉽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별적인 정책들에만 매몰되어 더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기에 탄핵이라는 쓰나미가 닥쳐오는 걸 보지도 못했고, 그 쓰나미의 와중에서 자신이 임명한 법무장관, 검찰총장 등 누구 한 사람 발벗고 나서서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식으로 우선 눈앞에 닥쳐오는 일들에만 대응하다 보니 탄핵인용이 발표된 직후에도 아무런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또 다시 귀중한 황금시간대를 허송하고 말았다. 아무도 얘기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또한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대통령의 일곱시간’이었다.

 

 탄핵이 인용이 되든 기각이나 각하가 되든 보수진영은 이미 심각하게 몰락해 있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탄핵과 상관없이 올해 안에는 새 대통령이 뽑히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탄핵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보수를 다시 살릴 길을 최우선으로 고민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차기정권이 진보측에 넘어간다면 박대통령은 탄핵결과와 상관없이 퇴임후 재판정에 다시 서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를 가장 확실하게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수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탄핵인용이 된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저가 수리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을까? 내가 보기에 박대통령은 탄핵인용 후 “황금시간대”를 너무나 무의미하게 허송해 버렸다. 박대통령은 보수진영을 위해서 (그것이 곧 본인의 마지막 살길이기도 하므로) 자신이 신속하게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무얼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듯 했다. 탄핵인용시를 대비한 대안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듯하다. 또 한 번 지도자로서의 치명적인 패착이다.

 

 박대통령은 탄핵인용이 발표된 후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짧게나마 대국민 메시지를 내었어야 했다. 국가최고지도자가 어떤 이유로든 그 직을 떠나는 마당에 아무 말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 내가 그 문안을 작성해야 했다면 이런 내용을 담았을 것 같다.

 

 “우선 저로 인하여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을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라가 걱정되어 추운 거리로 나왔던 국민여러분들의 애국충정을 생각하니 더욱 송구스럽다. 거리로 나오신 분들이 손에 촛불을 들었든 태극기를 들었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의 바탕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국민여러분들의 뜨거운 애국충정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여 가슴이 아프다. 그 동안 수고하신 헌재재판관님들과 변호인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이번 재판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이 남아있는 걸 알지만, 제 억울함을 씻는 일보다는 사법제도를 존중하고 법치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차원에서 이번 재판의 결과를 깨끗이 승복하겠다.“

 

 이렇게 철저히 죽을 각오로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탄핵사태에 지친 국민들을 보듬고 (촛불까지 포함해서), 억울함을 슬쩍 내비쳐 추후 반격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법치의 가치를 개인적 억울함보다 우위에 두는 보수주의자의 의연함을 보여줬다면, 바로 이어질 선거전에서 보수측이 딛고 일어설 큰 주춧돌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재심청구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보수가 정권을 잡도록 해야 자기 억울함도 풀 길이 생긴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보수진영을 위해, 또 그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흘려보내 버린 것이다. 이는 보수측에게 적어도 몇 백만 표의 가치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는 죽어야 산다는 그런 각오도 전략도 없어 보였다. 그냥 망연자실한 모습만 보여주며 황금시간대를 속절없이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도 자신의 그런 점을 깨닫지 못하고 검찰이 짜놓은 틀에 갇혀 그들이 꾸며놓은 조서내용이나 들여다보고 고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몇 달전 탄핵정국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저들이 짜놓은 틀속에 갇혀 좁은 시야에서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끌려오다가 만장일치로 파면을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서 승산이 있다고 믿고 있는 건지… “’똑 같은 짓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다르게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음’의 정의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최일선의 개별전투에만 몰입하여서는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일선의 전투는 대대장과 사단장들에게 맡겨두고 사령관은 전략을 내놓아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돌아가는 형국은 모두들 전투에만 몰입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고, 어디에도 사령관은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린 시발점이 된 그 세월호는 이제 물위에 떠올라 ‘대통령의 일곱시간’이란 불씨에 다시 불이 지펴지고 있는 판에 대통령은 자신에게 닥친 형사소송에만 몰입해 있고, 태극기를 든 사람들은 이미 물 건너 간 ‘탄핵무효’만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저마다 눈앞의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전략없는 전투는 어리석고 미련한 싸움이다. 일선에서의 처절한 싸움은 전쟁에 이겼을 때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지만, 전쟁에 졌을 때는 한 병사의 일기장에 쓸쓸한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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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갑질때리기’ 유감

 

‘갑질때리기’ 유감

 

 한동안 온나라가 떠들썩하게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던 대한항공 조현아부사장의 터무니없는 갑질에 의한 ‘땅콩회항’사건이 조씨에게 1년의 실형이 선고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조씨는 피해 직원들을 위한 위로금조로 1억원씩의 공탁금을 걸어놓고 항소를 했다고 하니 향후 재판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땅콩회항’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행패를 부려 세상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소위 ’갑질’행태는 늘 있어 왔다. 
 

