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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다삶과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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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카나다에 유학와 귀와 입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버타 주립 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 학사를 마치고 워터루 공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토론토 인근 원자력 발전소 연방정부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그의 신조를 바탕으로 이룩해 놓은 그의 발자취를 실어본다. 현재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에드몬톤->워터루->미시사가->대전->밴쿠버->오타와->리치몬드 힐이다. 현재 그는 다음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람쥐 체바퀴처럼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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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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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3
은퇴후 5년 산 나이아가라 집

2017년 부터 은퇴인들이 원하는 나이아가라에서의 은퇴 생활을 하기 위해 우연히 찾은 디자이너 집으로 인도 여의사가 운치있게 설계한 집으로 그지역 잡지에 소개된 집이다. Loft Bangalow지만, 2층에도 방이 3개 있고, 1층엔 마스터 베드룸과 서재가 있으며, walkout 지하는 또 방이 2개가 더 있었다. 1,2층이 5500 sq ft이고 지하는 또 2500 sq ft가 되니  총 8000 sq ft가 되는 집이다. Fonthill동네에서 제일 크고, 주민들이 부러워했던 집이었고, 여행객들도 우리집 화단에서 사진을 찍고 했던 집이었다. 우린 또 하나의 행운을 얻어 두배로 팔고, 둘째 딸이 있는 토론토에 가볍게 입성할 수 있었다. 토론토에 multi-offer가 기승을 부리던 때, 떠났다가 돈을 만들고, 외곽으로 빠지면 토론토에 다시 발붙일수 없다는 원리를 깨고, 쉽게 들어온 셈이었다. 탱큐, My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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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3
나의 50대가 산 리치몬드힐 집

중국인들이 노리는 리치몬드힐 Bayview & 16th Ave 던칸길에 3car 가라지가 있고 이태리 빌더가 지은 견실한 집이었다. 직장, 월급이 든든해 은행서 많은 돈을 빌려주어 샀고, 은퇴할 시점 값이 2배로 오른걸 알고 팔았다. 지하실은 안되어 있는 걸 2년에 걸쳐 퇴근후 일하며 내가 직접 꾸며 팔았다. 젊은 5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의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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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와싱톤 디씨에서

큰딸 아이가 다리가 다쳐 기브스하고 있다해 놀라 운전해 달려오니, 시간만 지나면 완쾌돤다하여 다행이다. 내가 사는 오로라지역은 이번주 내내 영도지만 여긴 20도를 넘도는 기분좋은 날씨이다.

 

-계속-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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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0
둘째딸과의 여행
나는 해외 여행은 시차적응어려움이 있어 피해왔는 데, 최근 아내의 요청으로 2주이상 집을 떠나 스페인, 포르투칼을 둘째딸과 같이 다녀와야 했다. 둘째딸을 보호하고, escort하는 차원에서 간 것이기에 여행 목적지나 스케쥴은 딸이 정했고 묵는 호텔도 딸에게 위임했다. 사실 아내를 남기고 간 다는 것이 뭔가 잘못을 하는 것 같았고, 같이 살 날이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돈을 들여 혼자 떠난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떠나는 날까지 나는 가고 싶지않았으나, 아내는 딸이 결혼하기전 아버지로서 같이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는 마지막기회가 될지모르니 딴 생각말고 다녀오라고 등을 밀었다. 사실 이젠 다커서 각자 돈 벌어 따로 나가 혼자 살고있는 처녀들이라, 같이 호텔 한방에서 잘것도 이상했거니와 별다른 할 말이 있을가 싶었다. 아빠가 자주 미적미적하는 것 같으니까, 딸은 :아빠, 진짜 나와 같이 가고 싶은거야, 아니면 싫은 거야?" 하고 묻길래 마음속에 있는 심정을 솔직히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아내에게 등이 밀려 떠난 15일간의 여행은 끝이 나고 나는 아직 시차가 바뀌지않은 멍한 상태에서 이글을 쓴다. 객지에서 사고 먹고 돌아다니면서 확실하게 느낀것은 지금 내가 사는 카나다 토론토에서의 삶이 나에겐 축복받은 삶이라는 것이라, 고개를 구부려 순간순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야 할 처지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칼 두나라에서 나는 길거리나 지하철 관광지에서 동양인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많은 일본인 관광객도 보기가 힘들었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보이는 사람들이 중국인들인데, 여기서는 보이지를 않았다. 북미 도시에서는 차이나 타운이 있는 데 여기서는 중국음식점도 발 보이지를 않았다. 단지 우연히 들어간 가게가 중국인이 운영하는 달라 스토어가 고작이었다. 이들은 관광지에 BAZAR STORE라고 간판을 붙이고 마치 만물상을 방불케라는 각종 달라 아이템을 중국에서 들여와 식구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면 그 사람들이 동물원 원숭이처럼 처다보고, 관광지를 가면 영어 못하는 아시아인으로 대접하려고 했다. 이점에서는 불편한점이 많았다. 여기 토론토에서는 중국인이 쌓여있어 서로들 신경을 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나는 우선 토론토가 천국임에 틀림없다. 시장 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들이 우리 추석잔치에 와서 인사하지 않는가. 또하나는 길거리나 공공건물에 대중 화장실이 적어, 우리딸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설사 찾아내도 가보면 휴지가 없어 휴지를 가지러 다시와야 했다. 변기 커버가 없는 것은 흔하고 동전을 넣어야 들어갈수있지 않나, 맥도날드 햄버거 변소는 항상 줄을 사고 있었으니, 나도 급한 경우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계속-------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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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6
구사일생-선량한 카나디언들
