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랑
토론토 거주 작가

[이시랑] 뿌리의 힘

  개천절에 하늘이 문을 열고 땅을 꾸짖으시며   하늘에서  광화문에 의사(義士) 대표단 백만을 단체로 내려보내셨단다   그러나 땅은 귀를 닫고 세상의 진실의 소리를  듣기를 거절하는 귓병 환자들이 너무 많다   …

[이시랑] 오 초 가을 단상

후두둑 후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무들은큰 양동이 하나씩 들고숲 밖으로 나온다   양동이마다빗물을 받아 지난여름부터 준비한   빛고운 붉은 옷감을필로 들고 나와마지막 행굼을 하고   비 개인 오후바삭 소리 …

[이시랑] 삶을 삶았더니

삶을 삶았더니슬픔의 쎈 뼈가부드럽게 익더라농골농골 산다는 것은 뜨거운 불판 위에 나를 올려놓고온종일 삶는 일이더라 오늘도 나는내 안의 무언가를 삶는다 바글바글 삶아낸질긴 마음 근육질이어금니를 물컹 깨문다 내 안의 비릿한 무언가 날 …

[이시랑] 안개 낀 아침에

나는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안개는 세상의 모서리로부터 나를 숨겨주며  말없이 나를 감싸안는다   천천히 내 이름을 지운다 나의 모든 잘못도 나의 모든 부끄러움도 잠시 지운다   아  이대로    …

[이시랑] 가을 앓이

이유는 없다 조건도 없다     그냥 네 색깔에 젖고 싶다     가을이라서     누가 딱히 그리운 것도 아닌데 온종일 눈물이 난다, 괜히     가을이라서     …

[이시랑] 가을 발소리

초록빛 언어로 소통하던  푸른 여름 숲이  빛바랜 행장을 챙긴다 매미는 악기를 접고 여름날의 뜨거운 열기를  거둬들인다 바람은 서둘러 찾아오는 가을 손을 위해  흩어진 숲의  그림자를 비질하고  잎들은 푸르렀던 젊은 시절을 …

[이시랑] 여름밤 짝퉁 쑈

한 남자가  늦은 여름 저녁 가방을 안고 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그의 가방 안에는 오늘밤 가설 밤무대를  눈부시게 흔들어 놓을  관객들이 들어 있다 음흉한 얼굴 사악한 뱀눈의 웃음 짝퉁 이름 짝퉁 양심 …

[이시랑] 팔월 여름비

팔월 여름비가 방울방울 내려와서 꽃잎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팔월 더위를 씻어 준다 폭염이 타는 태양 아래 작고 하찮은  이름 없는 풀잎의 푸른 이마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원하게 식혀준다 그늘도 없는데 땡볕 아래서 …

[이시랑] 돌아오지 않는 계절

그는 갔다 누구도 배웅하지 않았다   아무도 언제 올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봄 오면 개나리꽃처럼   늘 봄을 이고 와서 이 공원 한 귀퉁이에 그의 계절을 옮겨 심었다 …

[이시랑] 한 톨 별의 먼지

우리는 무덤을 들고 태어난  한 톨 별먼지라 한다   인생은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가는 것이란다   칠량계의  엄청난 숫자의  별먼지의 원소로  뭉쳐진 우리 각각은 작은 우주란다   지구는 오대양 육대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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