지난 해 세월호사고로 온 나라가 들끓고 몸살을 앓고 있을 당시 야당의 한 여성국회의원과 세월호가족대표들이 어울려 술을 마신 후 자신들을 태우기 위해 나온 대리기사에게 욕설과 반말을 하는가 하면 폭행까지 저지른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여성의원은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하며 자기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명함을 건넨 뒤 이 실랑이 장면을 본 한 행인이 “요즘에는 이런 거 인터넷에 올리시면 됩니다”라고 말하자, 기사를 가리키며 명함을 빼앗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이어서 폭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 보다 앞서 2013년 5월에는 남양유업의 젊은 영업사원이 나이 많은 대리점주에게 욕설과 막말을 하는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이 대리점주는 남양유업직원이 ‘밀어내기’를 강요하며 재품을 강매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폭언을 하는 내용이 담긴 음성파일을 공개한 것이다. 이 일로 그렇잖아도 경제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거세지던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로 큰 뉴스가 되는 갑질의 사례는 이따금씩 언론을 장식하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크고 작은 갑질의 사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대체로 갑의 위치에 서는 일이 많은 사람도 있고 일상적으로 을의 위치에 설 때가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언제나 갑’이거나 ‘언제나 을’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갑질’이 사회적인 이슈가 될 때마다 자주 듣는 말 중에 아주 귀에 거슬리고 못 마땅한 말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은…”이라거나 좀 더 심한 경우 “조선X들은…”이라고 하면서, 마치 이런 나쁜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비단 갑질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어떤 나쁜 사회적 현상을 지적할 때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언젠가 어느 대학교수가 쓴 신문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는데 빈자리라곤 장애인자리뿐이다. 거기라도 주차할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다. 그 때 건장해 보이는 운전자가 장애인자리에 주차한 후 내리는 걸 봤다. 비장애인이 불법주차를 했나 싶어 차를 살펴보니 장애인 자동차표시가 붙어 있다.

장애인과 함께 살지도 않는 보호자나 가족이 장애인 자동차표시를 발급받아 각종 혜택을 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한국에서는 가능할까…”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 캐나다에 20여년을 살면서 장애인 표시를 달고 장애인주차공간에 차를 대는 차를 수없이 봐 왔지만, 겉으로 보기에 장애인처럼 보이는 운전자를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정말 장애인이 맞는 걸까?


 갑질은 한국사람들만 가진 고약한 버릇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엔 어디에나 있는 현상이다. 이는 실험경제학에서 활용되는 ‘독재자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공평성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피실험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측정하는 실험으로 스위스 연구팀이 권력과 부패의 인과관계연구에 이 게임을 적용해 봤다. 게임은 일정액의 돈을 배분할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진 ‘갑’과 아무런 결정권 없이 주는대로 받아야 하는 ‘을’이 일련의 연속 라운드를 반복한다. 


 갑에게 일정액의 돈을 주고 을과 나눠 가지되 얼마를 나눠줄지는 갑이 마음대로 정하게 한 후 갑이 을에게 나눠주는 액수의 추이를 관찰했다. 그 결과, 권한과 권력을 맛본 갑은 점차 타락해가면서 갈수록 을에게 주는 돈을 줄였다. 애당초 부정직했던 이는 더욱 부패한 행동을 보였고, 정직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치관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며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데 익숙해져 갔다. 을에게 한 푼도 주지 않으려는 갑도 생겨났다. 공익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예외가 없었다. 추종하는 을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갑은 더욱더 극악해졌다.
 

