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자] 낡은 수첩을 펼치며

12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밤새껏 뒤척이다 아침결에 겨우 눈을 붙였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더듬더듬 수화기를 집어 든 순간 신호가 끊겨 버렸다. 실눈을 뜨고 벽시계를 바라보니 7시35분. 한 시간 남짓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단잠을 놓쳐버린 아쉬움에 계속 눈을 감고 누웠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에 생기가 넘쳤다. “새벽바람이 쌀쌀한 것 같았는데 사랑(그녀의 개)이와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넘게 걸었더니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너무 기분이 좋아. 비싼 몸값을 알아보는지 부러운 시선으로 사랑이를 쳐다보는 사람이 한둘 아니네! 난 지금 커피숍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야. 걷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당신도 누워있지만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무조건 걸어, 그 말 해주려고 전화했어.” 밤샘 끝에 찾아온 보약 같은 아침잠을 깨워놓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허리를 다쳐 보조기에 의존하는 나에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이민 동기생의 걱정 어린 충고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서 시간 가는 것이 아쉬운가 하면,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연히 신경이 쓰이고 부담스러우며 말 속에 저항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편치 않은 인간관계를 안고 살아간다. 지나칠 만큼 계산적이거나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던지는 말 한마디, 선을 넘는 행동 하나에 마음을 다쳐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사람들과 멀리하면 편할 것 같아 거리를 두려하면 오랫동안 함께한 세월이 발목을 잡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려운 숙제와도 같다. 그 관계의 모호함과 복잡성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먼 타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은 혼자 조용히 방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혼자 살 수는 없다.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마주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마음을 건네고 받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생각과 영혼에 공감대가 없으면 인간관계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런 만남은 그저 한 때의 마주침이다. 손때 묻은 그릇처럼 오래 갈수록 편해지는 사이가 되려면 진심으로 상대편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시간도 마음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든든한 연대가 필요하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사이 그것이 참다운 친구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커다란 축복이며 자산이다. 그로 인하여 삶의 빛깔이 달라지고 어려울 때 버팀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해를 보내며, 경황없이 살아온 몇 년 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전화번호 수첩이 너무 낡아서 새로 옮겨 적기 시작하였다.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하나하나 이름을 지우며 그들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며 깊이 마음을 나눴던 친구의 이름을 지울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수첩 대신 가슴 속에 고이 옮겨 적으리라!

전화번호를 정리하듯 나의 인간관계도 새롭게 다듬어 갈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타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내 감정을 너무 많이 소모해 왔다. 그런 나를 남편은 늘 안타까워했었다. 나이 들고 몸이 부실해진 후에 깨달은 것은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삶이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선택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지켜야 할 것들도 많아진 만큼 적절한 무관심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의 소모까지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낡은 수첩에서 얻었다.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나누면서 나 자신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주리라 마음먹는다.

문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