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lee

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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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自我)
yslee

 

 디아스포라(DIASPORA) 유랑하는 영혼의 길은 상실이다. 의욕이 없음은 자학이고 자학은 자기 보존의 눈물이다. 바람결에 불어서 불어서 갔다. 미로의 길을 뒤돌아 보니 티끌 속에서 뒹굴고 있는 나를 보았다.


 꽃이 피는가 했더니 먹구름이 찬서리를 몰고 와 이슬꽃도 응어리지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월에 잠식되어가는 빛깔이 나를 인식코자 발버둥을 치나 시궁창은 언제나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인생살이의 간절한 꿈의 승화는 미세먼지 만도 못한 우주 속의 나임을 알듯 할 때 모든 존재가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실체가 없는 나의 형체, 해가 뜨고 서산을 향하듯 그 가까운 듯 하면서도 먼 듯한 혼자 가는 길. 그 길이 지평선에서 수평선의 끝자락에서 해발 3천 미터 산 정상에서 고함을 쳤다.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고독이 몰고 온 허상이 나를 저울질하며 비웃고 있을 때 내가 가엽고 불쌍해서 울고 또 울어 보았다. 아무도 내 마음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구상의 7억 인구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나의 영혼은 유령이 되어 절규를 한다. 그 절규는 하늘의 끝, 자기 생존의 끝에서
그리움의 끝으로 달려갔다. 


 무의 부표다. 그 무의 부표로 떠도는 것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침묵의 허구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멍청이 임을 인식한 것은 또 나의 삶이 깊이 쌓이고 쌓여 갔음을 알 때에는 이미 석양 마루에 노을이 짙은 뒤였지만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인생을 살고자 함의 본능을 어찌 할거냐.
잃어버린 나날 속에 사랑하고 그리워함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누(淚)가 될까.
눈물로 승화되는 고독의 창은 혼불로 타고 타는 사랑을 그리워한다. 


 존재가치의 희미한 망상은 천길 낭떠러지 골짜기에서 거미 한 마리가 허우적 허우적 기어 오름이다. 목표가 없는 기대 속에 무지의 이상의 형상들, 그 형상에 나타난 터널의 깊이와 길이를 가늠치 못하는 환희, 그 환희는 흙의 진실이다. 흙 속에 세월 속에 나를 묻어 놓고 느껴보는 쾌감, 아아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혼탁한 생존의 깃발이 강 건너에서 반딧불로 반짝인다. 


 그리움의 저 편 용암물로 흘러가는 너를 찾아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위선의 신음, 그 신음소리의 반복은 뭉게구름으로 대지를 덮는다. 삶의 끝자락에서 흙을 찬미하는 자연의 이 법 나는 오늘도 흙을 먹고 흙을 마셨다. 


 생자필멸의 소멸의 섭리를 어이 모르랴. 욕망은 가져도 가져도 더 갖고 싶은 본능이기에 베풂의 정도 좋지만 무소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얻었을 때 느껴보는 기쁨 그 환희의 희열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나련다. (2020년 11월 어느 날에)


*시평: 이 장문의 산문시 한편을 읽으면서 느낌은 종교적 경전을 읽는 마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평하겠습니다. 한국어의 가장 아름답고 현란하고 아름답고 슬픈 어휘들로 채워진 아주 훌륭한 산문시 한편입니다. (송문익: 전 인하대학교 교무처장, 현재 명예교수.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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