어제 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계기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카나다인들중에는 정말 흰눈처럼 마음이 께끗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기치는 한국 교민들도 주위에 있지만 이런 사람들도 주위에 동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삶의 기쁨을 잠시나마 누릴 수 있었다. 딸들이 성당해 우리곁은 떠난 지금, 주말이면 아내와 둘이 엤날 연애 시절로 돌아가 주말이면 동네를 같이 뛰고, 아침일찍 남쪽나라로 가지못하고 남아있는 청둥오리들에게 먹이를 주기도 한다. 얼음이 얼어 굶어 죽을것같아, 우린 자식대신 사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주말은 스토빌(Stouffville)에 짓는 콘도 모델을 보러 간 후, 내친 김에 피커링,에이젝스 지역 북쪽에서 길을 잃어 Bloomington Rd 에서 U-turn을 하다가 갓길에 눈이 쌓여 차가 갓길 아래로 미끌어진 것이다. 차가 약 30도이상 눈 속에서 기울어져 버렸으니, 아내는 문을 열지도 목하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꼼짝없이 차 안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피커링 북쪽이라 국도이어서 차가 많지도 않은 길이었다. 차는 렉서스 승용차니 전륜구동이라 바퀴만 헛돌고, 눈속을 빠져나올수없었다. 집 차고엔 전륜구동 4x4 가 있는 데 왜 하필 이 차를 타고 나왔을 까? 해결 방안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1분 정도 앉아 있는 데, 지나가던 차가 우리 차가 빠진 것을 보았는 지, 시키지도 않았는 데, 차가 서고, 남자 두명이 내려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버지와 아들관계로 보인 이 지역 사는 시골 사람처럼 보였다. 이 남자는 CAA 멤버이면 토잉 차를 공짜로 부를수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멤버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이 근처 garage에 연락해 토잉 차를 부를 수 있는 데, 경찰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성가시다고 했다. 아마 2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하지않을 까 했다. 여기저기 전화해야 하고... 그 사람은 이 비역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철에 갓길 운전이 위험하고, 유턴은 돌아가더라도 교차로에서 하지 길 가다 중앙에서 하지않는 다고 했다. 갓길 면적이 충분하지 않을 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 주민이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두사람은 자기들이 앞에서 밀어볼테니 한번 시도해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도참가해 남자 셋이서 앞에서 밀고 아내가 운전해보아도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워낙 눈이 많으니... 다시 2-3분 후, 승용차를 탄 노인이 서더니, 미는 데 합세하였다. 남자 넷이 밀고 이 노인이 미는 방법을 알려줘 10cm정도 움직일 수 있었으나, 잠시후 포기하고 떠났다. 다시 1-2분 후, 낡은 트럭이 하나 서더니, 진짜 하얀 수염만 노인 부부가 차를 세우고, 다가와, 나보고 이 지역 사느냐고 물었다. 초라한 트레이닝 복을 입은 할아버지는 자기 차로 가더니 체인을 들고와 내 차 밑 눈으로 엎드려 들어가더니, 바퀴쪽에 묶고, 한 쪽은 Ford Explorer 뒤에 묶었다. 두 남자는 서로 상의 하더니, 나보고 차안에서 neutral로 놓고 핸들만 틀으라고 했다. 그 차가 끌기 시작하더니 금새 내차가 눈에서 기적처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내 아내는 너무 고마워 전화 번호와 주솔르 달라고 했더니 그 할아버지는 밀톤에 사는 트럭 운전사라고 했고, 주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좋은 일 하는 더라면서.. 아들과 같이 온 아저씨는 아들이 토론토대 졸업해 OPG에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고, 전화 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아들이 직장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시골에 사는 그 남자는 내 아내의 헤어 스타일이 신기한 지, beauty shop에서 일하냐고 물었다. 사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머리에 신경 쓸리 만무하다. 요즘 아내가 사용하는 댕기 머리 샴푸가 작용 하나보다. 자, 여기서 내가 느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토박이 카나디언들은 이민자들보다 몸에 밴 자동차관련 지식이 많다 (나는 기계공학 전공자이지만 이들은 눈에서 바퀴가 빠져나올려면, DSC 스위치를 turn-off 하라고 했다. 빠려나올려는 데 자꾸 브레이크가 걸린다고 한다) - 1분간마다 지나가는 차량이 도와주려 서는 걸 보면 서로 동반자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빠진 차, 고장난 차, 사고난 차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이런 일에 간과했던가. 사고난 차량, 눈에 빠진 차량들을 담넘어 불 보듯 했으니. - 남을 도와 주기위해서라도 혹은 내가 도움받기 위해서 간단한 체인은 차 트렁크에 넣고 다녀야 했다. 지나가는 4x4 차량은 내 차를 끌수있고 내 4x4도 다른 승용차를 끌수 있으니까.. 나라면 그 광경을 목격하고 그녕 지나쳤을 것이다. 곧 경찰이 오겠지 하고 말이다. 이 시골사람들은 경찰을 불러도 꼼짝하지 않고 차안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CAA 멤버가 아니면 토잉값을 엄청나게 청구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다시말해 자기집 식구가 곤경에 처한 것처럼 그 입장에서 이야기 해 주었다. 이들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시간이 금인 세상에 노임도 비싼 세상에 차밑에 기어 들어가 몸에 흙 묻히고, 눈에 발이 적도록 밀다가 차가 나오니 기쁜 마음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부턴, 나도 내 주위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아야 겠다. 특히, 카나다에서 도로변에서 고장나거나 사고난 차량이 있다면 말이다. 물론 카나다 말고 미국이면 조금 조심해야 겠지만 말이다. 나쁜 사기꾼도 주변에 있지만 좋은 사람들도 내 주변에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젠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 내가 그 아들의 OPG 취직에 도움을 주어야 겠다. 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숨어있다니, 참 기분나는 일이다. 인종, 언어에 관계없이 우리가 눈에서 차를 끌어 내려고 만난 짧은 시간들이 참 귀중할 뿐이다. 또, ㄱ,런 시간을 갖기 위해 준비해 보자.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엔돌핀이 넘치는 순간들을 말이다.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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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캐나다에서도 "깎아 주세요" 가 통하는 가?
