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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시와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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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시와 오솔길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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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온기가 있는 저녁

 
온기가 있는  저녁 
 

 

 

노천 난롯가에 불을 지핀다
여름내 바람을 안고 흩어지던 마른 잎에     
성냥을 그어대니 주위가 환하다
세일기간을 넘긴 빛바랜 전단뭉치를 
날름거리는 불속에 집어 넣는다
성냥을 든 손이 어둠을 지피는 동안  
소멸의  검은 재가 아궁이에 쌓인다 


 
내 몸을  잠시 지나갔던 온기들 모아
안과 밖을 넘나들며 관계의 원근법으로  한때 뜨거웠던  이름들
단순한 마음이 될 때까지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가만 호명해 본다


 
어떤 이파리는 반짝 몸을 뒤틀리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맴돌다 흩어지고  
어느날은 연기처럼  뿌옇고 매케한 이름 부르다 목이 붓기도 하지만
 여름내 떠돌다 성냥 한끝으로 재가 되고
연기로 흩어지는 기억의 한 티끌까지
존재의 온기가  재를  품고 있는 동안 
어느새 밤이 왔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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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물의 탁본

 
물의 탁본  

 

 

 

강을 따라 걷고 있네
발바닥에 김이 날 것 같은 뜨거운 광장을 지나니
몸에서 강물소리가 들리네

 

강은  턱을 괴고 앉았네
신중한 자세로 물속에 박힌 돌멩이와 눈이 마주쳤고 
그 위에 돌을 던지니 물의 탁본이 일렁이기 시작하더군 
가장 뜨겁고 마른 시간의 인기척을 모래 속으로 밀어 넣고서
이건 심장의 일 
강물은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했었지

 

강이 입술을 열고
물속보다 깊숙한 데서 말을 하려 하네 
그곳은 깊고 푸른 광장이었네 

 

놀랍게도 짤막한 귀결을 얻어 돌아가는 비옥한 산책자
정말 온전히 깊어지려면 
적막한 물소리를 들어야 한다기에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네
물소리와 함께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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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저녁의 모서리

 
저녁의 모서리     
 

 

 

만월이 UPS로 배송되어 왔다
발신지가 없는 포장박스를 풀자 
에어캡을 뒤집어쓴  얼굴이 함박 웃는다

 

너는 노랗게 웃는구나 
어젯밤 꿈에 본 해바라기처럼
맑으나 흐린 구름 밖에서
맨발로 뛰어내린 발목 없는 신발을 신고  
달빛에 가려 보이지 않은 노란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흥건히 베개가 젖었다

 

어떤 저녁은 휘영청 사방이 빛났고
어떤 날은 저녁의 모서리를 맴돌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무성한 별들의 눈썹이 아주 단순한 마음이 될 때까지
달은 예의 편백나무 어스름에 파묻힌다

 

세상 한날의  소음을 안고 
고요히 잠든 마을을 내려다 보며
바람소리와 풀벌레 뒤척이는 소리를 잠재우며    
휘영청 
너는 아직도 노랗게 웃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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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세월

 
세월
 

 

 

기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도둑 
눈앞에 두고도 붙잡을 수 없다 
옷자락 잡아 당겨 감춘다 한들
얼마 후 그만 잡히고 말것을
큰 가방 속에 숨을 걸 그랬나
허둥지둥 하는 사이 손톱은 자라나고
쫓기는 신발은 헐렁하다

 

요즘 같은 세상 
전화나 이메일  카톡방에라도 한마디 남기면 
헝클어진 머리 빗질이라도 할텐데   
사전통보 없이 찾아오는 건 무례한 처사 아닌가

 

반갑지 않은 도둑이 온다면
잠 들은 척 해야지
잠든 척 하는 나를 깨우지는 못할 테니

 

머지않아 지붕이 얼고
흐르던 구름도 멈추는 날
큰길로 들어오는 밤 손님에게
눈가 주름도 귀밑 흰머리도
저항없이 다 내어 주어야 한다

 

그를 막을 자 누구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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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희망사항 목록

 
희망사항 목록 
 

 

 

 

목이 시려 추울 때는    
손수건 하나만 둘러도 온기가  전해온다

 

이 손수건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친밀에 대해 
잠깐 뒷모습을 놓쳤다가도 
처음부터 있었다고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라

 

딱딱한 직립의 시간을 뒤척이는 동안
헐렁해진 목덜미가 어둠 속에서 
녹슨 못처럼 바람을 맞고 서 있을때

 

 "추워 보여" 그런  말은 누구든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은 얼마나 추운 목을 염려하는지 
살다보면 열 마디 말보다 한 장 손수건에 감동할 때가 있다

