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상] 가장 지혜로운 삶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128)

(지난 호에 이어)

젊었던 시절에는 오늘과 내일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시간은 늘 당연한 것이었고, 아침이 지나면 또 아무 걱정 없이 새로운 하루가 오는 줄만 알았다. 몸은 지치지 않았고 마음은 두려움을 몰랐다. 세상은 넓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끝없이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새 긴 세월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와 보니 이제 우리 세대에게 하루라는 시간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조용히 창문을 열어 햇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밤새 아무 일 없이 숨을 쉬며 잠들었다가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 축복인지를 이제야 알게 된다. 

오늘 아침도 햇볕은 참 화창했고, 창밖의 공기는 섭씨 18도의 상쾌함으로 가득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커튼 사이를 스치며 활짝 핀 라일락의 찐한 향기와 함께 들어오는데, 필자는 문득 또 하루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듯한 마음이 들었다. 젊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감사함이다. 이제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큰 기적이며, 은혜인지를 조금씩 알아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아마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정과 추억, 그리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기억으로 마지막까지 버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은 AI(인공지능)와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쏟아지고 인간의 수명은 앞으로 훨씬 더 길어질 것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보면 모두들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앞으로는 백세를 넘어 백오십 세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오래 사는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며 흥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쎄…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이 정말 그토록 축복이고 행복한 일일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미 지난 70년, 80년을 살아온 우리 세대라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세상이 편리해져도 인간의 삶 자체가 평생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라는 외로움 그리고 매일의 불안과 종점의 허무까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마다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돈 때문에, 어떤 이는 병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자식 때문에, 언제나 혼자인 외로움과 상처 때문에 각자가 평생을 아파하며 살아간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공허와 슬픔까지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필자를 종교적이라 말할지도 모르고, 또 지나치게 비관적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늘 고통 속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며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아마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서로 비교하고, 상처 주고, 미워하고, 때로는 전쟁까지 벌이며 살아간다. 과학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여전히 그대로다. 삶은 점점 더 편리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 지치고 불안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50년, 100년을 더 살아가기를 원할까.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것보다는 더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것이 아무리 힘든 삶이라 해도 본능적으로 생명을 붙잡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삶이라면 그 삶의 길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엊그제만 해도 마치 겨울 같았는데, 어느새 벌써 6월 중순이다. 캐나다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짧은 계절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달만 해도 눈발이 날리던 그 길고 지겨운 겨울이 잠시 숨어버린 듯 요즈음의 세상은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고 있다. 이 짧고 귀한 계절 속에서 지금 우리 한인 동포 여러분들과 친애하는 ‘부동산 캐나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골프를 치고 계실까. 손주들과 캠핑을 떠나셨을까. 아니면 집 뒤뜰에서 가족들과 고기를 굽고 계실까. 

무엇을 하고 계시든, 이 앞으로 두 달 남짓한 귀한 여름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8월 중순만 되어도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고, 그 바람 속에는 어느새 길고 긴 겨울의 소식이 숨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많은 한인 동포들이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젊었을 때 이왕이면 미국으로 갔어야 했는데, 왜 하필 이렇게 추운 캐나다로 왔을까…” 하고 말이다. 오죽 이 나라의 겨울이 길고 외로우면 그런 푸념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캐나다만의 좋은 점도 참 많다. 깨끗한 자연, 비교적 평온한 삶,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치열함 속에서도 조금은 여유를 허락하는 이 나라만의 분위기가 있다.

어디에서 살았든 결국 인생은 다 비슷한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왕 여기까지 살아왔고 한평생을 지나왔다면 이제 와서 지나간 선택을 후회하고 불평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어쩌면 우리 나이에는 그저 하루하루를 새롭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Century 21 New Concept 대표, 부동산캐나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