나는 요즘 여기가 한국인가, 카나다인가하는 혼동을 겪으며 살아간다. 한국에서는 무조건 물건을 사면 깍아 주세요를 요구하면 대개는 기다렸다는 둣이 가게 주인들이 깍아주는 게 통례인데, 밴쿠버, 에드몬톤, 오타와에서 생활할때는 겪자 못했던 일들을 요즘 나는 겪고 있다. 오늘은 그간 벼르고 별렀던 로저스 케이블+전화+인터넷+한국방송을 모두 취소하고, primus 회사것으로 대체할려고 비교 저사를 해보았더니, 현재 170$내는 걸 한국방송 위성접시+전화+인터넷으로 하려면 110$ 로 가능하고 primus는 한짐에 전화 번호를 여러개 갖을 수있고, 북미 및 외국이 다 로컬 전화가 되는 브로드 밴드 상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확인 작업으로 로저스를 걸어 CEO Ted Rogers 의 죽음도 애도를 표하면서 내 의사를 이야기했다. 사실 몇일전 금요일 저녁 5시 회사 퇴근하면 집에와 이메일을 보내는 데, 너무 느려 매달 170불을 내면서 사용자가 많아 인터넷 속도가 늦어지는 걸 짜증내고 로저스 아니면 못사나하고 홀로 서기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내가 Primus로 옮긴다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담당자가 벌금으로 그간 제공한 15% DC를 오늘시점까지 backpay해야 한다고 했다. 우스운일이나 정상적인 발상이다. 주위에서 로저스의 악담을 많이들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우스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offer를 주었다. 매달 전화 10$, 인터넸 10$, 테이블 10$, 총 30$ DC를 1년간 주겠다고 했다. 아니, 이게 왠 가뭄에 콩나는 일인가. 전화 안했으면 공짜 떡을 못 얻어 먹을 뻔 했다. 모뎀 바꾸고 서비스 맨이 집에 오는 것 기다리는 것등 번거로와 그 오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즘은 한치 앞을 바라볼수없는 상황이니, 1년이면 또 강산도 변하겠지. 그때 또 생각하기로 하고, 받아 들였다. 다시한번 생각해봐도, 불평안했으면 나만 바보가 될뻔 했다. 앞으로 1년간 360$을 전화 한통에 벌었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집이 자기네들 오래 사용한 소비자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연체료 없이 또박 지불한 사람이라는 것을 체크한 후에 오퍼를 준것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련다. 나는 딸들이 사고내 혼다 CRV를 폐기 처분하고, 중고 BMW를 산적이 있다. 만인들이 갖고 싶은 걸 갑자기 갖게되어 첫날 경찰에 걸리는 등 차가 너무 힘이 좋아 속도위반을 할 정도였다. 그간 잘 타고 다니는 데, 서비스 라이트가 켜져 딜러에 가지고가야만 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렌트카도 무료로 해주는 등 왕을 모시는 신하처럼 모든 직원이 잘 해주더니, 서비스 직원이 전화가 와서 O2 센서가 죽어서 바꾸어야 하고 워런티에 커버가 안되니, 세금포함 1000불을 말했다, 나는 딜러가 비싸다는 말은 들었지만 센서 하나 가는 데 이건 너무했다. 그래서 돈이 갑자기 준비가 안되어 안 고치고 그냥 나오면 어떠냐고 검사비로 150불을 내야 한다는 거다. 차는 고쳐지지 않은 상태는 물론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어, 내 차를 판 한인 세일즈 워먼한테 푸념을 늘어놓았다. 카나다에서 20여년 살면서 혼다 , 토요다, GM, FORD차를 문전해보았지만 BMW딜러 수수료는 너무 비싸다는 것을 전했다. 렉서스의 경우는 O2센서도 자기들이 와사 차를 가지고 가서 워런티로 교쳐준 기억도 있었다. 한참후, 그 세일즈 워먼이 내 뜻을 전달했는지 서비스 매니저가 전화와 O2센서는 스파크 플러그같이 소보품이라 워런티에 포함이 안된다고 전화가 와서 그러면 카나디어 ㄴ타이어는 검사비를 나중에 수선비로 전환해주는 데 너희들도 그렇게 하니 물으니 천불정도 수선비라면 그헣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곤 서비스 직원이 다시 전화와 우습게시리 오퍼를 내게 던졌다. 약 500불에 해주겠다고. 아니 처음에 천불하더니 이젠 절반으로 깎였다. 불평 한 사람만 깎아주는 나라인가? 안 하면 돈만 뜾기는 순진한 바보이고.. 딜러가 이러니, 소규모 가라지는 더 할 것이다. 그래도 딜러는 딜러인데 자존심을 지켜야지... 아뭏든 오퍼를 받아도 기분이 나빴다. 이런 식의 상도는 말이다... 오퍼를 뿌리치고 고치지도 않고 그냥나왔다. 그리고 내자신이 직접 BMW 메나닉이 되겠다고 내 자신에게 선언했다. BMW차를 기계적으로 사랑하나, 이를 미끼로 고치는 장사하는 딜러 차고는 더 이상 믿지 않으련다. 그리고, 나는 15000마일을 견디는 synthetic 오일을 사서 직접 오일을 바꾸었고 오일 필터도 독일산 정품을 12$에 주고 샀다. 총 50불미만에 가장좋은 모바일 1 오일로 바꾸었다. 딜러가면 150불이상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일 질(Castrol) 이 떨어진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이다. BMW동호회에서 손재주있는 회원들이 사진까지 찍어 집에서 고치는 법을 게시한다. 그후 나는 정품 Bosch O2 센서가 마이에미에 있는 걸 배달로 집에서 받아 60불 정도를 주었고, 내 차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곤 홍콩에 있는 서비스 라이트 reset tool, oil change interval reset tool이 겸비된 걸 인터넷으로 30불에 사서 배달을 기다리는 중이고, 엔진 스캔을 실시간 하는 tool을 홍콩에서 30불에 사서 역시 배달 중이다. 이걸 갖으면 어디에서 이상이 있는 지, 엔진 상태 체크가 되고 딜러에 가면 검사만 140불내라는 걸 안해도 된다. 좋은 차를 팔아놓고, 엔진 서비스등이 켜져 무슨 큰 고장 났는 지 겁을 집어 먹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딜러 건물 전시장이 번듯하게 차려놓곤 overhead 비용을 customer 에게 청구하는 그런 dealer 는 이젠 갈 필요가 없다. 나는 그래도 기계적인 것을 알기에 그 함정을 회피해 갈 수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냉가슴 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왠만한 수선비는 천불이 넘을 텐데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내가 가진 간단한 장비로 간단 한건 무료로 해주고 싶은마음이다. 동호회라도 만들어서 말이다.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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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9
2008-07-25
아, 찾았다, 새 환자 받는 한인의사!
