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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치우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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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치우며(2)

 

 요즘 봄철을 맞아 집안청소를 하면서 서재의 책장(冊欌)도 정리를 하게 됐다. 이 책장은 결혼 당시 아내가 장만해온 혼수품 중 하나였으니 그럭저럭 30여년을 우리 부부와 함께 지내온 셈이다. 이민 올 때도 컨테이너 짐 속에 고이 모셔 왔으니 자연히 애착이 가는 물건임에 틀림 없다.

 

 

 문제는 그 안의 내용물들인데, 지금 살펴 보니 책의 종류가 꽤 다양한 것이 새삼스럽다. 문학류에서부터 역사, 철학, 사상, 교육,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나와 아내의 젊었던 시절 손때가 묻은 책들이 빼곡히 차 있다. 빛 바랜 사진들이 들어있는 앨범도 10여권이나 꽂혀 있다. 그런데 책 중에는 우리 부부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것들이 많고, 그 후론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들도 많다.

 특히 중국 근대사니, 러시아 혁명사, 제3세계론, 교육철학 같이 주제가 너무 무겁고 거창한 것도 있고, 변증법적 유물론 따위의 머리 아픈 것들도 섞여 있다. 이제 이런 책들은 골치가 아파 더 이상 못 읽을 터인데,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보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과감히 정리를 하기로 했다.

0…사실 요즘 읽는 책은 주로 책상에 쌓아놓고 손에 잡히는대로 읽지, 굳이 책장 안에 넣어두지는 않는다. 책장 안의 책은 대체로 소장(所藏)용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개중엔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두툼한 ‘전주 이씨’ 족보도 눈에 띄어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나의 혈통이 새겨져 있는 이런 자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책을 정리하면서 보니 젊은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중에는 저자가 친필 사인을 해준 것들도 있는데, 우리 부부의 주례를 서주신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님의 <가던 길 멈추어 서서>와 당신의 따님이신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보니 가슴이 찡하다. 이들 부녀(父女) 영문학자는 청년시절 내가 가깝게 지내며 존경했던 분들이다. 비록 이승에 안 계시지만 그분들이 남긴 따스한 문향(文香)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민 후엔 이곳 토론토에서 만난 문인들이 책을 출판하면서 친필사인을 해주신 것들이 꽤 많아졌고, 지금 내 책상 위엔 이런 책이 적잖이 쌓여있다. (그중에도 ‘출판의 달인’ 이동렬 교수님의 수필집은 예닐곱 권이나 된다.)         

0…지방(대전) 출신인 내가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소망 중 하나는 나만의 사색공간인 서재(書齋)와, 책을 넉넉히 꽂을 수 있는 책장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하숙집이나 아르바이트 하는 집에서는 대개 너절한 이불 위에 누워 책을 보니 산만해서 집중이 되질 않았고, 책꽂이도 변변찮아 그냥 책상이나 방바닥에 되는대로 책을 쌓아 놓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선 작으나마 나만의 서재를 갖게 됐으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조용히 앉아 책 볼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점점 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그동안 사두었던 책들은 버리기가 아까워 서너번 이사를 하면서도 죽어라고 싸들고 다녔다. 이민 올 때도 그 무거운 것들을 박스에 채곡채곡 쌓아왔다.     

 그러다 3년 전, 집수리를 하면서 마침 쓰레기 수거 빈(bin)이 왔길래 주섬주섬 헌책들을 모아보니 다섯 박스 정도가 됐다. 그중엔 대학시절 영시선집(anthology)에서부터 ‘창비’(창작과 비평) 전집류, 대하소설, 문학전집 등이 있었다. 또한 ‘운동권 서적’도 꽤 있었는데 이런 책은 평소 손에 잡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나의 청춘시절 숨결이 곱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1차 집수리를 하면서 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 아직도 버려야 할 책들이 많이 나왔다.

 예전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지만 요즘엔 사실 그렇질 못하다. 명색이 언론에 종사한다는 사람이  이처럼 재충전에 소홀한다면 말이 되는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요즘엔 특히 온갖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기에 책장을 넘기며 사색에 잠길 여유를 누리기가 점점 더 어렵게 돼가고 있다. 머리엔 그야말로 잡식(雜識)만 가득한 셈이다.

0…나는 누구의 집을 방문하면 주인장의 서재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다. 서재와 책장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지식수준과 취향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서재와 책장을 일종의 전시용 공간으로 꾸며놓은 사람도 있다. 고급 책장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해도 그것이 정말로 읽힌  것들인지, 아니면 그냥 허세로 그리한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다. 깨끗한 장서류 같은 것은 십중팔구 전시용이기가 쉽다. 

 어쨌든, 커피 한잔을 들며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서재에 앉아 여유롭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일 것이다. 책은 인생에서 삶의 좌표를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치유해준다.

 그러나 책은 이사할 때 가장 큰 두통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버리자니 아깝고 갖고 다니자니 그 무게가 버겁다. 읽지도 않을 책이면서 그냥 버리기는 아깝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이 세상 이치임을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채우려 하지 말기/있는 것 중 덜어내기/다 비운다는 것은 거짓말/애써 덜어내 가벼워지기/쌓을 때마다 무거워지는 높이/높이만큼 쌓이는 고통…/’ (이무원 시인 ‘가벼워지기’)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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