이처럼 갑질이나 꼼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있는 현상이며 요즘들어 새삼스레 생긴 현상도 아니다. 물론 “그러니까 문제 될 게 없다.”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을 말할 때 제발 “한국사람들은…”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버릇이야말로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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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죽을 권리’와 ‘죽일 권리’ 사이

 

‘죽을 권리’와 ‘죽일 권리’ 사이

 

 캐나다 연방 대법원이 ‘의사 도움에 의한 자살’ 금지가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이 정비되는 1년 후부터는 불치병으로 고통속에서 장기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원할 경우 의사의 도움을 받아 합법적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안락사의 문제는 1993년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을 앓고 있던 퀘벡의 수 로드리게즈재판에서 대법원이 5대4로 안락사를 불허하는 판결을 내린 이후 수시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논쟁이 있어 오다가 지난 2월 6일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그 입장을 바꿈으로써, 의사도움에 의한 안락사의 합법화시대를 열었다. 


 사회가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각종 난치병으로 고통 속에서 장기적인 치료를 받는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 이 안락사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문제이다. 안락사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경우는 주로 완치의 가망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기적인 치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 생을 마감하기를 원하는 환자의 사연이 알려질 때이다. 이들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결정할 권리’를 국가에 애원하다가 법적인 장애에 막혀 안타까워하거나 결국 막대한 비용과 불편을 감수하고 스위스 등 안락사가 허용되는 국가로 가서 자기 뜻을 이루는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이 문제가 이슈가 되다 보니 대부분 뭔가 현행법이 잘 못 되었다고 느끼게 되기 쉽다. 


 사실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과 관련된 ‘의료결정권’이 보장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의 앵거스 리드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인의 80%가 안락사허용을 찬성했다고 한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국가가 어떤 법을 제정할 때는 일반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 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꼼꼼히 따져서 그 법으로 인해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뜻밖의 부작용이 일어날 소지가 없는지를 철저히 따져 보아야 한다. 특히 사람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안락사문제나 사형제도에 관한 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때로는 법률에 정해진 내용이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불합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이 검거되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형제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장기복역중인 사형수의 불쌍한 어린시절 이야기와 그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질 때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된다. 세상만사는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영 개운치가 않다. 우선 이 번 결정이 한 명의 반대의견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는 점이 아주 꺼림칙하다. 안락사 문제는 너무나 다양한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라 세계 각국에서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이미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는 나라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도난마식으로 한 명의 반대의견도 없이 이런 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캐나다대법원의 균형감각과 고민의 깊이를 의심케 한다.


 현재 안락사가 허용되어 있는 몇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문제의 복잡성과 심각성을 금방 알 수 있다. 벨기에의 경우 이 법이 시행된 후 실시한 한 조사에 의하면, 프랑드르지역에서 실시된 안락사의 32%가 환자의 명백한 요구가 없이 이뤄졌으며, 2010년에 발표된 조사에 의하면 간호사들이 관여한 안락사의 45%가 환자의 명백한 요구없이 시행되었다. 전체적으로 1/4이상의 안락사가 환자의 동의없이 시행되었다. 네덜란드의 경우 형법상 안락사나 조력자살은 현재도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1982년 로테르담법원이 규정한 지침에 부합한 경우 사실상 의사들에 의한 안락사가 용인되고 있다. 그 지침의 내용은 1) 환자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낄 것, 2) 환자가 의식이 있을 것, 3) 환자의 요구가 자발적일 것, 4)환자에게 다른 대안을 알려주고 생각할 시간을 줄 것… 등으로 일견 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잘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1990년 실시한 정부 공식 보고서 (Remmelink Report)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면, 1,040명의 환자가 자신의 동의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사들에 의해서 안락사를 당했고, 8,100명이 의사들의 진통제 과다투여(통증해소가 주목적이 아니라 사망촉진을 위한 목적으로)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그 중 61%는 환자의 동의없이 이뤄졌다.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안락사가 비자발적으로 행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회복될 가망성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는 환자들을 보면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을 열어 줄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더 살고픈 환자의 경우를 가정해 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환자의 경우 법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들이 힘들어 하는 게 눈치 보여서,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느껴서 자신의 진정한 속마음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을 악용하여 합법을 가장한 사실상의 살인이 저질러질 가능성도 크다. 정부차원에서도 국가적으로 의료부담을 줄이기 위해 알게 모르게 위의 네덜란드 사례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순수하고 좋은 취지로 정부가 보장한 ‘죽을 권리’가 자칫 ‘죽일 권리’로 변해 버리지 않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철저하게 고민해서 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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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안득깁니더!