요즘 토론토, 노스욕, 미시사가 지역에서 새로 이주한 사람을 받는 한인의사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내겐 이런 의사들이 필요없지만, 팔순노인이신 내 어머니 를 근처로 모시다 보니, 본인이 아픈 곳을 직접 한국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인 의사가 필요로 했다. 지난 20년간 캐나다 촌구석에서 사시면서 자신의 아픈곳을 의사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셨을 것이다. 이래서 오늘 나는 아침부터 한국 신문에 나온 20여명의 한인에게 각각 전화 를 해서 새 환자를 받는 지를 물었다. 외국인 receptionist 가 받으면 대부 분 "One Moment Please" 하곤 다른 전화를 받는 바쁜 상황이었다. 한인 여성이 전화를 받으면, 에누리없이 새 환자를 안 받는 다고 했다. 노스욕 지역 의 사중 한 곳은 새환자를 받으나, 온지 5년미만된 환자만 받는다고 했다. 이상스런 사례임에 틀림없다. 이민역사가 긴 다운타운 지역소재 한인의사나 최근도 이민자가 도착하는 노스 욕지역 한인의사들도 이젠 한인 환자가 포화 상태가 서비스가 저하되는 건 사 실이다. 여길 비집고 들어갈 이유가 없는 내자신이 감사하나, 내 어미는 어쩔수 가 없었다. 미시사가는 아직 새 환자를 받는 걸 보니 거긴 포화상태가 아닌것 같다. 20여명을 다 걸어본 후, 한 곳이 어머니를 받겠다고 했다. 위치는 스카보로로 내 치과의사가 있는 곳보다 가깝다. 한인 receptionist가 아니나, 내가 의사의 나이를 대충 물어보니, 30대 인것 같았다. 나는 20년전 토론토에서 한시간 떨어진 워터루에 살면서 우리아이들을 돌봐 준 훼미리 닥터를 잊을수가 없다. 갈때마다, 우선 장난감을 주면서 우리 아이 와 이야기를 나눈다. South Africa에서 온 백인이었으며 우리 부모보다 더 자 상했다. 충분한 시간을 대화한 후에 진찰로 들어가는 그의 여유로움은 환자들 의 아픔을 자동으로 낫게 하는 착각을 주었다. 또한 가끔 찬장안에 promotion으로 들어온 약들을 공짜로 주어 약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히 의사에 대한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내 family doctor는 중국 인 노인이어서 편하나, 너무 기계적으로 환자를 해치운다. 아마 사무실 운영을 위해서는 의료보험에서 주는 정해진 금액을 타야하기에 그리 바빠야 할까? 같은 서비스라도 작은 도시로 들어가면 삶의 질이 훨씬 나아질 것을 알면서도, 필요에 의해서 대도시를 못떠나고 이런 저하된 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에 한심스럽다. 어서 젊은 한인 의사들이 이 리치몬드 힐에도 개업해 우리를 새 환자로 받아 주면 노스욕으로 내려가 포화상태에서 받는 불친절을 받지 않아도 될텐데 말 이다. 다음주에 어머니를 모시고 그 한인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한국어로 하게 된다. 어머니의 기대가 궁금하다.. 나역시 간 김에 괜찮으면 내 의사를 바꿀 예정이다.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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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78
2049
2008-05-14
생애 기쁜 일 하나
오늘 나는 내 삶중 기쁜일 하나를 맞았다. 윈저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가 내 집에 5 시간 고속버스로 타고 오시면 항상 마음속에 안되었던 것이 이젠 해결된 것이다. 그간 2003년에 신청해 놓은 노인아파트가 5년이 되어도 연락이 없고, 매년 기록을 갱신하라는 편지만 오더니, 몇일전에 요크 지역 하우징 당국에 전화해보니 요즘은 7년이 걸린다고 한다. 아니 노인네가 80 세 생일을 맞이하셨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데, 참 답답한 일이다. 개인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않는 이곳 실정에 나도 포기한 체 일반 아파트를 찾는 데도 1베드룸에 거의 1천불이 나갈 것 같다. 노인이 정부에서 받는 돈이 1천불이 안되는 데 방값 제하면 무얼 먹고 사시란 말인가. 그래도 우리가 먹여드리고 일반 아파트를 찾으려해도 리치몬드 힐에 외부 사람들이 많이 정착하는 지 찾기가 힘들다. 5년전 신청해 놓은 노인아파트에 가서 지배인에게 하소연 해 보기도 했으나, 자기네 소관이 아니란다. 노인은 노인대로 이제는 혼자 살기 너무 힘들다 하시고..... 그래 오늘 아침 다시 하우징 당국 담당자에게 전화해 다시 하소연을 했더니 역시 관심이 없다. social housing 담당자들이 본연의 임무를 모르고 남의 일처럼 듣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시중 가격 (market rent) 아파트를 담당하는 분에게 전화해 상황을 이야기하고 시중아파트 가격을 낼테니 빈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여기도 long waiting list가 있단다. 어딜가나 long waiting list가 있다니 참 좋은 제도라도 현실성이 없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다른 담당자를 걸었으나 다들 메세지 기계로 돌아가 메세지를 남기고 운좋게 그 중 한명과 통화할 수있었다. 전에도 통화한적 있는 노인인데 자상히 예기해줘 인상에 남는 분이다. 그래서 최근 어머니의 근황을 얘기하고 혼자사시기 힘들어 아들옆으로 모시고 싶은데 시중가격아파트도 얻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곳이 연방 정부관할이니 전화해 보라했다. 나는 하우징당국 컴퓨터에 우리 어머니 사정을 간단히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신체가 많이 노쇠하셔서그헣다고 하니까, 그분은 그걸 써놓으면 아파트 주인이 휠체어 요건등 골치아프다고 오히려 안 받을 테니 차라리 "physically isolated from the family", "desparate"라고 써넣겠다고 했다. 지나가면서 한말인데, 기꺼이 내편에서 써주셨다. 나는 "God bless you", "You are so Kind" 등 내개 할 수있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곤 이곳저곳 일반아파트10개정도 전화해도 다들 빈곳이 없고 그중 단 한곳에서 1천불짜리가 있다고 해서 오후에 보기로 약속을 했다. 우리도 어머니 생활비를 보조해야 하니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나, 외로우시다는 데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조만간 작은 가게를 운영하자고 했다. 그리곤 한시간후, 모르는 전화 번호가 떴다. 받으니, 아까 얘기한 market rent 일반 아파트 담당자 였다. 그래서 아니, 우린 이미 일반아파트에 대해 얘기 나누지 않았느냐했다. 