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lee

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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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왜 쓰는가
yslee

 

 하늘이 파랗다. 하늬 구름이 나의 심장을 두들긴다. 단풍잎 물이 들더니 한잎 두잎 바람에 떨어져 날린다. 그렇게 세월은 갔고 기러기 떼 울며 날아가고 보우강 강물이 봄맞이 꽃을 피운다. <오 헨리>의 최후의 한잎이 아득히 어디론가 굴러간다. 흙이다. 흙이 눈물로 승화된다. 자작나무 군락에서 연둣빛 새순이 눈물을 흘린다. 어디로 가라는 것이며 어디에서 내가 쉬어야 하나. 모든 것이 그립다.

 

나의 그리움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가는 강물일까. 멈출 곳 모르는 강물인 것 같지만 흐르는 강물도 어딘가에서 멈추리다. 흙의 깊이다. 그 깊고 깊은 흙의 깊이에서 나를 뒤돌아보고 무지갯빛 노을 속에 나 자신을 묻어 버린다.

 

외롭고 슬프다. 허무로다. 빼어날 수 없는 절박한 슬픔과 고독에서 몸부림칠 때 나는 시라는 나의 죽음을 장식할 시를 쓰고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시를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음으로 가는 나의 안식처가 시(詩)이기에 막연히 시를 쓸려고 노력을 한다.

 

때로는 다작(多作)을 하는 시인으로 이름도 나고 은유(隱喩)의 깊이가 없다고 비판도 받고 숱한 저주의 칼날도 무시하면서 컴맹이 컴을 치려고 하니 이마저도 나에게는 너무 힘이 든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나는 사랑의 그리움에서 외로움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독감에서 시라는 것을 써서 나 자신을 포효하지 않고는 하루를 넘김이 너무나 힘이 든다.

 

 내가 시를 쓰게 된 동기가 편운 <조병화>시인님의 순수고독(純粹孤獨)과 순수허무(純粹虛無)에 도취한 것이 원인일까? 아니면 첫 사랑에 실패하고 2천여 편의 유작(遺作)을 남기고 떠난 미국 현대시의 대모(代母)인 <에머리 디킨슨>의 생존을 음미함일까?

 

디킨슨 시인은 말을 했다. 미국 문단에서 그의 순수한 고독과 슬픔과 희로애락의 티없이 맑은 시가 빛을 발휘치 못함에 그는 그런 문단의 비판을 감내하며 자기의 이성(理性)과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순애의 순수한 생존의 허무를 노래한 것이 그녀가 떠난 지금에야 미국 문단의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 않는가?

 

나는 가끔 생각한다. 시는 사랑이고 고독이고 그리움의 연속되는 노래라는 느낌이 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와 같은 사랑, 즉 그는 혼혈 창녀 <잔느 뒤발>을 한평생 사랑을 했던 그의 정열, 중세 독일의 <릴케> 바람둥이 시인도 그리움의 사랑과 고독을 씹으며 중세 사교계의 최고의 미녀 평론가 <루 살로메>를 정복하기전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시는 사랑, 고독, 그리움, 허무, 죽음을 노래하는 무한대의 뜻을 간직하고 있기에 죽을 때까지 갖게 된 나의 직업임이 자랑스럽다.

 

쉬지 않는 인간 생존의 고독과 허무, 그리움의 날갯짓, 그 빛깔의 자위와 자학이 7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도 한편도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내 안에서 나를 치유코자 하는 그 허무감의 생존의 길을 찾아가고 있음이 내가 시를 쓰는 원인이라 할까.

 

영원히 생존하는 인류의 길, 고독한 흙의 길, 그 무한한 순애는 연어가 죽을 자리를 찾아서 모천에서 생을 마감하는 흙의 진리에 내 자신을 묻어 버린다. 그 흙의 노래는 누구나 숙명적으로 가는 생존의 기쁨으로 맞이할 그날을 위해 오늘도 흙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 고독, 허무와 그리움의 희노(喜怒)를 부르는 나 민초(民草) 이유식(李遺植), 2020년 5월 광활한 푸른 들녘에 차를 몰면서 나의 생존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더듬으며 허무의 눈물이 시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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