 

안득깁니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소통’이란 말이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아예 시대적 화두가 된 듯하다. 소통이란 “서로간에 의견 따위가 잘 이해되어 흐리터분한 점이나 오해가 없이 잘 통함” 또는 “막힘이 없이 서로 통함”을 말한다. 그런데, 각종 언론매체가 범람하고, 개인통신기기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다양한 소셜미디어와 같은 소통수단이 현란하게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왜 소통이 안 된다고 아우성들일까? 직장인들의 80%가 대인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이직 사원의 65%가 소통이 안 되는 분위기를 이직 사유로 꼽는다는 통계도 있다. 국가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제일 큰 불만이 소통부재이다. 국민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말이 안통하네뜨’라는 별명까지 등장했겠는가? 


 소통이 안 되는 사회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사회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제일 답답한 것은 뮈니뭐니 해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식간 또는 고부간 갈등은 거의 대부분 말이 통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관계는 금이 가고 만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되어 결국은 서로 싸우고, 이혼을 하고, 가출을 하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이나 살인까지도 하게 된다.
 소통얘기를 하다 보니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고 한바탕 웃었던 유머가 떠오른다.


 
 <갱상도 어느 학교 수업시간>


[안득기라는 학생이 수업시간에 졸다가 선생님께 들켜서 불려나갔다]
선생:니 이름이 뭐꼬?
학생:안득깁니더.
선생:안 듣기? 니 이름이머냐꼬? 듣기제?
학생:예!
선생:이짜슥바라! 내...니 이름이 머냐꼬 안 물어밨나?
학생:안득깁니더.
선생:안드끼?
학생:예!
선생:그라모. 니 성말고, 이름만 말해 보그라.
학생:득깁니더.
선생:그래! 드끼제? 그라모 인자 성하고 이름하고 다 대 보그라.
학생:안득깁니더.
선생:이 자슥바라. 드낀다 캤다, 안 드낀다 캤다. 니 지금 내한테 장난치나?
학생:샘요, 그기 아인데예!
선생:아이기는 머가 아이라? 반장아, 니 퍼떡 몽디 가온나!
(껌을 몰래 씹고 있던 반장은 안 씹은 척 입을 다물고 나간다)
반장:샘예. 몽디 갖고 왔는데예 ~~~
선생:이 기 머꼬? 몽디 가오라카이 쇠파이프를 가왔나?
햐~요자슥바라, 반장이라는 놈이 칭구를 직일라꼬 작정 했꾸마...
야~^^ 니 이반에 머꼬?
반장:예~~?? 입안에...껌인데예~~
선생:머라꼬? 니가 이반에 껌이라꼬? 날씨도 더버서 미치겠는데, 뭐~이런 놈들이 다 있노? 지금 느그 둘이서 낼로 가꼬노나?...
그날~ 반장과 득기는 뒈지게 맞았다. 


 
얘기를 듣고 낄낄거리며 웃다가 문득 요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하여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저 학생이 “안득깁니더.” 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와? 귀가 안 좋나?”라고 한 마디만 했어도, 또, “샘예, 그기 아인데예” 할 때, “그 기 아이면 뭐꼬?”하고 물어만 봤어도 두 학생은 ‘뒈지게’ 맞지 않았어도 됐을 테고, 선생님도 더운 날씨에 그토록 열을 받지 않았을 텐데, 상대방의 말은 건성으로 듣고 서로 자기 말만 계속 내뱉고 있는 모습이 꼭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세월호사고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박대통령의 지지율이 급기야 2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통의 부재를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통령의 집무스타일을 보면 “퇴근 후에도 보고서들을 읽고 나랏일을 걱정할 만큼 열심히 일하느라” 소통할 겨를이 없는 듯하다.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대통령의 모습이 짜증스럽도록 답답하고 싫다. 제발 좀 게을러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두꺼운 보고서는 비서관들에게 던져 버리고, 저녁시간에는 장관들과 주요 정치인들을 한 사람씩 불러 느긋하게 한담이나 하면서 저녁을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후에는 요즘 새로 나온 신간들을 좀 읽다가 잠자리에 들었으면 좋겠다. 두툼한 보고서를 직접 꼼꼼히 검토하는 ‘부지런한 대통령’이 아니라, 보고서의 핵심만 비서관으로부터 받아서 그걸 여야 정당과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소통하는데 힘쓰는 ‘게으른 소통령(疏通領)’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이 안 통하는데 누가 지지를 하고 따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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