아마 이 아줌마가 내가 메세지 머신에 남긴 것을 듣고 기계적으로 답변 전화를 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억양이 이태리 인 같은 데 잘 들어보니, 좀 이상했다. 그 분은 나와 나눈 일반아파트 내용을 알고 있었고, 지금 전화건 것은 다른 것 때문이라 했다.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했더니, 네 어머니 아파트가 나왔다고 했다. 아니, 아침에는 1-2년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않은가. 이 노인 여자가 다른 사람한데 걸것을 착각하고 걸은 거라 생각했다. 치매의 일종이랄까... 믿는둥 마는 둥, 어디 아파트이야고 했더니, 내가 원하는 우리 집에서 가깝고 Yonge 선상에 있으면서 한아름 마트와 가까운 노인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1년전 첨가 시킨 것으로 쏜힐지역 아파트에서 포기하고 어쩔 수없이 리치몬드 힐로 철수한 것이다. 꿈 같은 일이었다. 나는 자꾸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내 어머니 것이 맞느냐. 아침에는 1-2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냐. 왜 갑자기 주느냐 하곤 물으면서 내 질문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주는 사람이 주었는 데 다시 가져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 분은 친절히 오늘 오후에 그 아파트 503호 방을 보고 곧바로 자기에게 전화해달라고 했다. 큰 하자가 없는 한 수락을 할 예정이다. 내 몸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노인을 윈저에서 모셔올 수있는 방이 생긴 것이다. 5년동안 얼마나 하우징 당국에 전화 했던가.. 아들이 무능력해 콘도도 사드리지 못하고... 불과 한시간 만에 하우징 당국에서 내린 결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그 내막은 알수 없으나, 참 내가 운이 좋다. 1000불 내고 살 아파트를 300여불에 사실수있으니, 어머니도 용돈 여유 생기시고, 우리도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되었다. 일이 안풀려 어제는 애꿎은 아내, 아이들에게 혼자 와인 두잔 먹고 얼굴 붉히고 화풀이만 했다. 꽤 답답했었다. 어머니와 걷는 데 말수도 적었다. 이젠 그렇지 않다. 머리속에는 윈저에서 이사짐 싣고 렌트 트럭을 몰고 올일만 눈에 선하다. 나의 꿈인 어머니의 23년 윈저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만 남았고 한인 타운이 성장한 대도시 토론토 생활을 만끽하시고 경로 대학도 다니시고, 노인 친구들도 제발 사귀셔서 이젠 외롭다는 말 듣지 말았으면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온다.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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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오리무중한 이태리란 나라
2007년 10월초 나와 아내는 둘째 딸을 영국에 석사 공부하러 데려다 주면서 평소 꿈꾸던 이태리 여행을 아내와 같이 회사휴가를 내고 배낭여행을 하게 되었다. 배낭여행이라함은 바쁘게 짜여진 단체여행이 아니라 등뒤에 간단히 가방만 매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이태리 주요도시인 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를 목표로 호텔은 괁광지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인터넷 세일을 하는 4스타 호텔을 미리 예약해 머물고, 딸이 있는 영국에서 로마까지는 Aitalia 이태리 여행사의 비행기를 이용하고 각 도시로의 이동은 기차 1등석으로 이동함으로서 10여년전 당했던 노상에서의 집시등의 소매치기, 지난해 프랑스에서 겪었던 등뒤 소매치기를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날 로마로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에서 온 노처녀는 로마 시내 테르미역으로가는 기차까지 같이 타고가면서, 우리보다 젊은세대들이 어떻게 삶을 즐기는 지를 약간이나마 알 수있었다. 우리와 일정이 비슷해 나머지도 같이 돌아다니자는 아내의 생각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노처녀를 단지 한국인이라는 것때문에 금시 가까와진것인지, 숙박장소도 다르고, 나도 아내와 둘의 부담없는 배낭여행에 제3자가 끼어 부담이 갈 것같아 조용히 만류하였다. 호텔을 찾아가는 동안 지하철에서 만난 한국인 신혼부부는 신혼 여행중이고, "자전거 나라"라는 단체여행을 하고 있었고 선듯 소개자료를 다 주었다. 느낀 점 하나: 아, 참 이 먼곳에도 여행하는 젊은 한국인들은 참 많구나. 우린 그동안 카나다 촌구석에서 먹고 자식키우기만 하고 살았나.. 택시운전사의 부당 바가지 요금을 10여년전 당한 적이 있어 기차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려고 기차표를 사려니 밤 9시반경인데, 철도청 표 파는 창구는 이미 닫혀있고 사람들이 무인 승차권 티켓을 사느라 줄을 서 있었다. 영어로 읽을 수 있으나, 사고방식이 달라 소프트웨어 안내판도 쉽지가않아 실수를 계속하고 표는 나오지 않아 뒤에 선 양복입은 남자에게 물어 간단히 표를 살 수 있었다. 다행히 뒤에 줄선 이태리 사람들이 나가라고 소리치는 일은 없었다. 아마 관광객 우대 사고 방식에 젖어 살아서 일까? 느낀 점 둘: 영어가 안 통하니, 답답하다. 한국처럼 젊은 아이들만 간단히 의사소통 할 정도일 뿐이다. 미리 tripadvisor 인터넷 여행가이드에서 이미 갔다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부한 후 찾아가는 4스타 호텔을 쉽지가 않았고, 밤 10시반이 되니 지하철과 연결되는 버스 터미날 건물은 번듯한 데, 안내 창구는 이미 닫혔고, 버스들도 뜨엄뜨엄 왔다. 한참후 11시가 되어 원하는 버스가 와서 운전사에게 돈을 내려니 다시 내려서 터미날 건물안에 들어가 버스표를 사오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버스가 출발하면 어쩌나 하고 뛰어가보니 찬구는 이미 닫혔고 무인 승차권 기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서로 헤매다 아내가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버스표 기계를 찾을 수있었다. 그러나 우린 이미 관광 지역을 벗어나 버스표 기계의 모든 용어가 이태리어라 살 수가 없어 젊은 이에게 부탁하니 누추하게 보이는 젊은이는 거스름돈이 없는지 동전이 모자라는지 표를 못사더니만 우린 도와주고는 우리가 1유로를 주니 자기 표를 사고 자기돈 70센트를 미안하다고 하면서 주었다. 허겁지겁 버스로 뛰어와 운전사에게 주니, 어디서 내리는 지를 알수없었다, 그래서 무뚝뚝한 운전사 할아버지를 잡고 내 호텔이름을 보여주었더니 잘 모른다고 중얼거리더니, 한참만에 이태리식 발음으로 우리 호텔이름을 말했다. 