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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사랑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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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0
검찰 '박정희 친일' 출판사 대표 기소
검찰 '박정희 친일' 출판사 대표 기소 "간도특설부대 입대 독립군탄압 사실무근"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0년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신경(新京)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 3년 동안 간도특설부대에 가담해 친일활동을 했다는 논란에 대해 검찰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신경식 부장검사)는 박 전 대통령의 차녀 근영씨가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담은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를 출판한 아이필드 대표 유연식 씨를 고소한 사건에 대해 19일 유씨를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조선족 유연산씨가 쓴 이 책은 박 전 대통령이 1937~40년 일본군 간도특설부대에 입대해서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선 공을 인정 받아 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1940년 3월까지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그해 4월 시험을 보고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37~40년 간도특설부대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근영씨측은 문경소학교 출신들의 확인서,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성적통지표, 39년 박 전 대통령이 학교 가을운동회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실린 동창회지, 40년 3월 교원면직 서류 등을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 관계자는 “필적감정 등 검증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출 서류들이 신빙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소된 유씨는 그러나 “책은 저자가 중국에서 직접 박정희와 특설부대에서 활동했다는 인물의 증언을 녹취해서 작성했다”며 “증언자는 사망했지만 중국에 보관된 조선족 역사자료에도 명확히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현재 명예훼손 혐의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제기된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이 사건도 법정에서 진위여부가 가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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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박정희 대통령의 성품 (퍼온글)
번호: 52630 올린시간: 2004-10-07 09:30:21 조회: 4803 추천: 204 글쓴이: 신은숙(sys6602) 제목: 박정희 대통령의 성품 박정희 대통령의 성품 첫 번째.--- 언젠가 연두순시를 하려고 대통령이 경북도청에 들렸다. 도 지사의 프리핑을 듣고 도청을 떠나려 할때 어떤 사람이 대통령 앞에 불쑥 나타나 --"야!! 오랜만이다." --하고 아는체 했다. 대통령에게 무례한 언사를 쓴 그 사람은 대구사범 동기 동창이었으며 군 교육장이었다. 그 사람은 대통령에게 함부로 불손한 언행을 했다하여 해임되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옛 친구를 만나 반가워서 한 말인데 왜 해임을 했느냐?" 하고 문교장관을 꾸짖으며 옛 친구를 즉시 복직시켰다. 두 번째.--- 대통령은 어느 공식석상에서 한 교육자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육자는 옛 제자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에게 깎듯이 경어를 썼다. 그러자 그 교육자는 민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제자이니까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요." 그러나 대통령은 고개를 흔들며 그 교육자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나의 제자 였던 당신은 지금 나라의 스승이니까요." 세 번째.---- 항간에 대통령은 근엄하고 차가우며 도무지 웃음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라 하는 말이 나돌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웃지 않는 대통령으로 국민에게 인상이 박힌 것은 사진 기자가 너무 근엄한 표정만 찍은 사진을 보도했기 때문이야.." 네 번째.--- 모처럼 맞이하는 휴일 오후에 대통령은 골프장으로 갔다. 그때 심부름하는 소녀의 신발이 낡은 것을 본 대통령은 소녀를 불러 " 새 신발을 사 신어라." 하고 곱게 접은 지폐를 소녀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심부름 하는 하잘것 없는 소녀의 신발 까지도 섬세히 관찰하던 대통령!! 그는 언제나 돈을 귀중히 여겨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며 돈 쓸일이 생겼을때 비서들은 시키지 않고 손수 지갑에서 잔돈까지 꺼내 지불했다. 다섯 번째.---- 어느 날이었다. 대구 시내에 있는 청수장이라는 음식점에 육군소장차림의 박정희 장군이 장교들과 모습을 나타내었다. 자리에 앉은 박정희 장군은 곧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얼마되지 않는 돈을 내 놓았다. "우린 선불로 술을 먹어야 겠읍니다. 사람수에 맞는 술값을 먼저 제하고 남는 액수만큼 안주를 주시오." 박장군의 그와 같은 말을 들은 주인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반 장교들은 외상술을 자시는데...... 현금이 부족하면 달아놓고 드시지요." 그렇다고 좋아할 박정희 장군이 아니었다. "우린 외상술을 먹지 않습니다. 외상을 갚을 돈도 없구요. 그 돈이 술값 제하고 안주 값이 남지 않으면 김치 깍두기라도 주시지요. 이처럼 박정희 대통령은 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펌) ******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 되면 막 가자는것"이냐 하고, 예수 부활을 비교 하며,다시 태여났다 , 연세대에 가서는 출세 했다고 자랑하는 지도자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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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전주 욕쟁이 국밥집 할머니와 박정희대통령
70년대에 욕쟁이 할머니가 박정희 대통령을 욕먹인 재미난 일화가 있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전주에 시찰을 와 그날 밤 거하게 한 잔 하셨다. 다음날 아침 수행원은 박 대통령의 해장을 위해 삼백집에 가서 콩나물국밥을 배달해 달라고 했다. 욕쟁이 할머니 왈,-- “야 이놈들아, 니놈들은 발도 없냐. 와서 처먹든지 말든지 해.” 욕만 잔뜩 먹은 수행원이 박 대통령에게 콩나물국밥이 배달 안된다고 보고를 했다. 털털하기로 유명했던 박 대통령, 껄껄 웃으며 “내가 가지 뭐” 하고 나섰다. 허름한 콩나물 국밥집에 들어선 박 대통령. 그러나 욕쟁이 할머니는 설마 우리 집에 대통령이 오셨을까 싶어 평소대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이놈 봐라. 니놈은 어쩌믄 박정희를 그리도 닮았냐. 누가 보면 영락없이 박정흰 줄 알겄다, 이놈아. 그런 의미에서 이 계란 하나 더 처먹어라.” 전주에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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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6
제목 :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진보누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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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4
盡忠報國 滅私奉公 -- 박정희가 썼다는 혈서의 진실은?