 

그런 체온 곁에 한 둘만 있어도  
혼자서도 빵 반죽처럼  곧잘 부풀어 오르고
어느 순간 날아오르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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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매미, 울음 유감

 
매미, 울음 유감

 

 

 

폭염 속 
당차고 처연한 저 곡비의 울음
여름이 지나가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나른한 오후
논스톱으로 울어대는  녀석들 때문에   
누군가는 달콤한 낮잠을 설쳤다고 짜증을 내고 
지독한 편두통을 앓고 있는 사내는 반사적으로 돌아앉아 턱을 괴고
우울한 백수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상욕을 해대는 
이건 순전히 여름날의  민폐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뜨거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어둠의 기억을 털어내려는 안쓰러움은 알겠으나      
절망의 검은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은 
대낮 눈치없이 울어대는 
맴, 맴, 맴 
소리에 더이상 마음을 열지 않는다 

 

매미가 사람을 배려해야 할 차례  
상식이 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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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비의 온도

 

비의  온도 
 

 

 

 

여름꽃 지는 8월
그대 무슨 연유로 비를 끌고 와서
천개의 물방울로 붉은 립스틱을  적시는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유리상자 속으로 밀어넣은  물무늬가 
후두둑, 우산 속으로 뛰어들 때 
말간 물길이 둑방을 넘어 
마주 선 나무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서로 떨어져서 걸었지만 
갈 곳 없는 물방울들이 금세 모이는 유리병 안
둥글게 부풀린 입을 대고 물무늬를 불어보았다
병 속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고
비 때문에 우산이 접혀졌다
댓살을 부러뜨린 자의  등이 보일 때
젖은 당신의 온도는 여전히 축축했다

 

오늘은 종일 비
주머니 속,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만지작거리며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려 보기도 하지만
괜히 울컥하고 멋쩍어
비에게 들켜버린 헐렁한 안쪽 
이런 날 젖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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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어스름의 권위


 
어스름의 권위
 

 

 

 

소낙비 다녀간 후 
밀물처럼 파고드는 8월 아홉시  
밀물과 썰물 틈새에서 열리고 닫히는 
저리 오래 머물다 가는 이 시간대에 대해   
한번은 물어봐야겠다 
놀랍고 모호한 질문이다

 

먼저 도착한 어둠이  깻잎밭에 가부좌를 틀면
나는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낮은 자세로 그 앞에 허리를 굽히며
홀로 설 수밖에 없다

 

곧 다가올  캄캄한 몸에 대해 
찬공기의 순환을 돌아나온  어둠의 권위는
적요함으로 치자면 이 시간대에 비교할만한 것이 없고
온몸으로 저물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늘 허기졌던 저녁이 많았으니  

 

그 앞에 할 말을 다하고 
타박, 둥근 어둠을 걸어 나오는데   
아주 슬픈 문장 하나
슬쩍 내 안으로 밀어 넣은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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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보랏빛에 눕다

 
보랏빛에 눕다 
 

 

 

 

지친 립스틱은 쉬어가고
축 늘어진 가방은 몸을 풀어도 좋겠다

 

정수리에 박히는 햇살을 구름모자로 덮으며 
여자가 뒤꿈치를 들고
보랏빛 행렬 속에 뛰어들 자세로 
바람의 행방을 살피는 동안 
온몸에 푸른 멍자국이 먼저 들었다 

 

연인들은  포즈를 취하다
황홀한 나비처럼 날고
벤치에 걸터앉은 여자는 뒷등을 보이며
목을 젖히고 맑은 콧날을 세운다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내쪽을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는데


  
라벤더 친밀에 대해  꿈꾸는 동안 
어린 꽃 하나 겨우 향기를 놓아준다 
일어서는 향기들
어스름처럼 고요히 번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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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오수, 뒷담화

 
오수, 뒷담화
 

 

 

 

여자가 졸고 있다
뻗어가는 담장의  호박꽃을 바라보다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

 

깊고 캄캄한 잠 속에서
한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달겨든다
악몽, 그 뜻은 알겠는데 

 

시끌벅적 떠들 나이가 한참 넘었는데도
아이들 무릎에 앉혀 절하게  하고
옆과 뒤를 통째로 살펴가며, 냠냠 

 

고독한 붉은 벼슬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억울한 소망이 있다한들, 어쩌겠나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가는 아이들
이맘쯤 무릎 풀어   
담장 넘는 호박줄기 바라보는 일도 괜찮겠다

 

배게 밑에 둔 몸속의 기억들
목소리는 들리지만 얼굴은 없다  
잠시 졸았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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