올커니 됐구나 하고, 우릴 거기서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가는 데도 아무 소리가 없어 우리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나와서 문옆에 서있으니, 다음에 내리리고 했다. 버스가 선후 내려 어느방향으로 갈까하고 생각한후 조금 걸으니, 버스운전사는 떠나지않고 우릴 지켜보더니, 방향이 틀리다고, 크략션을 크게 눌렀다. 무뚝뚝한 이태리 노인이 참 인정이 있음을 알수 있었다. 시골 읍을 걷는 것처럼 차가 내몸을 스치며 10cm거리를 두고 달리는 인도가 없는 길을 위험을 느끼며 1-2분 걸으니 왠걸 이런곳에 으리한 호텔이 있었나 할 정도로 입구부터 야자수가 늘어선 4스타 호텔이 나오고 우린 이미 예약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카운터의 정장을 한 이태리 소년은 친절하게 우리가 궁금한 것을 알려주었고 우린 다음날 시내 관광지로 나갈 호텔 버스를 예약하였다. 룸도 1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었다고 강조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화장실에 대리석이 깔려있고 비데가 있고 월풀 사우나시설에 응접실이 따로있는 훌륭한 룸이었다. 1층 바에서는 피아노 생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이 호텔 때문에 나는 아내로부터 상당한 점수를 딸 수 있었다. 느낀 점 셋: 이태리 사람들은 한국사람처럼 인정이 있다. 그래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있어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사실 나는 그 이태리 노인 운전사가 크게 자기나라 말로 떠드는 것을 어렴풋히 알아채고 버스표를 터미날 안으로 사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공공시설은 한국처럼 미비하다. 관광지역을 떠나면 이태리어로 쓰여있다. 비싼 호텔은 한국처럼 부르조아들만 위해 화려하게 되어있다. 아침 8시에 예약된 관광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는 데 왠걸... 창밖에는 그야말로 교통 지옥이었다. 왜이리 모페드(작은 오토바이)가 많은지, 남여 할 것없이 정체된 차사이를 모페드가 빠져나가고 있었고,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 갈길을 마치 파리 목숨같이 있었다. 그런데 더 놀랄일은 지나가는 차와 10센티미만의 거리를 두고 달리고있어, 바라보는 나와 내 아내는 부딪힐까바, 소리를 지를 정도로 그들은 곡예를 부리고 차사이를 빠져나갔다. 아, 어느 새 이곳은 언제부터 모페드가 폭발적인지, 가만히 보니, 로마의 교통지옥에서 출퇴근을 하려면 모페드가 해결책임을 금시알 수있었다. 그러나, 교통담당 정부기관은 모페드에 대한 안전 사항을 강화하지 않은 둣했다. 파리목숨처럼 길거리에서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게시판 사진 참조). 로마 한복판 관광장소에서 아리따운 젊은 여자가 헬맷을 쓰고 달리는 모습은 참 젊음이 넘치고 아릿답고 신기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Hop and off 버스를 타고 하루를 지나니, 콜롯세움등 거의 다 볼수 있었다. 단지, 기대처럼 그렇게 인상이 강하지는 않은 것이 아마 영국 옥스포드 거리,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을 봐서인지, 이태리의 건물은 그들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더우기, 태양이 뜨거워서 우린 하루만에 로마 일정을 마칠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사진 촬영용으로 그예날 무사ㅣ복장에 마차가있어 아내가 무사 들러리뒤에서 사진을 짝으려고 하니, 그 이태리 무사가 한국말로 "도둑" "도둑"을 계속 반복하였다. 아내는 그말을 이해못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더운 날 로마 무사 목장에 모자까지쓴 그들은 5 유로(약 9불) 돈을 받고 사진 들러리를 서는 것이었다. 공짜로 사진을 찍으려하니 우리보고 도둑이라 한것이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와서 그짓을 했길래 이 이태리 사진 들러리가 한국말을 알아 놓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텔버스는 밤 8시경 떠나니, 테르미역 근처에서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배가 고파오니 이태리에서는 피자가 좋다해서, 각종 피자( 해물 피자등)를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피자집에 들어가 서서 먹었는 데, 그 근처에서는 제일 싸고 맛있는 듯했다. 이 파자는 미국, 캐나다에서 먹는 피자와는 달리 빵을 굽는 기술이 놀라와 바삭바삭하고, 위에 얹는 topping도 아슬아슬하게 놓는 데도 맛이 있었다. 불편한 점은 팀호튼 커피가 없고 진한 커피만있어 맥도널드 햄버거가게에 들어가니 아메리칸 커피가 있어 그중 제일 비슷했다. 하나, 유럽 전역으로 가는 기차가 있는 이태리 로마 테르미역 앞에 있기에 화장실은 남녀 각 1개 좌변기만 있어 뒤가 급하더라도 문앞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세계적인 관광지에 화장실을 줄을 서고 들어가거나, 청소하고 지키는 사람이 있어 1 유로를 내고 들어가야 했다. 체르미역앞 노점상에서 산 사과는 한개 2 유로 (약5불)을 주고 사야했다. 관광지에서 과일은 금값이다. 그이후부터는 주민들이사는 주거지역 대형 슈퍼 마켓에서 사과,복숭아, 토마토를 사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덕부에 가방이 무거워지지만 기차, 버스, 호텔등 등 아무곳에서 항시 꺼내 먹을 수 있어 안심할 수가 있었다. 호텔로 와보니 데스크에서 어제 약속했던 대로 더 업그레이드된 방으로 옯겨주고 있고 같은 방에 다시 예약되어 있었다. 약속한 담당 젊은이는 없어 더이상 요구를 안했으나, 한국 사람처럼 입이 앞서고 실천을 안하는 것과 비슷했다. 느낀 점 넷: 로마는 더이상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않았다. 아마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우리에게 큰 감종을 주어서일까. 길가의 모패드에 자기 복숨을 맡긴 이태리인들이 가여웠다. 안전 불감증이었기 때문이다. 입이만저 앞서는 서비스업종 직원들이 한국 고급호텔 직원처럼 데스크앞에서 정중하고 유니폼 벗으면 딴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린 남쪽 해안인 나폴리와 폼페이, 쏘렌토를 다녀오기로 하였다. 아침에 테르미 역으로 다시 나와 말로만 듯던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나폴리', '폼페이','쏘렌토' 지역을 기차로 가기로 했다. 