盡忠報國 滅私奉公 -- 박정희가 썼다는 혈서의 진실은? (저 밑에 안도라님이 조갑제가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잇다는 말을 했는데 박정희에 관한 많은 기록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이고 상세한기록은 조갑제의 기록입니다 조갑제가 박정희를 미화했고 영웅화했다고 알고있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조갑제의 기록을 읽어보면 조갑제가 그 많은 분량의 전기를 쓰면서 자기의 감정을 실어서 기록한 부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록의 전부다가 박정희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지요 최근 여러군데에서 논란이 되고있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때 썼다는 혈서의 진위에 관해서도 조갑제의 기록이 가장 맞다고 보여집니다 아래는 그 혈서에 관한 조갑제의 기록입니다) 조갑제 이 연재기사를 쓰는 동안 독자들의 제보와 충고가 하루에도 수십 건 씩 들어오고 있다. 기자는 이 박정희 전기는 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았 던 독자들과 함께 쓰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7일 오전에도 한 독자분이 "박정희 선생과 함께 문경보통학교에서 근무했던 유증선 선생께서 생존해 계신다"고 알려왔다. 서울 강남구에 살고있는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그 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 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초로서 박정희 선 생이 근무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 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쌀 반 가마에 불과한 월급이었다. 생활비 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 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 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 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 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나 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 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있는 것 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 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 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 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 과 어울려 웃고 노래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하였 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기질인데 문 제는 일본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 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 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 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 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 나와 박 선 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 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 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 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 에 있던 학생 시험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 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 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 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주어서 그 혈서건이 신문 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가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 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등 몇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 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 에 없지"라고 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 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 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유호문(66·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 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 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여름에 한 3주간 일본시찰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 구나'하고 생각했다. 5·16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 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 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 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 통령은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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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4
박정희 친일10가지 유포시킨 사기꾼 김삼웅
박정희 친일10가지 유포시킨 사기꾼 김삼웅 퍼온글 먼저 현재 인터넷이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 10가지란 글은 네이버 오픈사전에 등록된 글로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이 글을 유포 시킨 자는 아태재단 기획 실장이며 김대중 정권 시절에 어용 신문 대한매일의 주필로 활동했던 김 삼웅이라는 김대중 광신도가 조작 살포 시킨 글입니다. 이 자는 철저한 김 대중 광신도로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신문을 수구로 몰며 소위 언론 개혁을 부르짖었던 자 이나 김 대중 정권의 부패나 실정에 대해서는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던 김대중을 거의 교주 받들 듯 하는 사이비 언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언론인 또는 교수라는 타이틀로 방송에 나와 국민들을 현혹 시키고 있으니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박 정희 전 대통령을 음해, 중상모락 하며 거짓을 유포하는 자들의 99%가 김대중 광신도들 이거나 노빠들 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교주가 가장 훌륭한 역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고 있으나 여론조사만 해보면 압도적으로 박 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나오기 때문에 거짓을 유포시켜 박 정희 전대통령을 깎아 내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김대업이나 설 훈 사건을 보면 김대중 일당들이 얼마나 흑색 선전과 중상 모략에 능한 자들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광신도 김삼웅이 날조, 유포 시킨 박정희 친일 관련 주장을 조목 조목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 정희 전 대통령 친일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친일파청산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주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통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현재 개정중인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는 친일행적위주로 분류함에 따라 위의 1번항에 해당되며 이 기준은 과거 반민특위에서의 친일파 선정기준과 비슷한 것으로서 보여집니다. 먼저 김대중 광신도 김 삼웅 교수가 날조, 유포시킨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까지라고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등...)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47512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의 기회주의자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해방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 * 박통이 친일파라 주장하시는 분이 위의 글을 올려놓은 네이버 블로그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두번째 단원 앞부분에 있는 글이니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듯...) http://blog.naver.com/cxicxi.do?Redirect=Log&logNo=20004036923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 글은 사실이며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왜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글 역시 ② ③번과 같습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외교석상에 욕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3억달러 받았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독도는 과거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대통령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이 친일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도 친일파입니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http://www.kla815.or.kr/)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http://bluecabin.com.ne.kr/index.html) 내용)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http://www.e-hanil.net/) - 민족문제연구소 : 박통을 친일파로 주장 최근 박통친일행적에 대한 만화를 편찬할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박통의 친일논쟁을 유발 시킨 곳으로 어떤 의미의 친일을 주장하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http://www.banmin.or.kr/)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행각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친일청산법에 의거 친일 행적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니 박통의 친일행적이 있다면 밝히고 묻어둬선 안되며, 허위사실을 조작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라 하기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할 때 친일행적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부했던 과거 반민특위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현재 시점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의문이며, 새로운 사실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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