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lee
경제 및 시사문예 종합지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품격 있는 언론사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79 전체: 652,798 )
유언장을 쓰며- 마음을 비우니 다른 세상이
ywlee





 

 여름 휴가철을 맞아 두 딸이 마련해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가 다시 확산세를 보이고 있고 세계 공항마다 북새통에 항공기 지연.취소 사태가 잇따르고 있어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상태다.

 

 어쨌든 벼르고 벼르던 여행인지라 기대감에 부풀고 있다. 나는 전에 유럽을 다녀왔지만 아내는 처음인지라 더욱 설렌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 우리 부부는 꿈에도 그리던 피렌체에 있을 것이다.)

 

0…그런데 출발을 닷새쯤 앞두고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여행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해놓는 것이 어떻겠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웬 유언장?’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아내가 굳이 설명을 안해도 나는 그 속마음을 금방 이해했다. 한치 앞도 모를 사람 일,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외국여행 길에 뜻밖의 일이라도 당한다면… 가급적 불길한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현실은 현실 아닌가.   

 

 그래서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동의했다. 사실 이 유언장은 내가 환갑을 맞을 때부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보통사람이 백년 이상을 사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이승을 떠난다면 살아생전에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두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겠는가 해서다. 

 

0…우리는 이튿날 곧장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소위 유언장(Will)이라는 것을 작성했다. 그런데 솔직히 기분이 다소 묘해졌다. 유언장(遺言狀). 쉽게 말해 우리 부부가 죽은 후에 처리할 일들을 자식들에게 문서로 일러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득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 같던 죽음이란 단어가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부부 중 내가 먼저 죽든, 그 반대든 남은 두 딸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배분해준다는 내용이 골자인데 마치 죽음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두렵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저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유언장에 서명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말을 안해도 금방 알 수 있는 표정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는 말했다. “별로 남겨줄 것도 없으니 금방 끝났네…”

 

 사실 우리는 딸들에게 유산이라고 남겨줄 것도 별로 없고 간단해서 고민이나 걱정할 것도 없다. 집 한 채에 통장 잔고 몇 푼… 이런 실정이니 여느 재벌가처럼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식들간에 흔히 벌어지는 재산쟁탈 전쟁 같은 염려는 없을 터이다.

 

 어쨌든 오래 전부터 생각해두었던 일을 마치고 나니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0…사람이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이나 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유서(遺書)와 유언이 그것이다. 하지만 한 글자 차이지만 양자는 어감도 그렇고 법적 효력도 다르다. 유서는 대체로 자살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주변인에게 자신의 마지막 심정을 전하는 글이다.

 

 유서는 영어로 Suicide note라고 쓰며, 법적효력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극한에 몰린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쓰는 가장 진솔한 말이 유서일지도 모른다.  

 

 유서에 비해 일정한 형식을 갖춘 유언은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이 아닌 주로 재산상속이 포함된다. 즉, 유서는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담담하게 적는 것이고 유언은 법적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의 유언장을 작성해준 변호사에 따르면 유언은 상속받는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작성할 수도 있고 그중 가장 마지막에 작성한 유언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0…유언장 작성 시기는 언제가 좋을까? 그것은 영육간 건강할 때 하는 것이 좋다. 건강이 나빠지면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정신적으로 미약한 상태에서 올바른 판단이 안 설 경우 자칫 엉뚱한 분란을 초래할 수가 있다.  

 

 한국인은 대체로 사망에 따른 복잡한 문제를 미리 생각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모든 재산이 배우자에게 자동 상속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유언장은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유언장을 미리 준비해 두면 효율적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본인이 원하는 상속자에게 정확하게 재산을 전할 수 있다. 본인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산관리 및 분배를 담당하게 미리 지정해 둘 수도 있다.

 

0…유명인사들의 유언에 관한 에프소드도 많다.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윈스턴 처칠 수상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창조주께서 나를 만나야 하는 시련에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겠지만. ”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언론인으로 '자본론'을 집필한 칼 마르크스. 실질적인 공산주의 창시자인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마지막 말은 살아있을 때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나 하는 것."

 

 아무튼 유언장을 쓰고 나니 웬지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세상사 욕심도 없어지는 것 같다. 어차피 모든 것 뒤에 남겨두고 한줌의 재로 돌아갈 인생인데 욕심을 내 무엇할 것인가.     

 

 딱 한번만 사는 일생(一生). 사람은 가고 유언(遺言)만 남는다.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