나는 어떻게 가애 하는 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기차나 버스를 타야하기에 우선 나폴리까지는 기차로 가야하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간다는 정보를 수집했다. 약 1시간 반 유로스타 1등석을 타니, 평일인지 1등석에는 양복을 빼입은 멋진 이태리 신사와 정장여성들이 품위있게 앉아있었고 랩탑을 보고 있었다. 한국의 시골같은 풍경을 보여주며 조용히 달리더니 목적인인 나폴리는 도착했는 데 바다가 아직보이지않고, 보수가 안된 아파트들이 보이고 빨래를 차파트 난간에 어지럽게 널로잇는 것이 꼭 빈민촌을 연상했다. 게다가 철도역관장에서 화장실을 가니 입구에 청소겸 관리를 하는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 앉아있었고, 시설이 한국의 시, 읍 철도역 화장실같이 미비했다. 다름 편으로는 한국같아서 푸근한 느낌을 받았다. 로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여행안내소 직원이라도 영어레벨이 떨어지는 지, 아슬아슬하게 대충짐작해 알아낸 것이 소렌토나 롬페이는 전철을 타고 간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요금도 전철값 말 그대로 저렴하였다. 이것을 관광 대절버스로 간다면 한인 여행사의 경우 1인 약 미화 300 불을 요구하는 걸로 알고있다. 그런데 왠걸, 전철이 들어우는 걸 기다리고 전철을 타러 안으로 들어가는 데 갑자기 우리앞에서 싸움이 벌어져 건장한 두 남자가 서로 치고 박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전철안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지켜 보았다. 그러더니 바닥에 지갑이 떨어져 있고 우린 그때서야 소매치기가 출현한 것을 알았다. 소매치기는 전철이 오기전 한 남자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가 그 남자가 전철에 오르자 같이 오르고 전철이 떠나려 할 때 마지막 작업인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절철에서 내리는 것이 시나리오였으나 불행히도 눈치챈 주인이 잡을랴고 서로 주먹다툼을 하다가 나이가 든 멀쩡한 이태리인 소매치기는 싸움에 빌려 터지기만 하고는 전철에서 내려 달아난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그 지갑 주인을 보고 "브라보!" 브라보!" 하고 외쳤다. 내아내는 그제서야 이태리 길거리의 분위기을 인식하고는 ㅇ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가슴에 돈과 여권을 보관한 화대를 두룬 남편의 군사 작전을 비웃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일 때문에 전철안은 한 집안에 들어온 도둑을 쫒은 한 가족같은 분위기가 되어 화기애애했다. 우린 쏘렌토를 가려면 어떻게 하는 지 영어로 불으니, 다행이 의사소통이 되는 젊은 여자가 있어 한번 갈아타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폴리는 낭만적인 도시가 아니라 평민에게는 소매치기가 있는 가난한 도시임을 알수있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는 아빠가 아코디언 악기를 연주하고 어린 자식들이 돈그릇을 들고 동냥하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며 전철안에 동냥가족이 있으니까 다른 동냥가족이 타지않는 것을 보았다. 한국 지하철에서 볼수있는 유사한 장면이었다, 아내는 2 유로 동전을 넣어주었다. 옆에 앉은 젊은 남자가 영어가 안될것같아, 몇일전 전철에서 만난 한인신혼부부가 준 이테리 남부 안내장에 폼페이 산 그림이 있어 보여주었더니, 금새 알고 전철이 지나갈때 가르쳐 주었다. 얼마후 학교가 끝나 전철에 올라온 순진한 중고교 학생들을 보니, 이태리 나름대로 시골 구석에는 순진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부부를 신기한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2시간을 전철을 가니 쏘렌토는 전철 종착역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산등성에 아름다운 집들이 있는 그런 관광지였다. 우린 여기서 5 유로 짜리 시내 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의 한계령이 비교가 안될만큼 낭떠러지 계곡을 아슬아슬하게 운전해 세계 7대 관광지의 하나인 격조높은 휴양지,amalfi, positano 를 갈수있게 되었다. 이태리인들은 한국사람처럼 안전 불감증이 있다. 북미인들처럼 산악 도로에 콘크리트 난간을 만들어 놓지않는다. 하이웨이법에 산간 길은 90도이내로 꺾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없는 지 U자로 꺾던 180도로 꺾던 비탈진 산길을 버스가 다니게 해 놓았다. 아니, 버스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못하고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거기를 젋은 운전사가 햔들을 돌리며 달리는 데 겁많은 집사람의 입에서는 "Oh My God!" 가 연달아 나왔다.2시간을 이렇게 달리니 입에서는 침이 마르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읍에 버스가 양쪽 집사이를 10cm 두고 지나듯 여기도 그랬다. 낭떠러지에 그옛날 어떻게 집질 재룔르 운반해 지었는 지, 각 집으로 가는 샛길이 있는 지 내려다보니 버스가 곧 곤두박질 칠것같아 속으로 아멘하였다. 차안에서는 미국 노 부부 관광객과 이태리 운전사사이에 싱갱이가 벌어지고 영어를 하는 승객들이 노부부편이 되어 운전사에게 불평했으나, 운전사는 시종일관 운전에 집중하며, "I don't speak English!"만 부르 짓었다. 이유인즉, 미국 노부부는 이미 호텔에 예약해 그곳에 내려 달라고 운전사에 요청해 놓았는 데 운전사는 깜박하게 거길 지나쳐 이 노부부는 이 산골길에 호텔을 찾아가기가 막막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종착지에 가서 다시 나오는 것으로 승객들도 합심해서 결정지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그 곳은 산과 바다을 끼고 형성된 마을로 성당이 있고 세계 갑부들이 자기호화요트를 타고 다니는 휴양지였다. 나는 폼페이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이마을에서 알 수있었다. 산등성이에 좋은 집들이 숨어있었고 돈많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예쁘고 아름다운 작은가게들이 흡사 한국의 달동네처럼 형성되어있었다. 그러나 도로는 모두 돌로 깔려있고 가게들은 고급 수공품이 많았고, 저녁이 깔리면 너무도 조용했다. 외부로 나가는 버스는 8시경 끊기게 된다. 우린 다시 2시간 버스를 다고 쏘렌토로 나왔다. 관광안내원에 물으니 이동네 모텔이 최저 120유로 이란다. 선택의 요지가 없으면 부르는 게 값일것같아 불안해서였다. 계속 쏘렌토의 1박: 호텔내에서 골프 파워 카트로 손님운반
n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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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가련한 러시아 여인
요즘은 새집에 채울 가구들을 찾느라 동분 서주하고 있다. 정가를 주고 사고 싶지 않은 우리 부부에겐 두 발로 뛰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가구점의 상술을 알게 된것도 한 가지 다행이라 생각한다. 웨스톤과 하이웨이 7, 키플링과 하이웨이 7 이 만나는 곳에는 가구점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중 우아한 이태리풍의 가구들을 파는 곳이 우리 부부의 눈을 끌었고, 그간 다녀본 가구점들과는 실로 다른 유럽풍의 가구들을 팔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여기서 눈으로 찍어놓은 가구들을 내일 다시와 사기로 친절한 이태리인 매니저와 약속도 하였다. 다음날 막상 살려고 하니 깍아주는 금액의 폭이 너무 적어 마지막 순간에 가격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는 거액을 쓸 손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린 마음이 상해 다시 우리 동네인 리치몬드 힐로 와서 평소 가던 우드바인과 하이웨이 7에 있는 가구점 몰에 다시 갔다. 그런데 그 가구점에서도 똑같은 다이닝 세트를 팔고 있었고 가격이 약 천불정도 적었다. 아니 동일한 제조업체의 동일한 모델이 서로 다른 가구점에서 천불정도 차이를 두고 팔고있는 것이다. 우린 너무도 다행이었다. 만약 그 우아한 가구점에서 분위기에 매혹되 그 즉시 샀다면 우린 이런 것을 알지 못한 채 천불을 더 주고 샀을것이다. 우린 Brick이나 Leon 가구가 가장 저렴한 것으로 알고있어 이곳을 여러번 가서 15개월 할부제도를 이용하려 했다. 거기서 좋은 것을 사고 싶어 가격을 보니 베드룸세트가 만불이 넘는다. 나이트 테이불 1개가 1300불이 되는 LA지역 이태리가구 디자이너가 만든것으로 사자의 발가락이 모든 가구 다리에 장식되어 있다. 하도 비싸 내 직장 행정담당 아주머니와 상의해보니, Direct Buy 멤버쉽 을 가지고 있는 지라 가격을 체크해보더니 자기는 500불에 살수있단다. 절반 가격이다. 일전에 Direct Buy Open House에 게스트로 갔다가 그냥 돌아온적이있는 데 그때 못한게 아쉬었다. 멤버쉽에 일시불로 3천불을 내고 매년 200불 정도의 돈을 내고는 집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매자와 직접거래해 중간 마진을 줄이자는 것이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배달은 안되기어 Direct Buy 지점에 가서 실고와야 한다. 그러나, 많은 가구 및 부엌, 화장실을 개조할 때는 그 멤버쉽 낸돈이 금새 돌아올것 같다. 이 분의 이야기로는 소니 TV도 절반 가격에 샀다고 한다. 우린 이미 Floor Model, cash deal을 통해 저렴하게 샀기에 Direct Buy를 통하기에는 너무 늦은 편이어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베드룸 세트를 찾기 위해 다음날 그 이태리가구점 근처 다른 곳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인도 사람인데 여기에도 눈에 뛰는 것들이 많았다. 집 사람이 전에 온 적이 있기에 금발 여자 세일스 아줌마가 다가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행히 구석진곳에 눈에 띄는 침대 세트가 있어 Floor Model을 사기로 하고 인도 주인과 현금 박치기를 하니 더 깎아 주었다. 그러고 나니, 문닫는 시간이 되어 우린 그 가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세일스 여인이 우리집 동네에 사니 태워주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버스로 이 늦은 시간에도 퇴근해야 했던 모양이다.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린 무척 놀라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4년전 카나다에 먼저온 남편이 초청해 아이 둘과 카나다에 이민오게 되었고, 러시아 연방 국가중하나에 살고 있었고, 그 끔직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을 겪은 45세의 역사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민오자 마자 남편이 자기보다 10년연상의 여자와 한 동네에서 바람나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 남편을 죽도록 원망하지를 않고 체념해 사는 것 같아, 무척 마음이 너그러워보였다. 단지 빈털털이가 되어 아이들과 메이저맥과 베이뷰 교차점에서 오래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1년전 시작한 가구점 세일즈는 시간당 8불 50 센트를 받고 있고 아직 과부 연금은 신청 대기상태라 어떻게 틴에이져 큰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지 궁금했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추, 퇴근을 우리동네에서 버스로 하는 데 편도 1시간 45분이 걸리고 겨울에 좀 춥다고 했다. 내 눈앞에는 매서운 1월의 찬바람과 눈보라가 올 때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버림받은 이 여인을 상상하니, 같은 카나다 땅에사는 사람으로서 미안함이 보통정도가 아니었다. 지금도 큰 집에 채울 가구들을 찾아다니느라 눈이 벌개 다니는 내 모습이 저주받을 것 같았다. 우린 차 안에서 이여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같은 이웃으로서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 불쌍한 여인에게 일을시키고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돈을 줄 일이 없을까 하고 말했다. 참, 내 이웃이 이런 상황에 있는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위만 보고 살아가는 내가 아래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바닥생활은 나도 20여년전 학생시절 해보곤 다 잊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 나도 청소도 해보고 빈병 수집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20연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옛날 고생을 다 까먹고, 배가 불러 내 이웃에도 이런 도와줄 사람들이 깔려있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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