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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배경 영화(II)-‘영광의 깃발’(Glor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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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흑인병사들은 주임상사 멀케이(존 핀)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멀케이는 특히 시얼리스에게 더욱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데,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실전에 대비하여 여려빠진 그를 단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쇼 대령도 이를 알지만 묵과한다.

 

 사격연습 중 샤츠가 백발백중이다. 그러나 사냥 경험이 있어서라며 우쭐하는 샤츠의 등 뒤에서 콜트 권총을 계속 쏘며 화약 재장전 시간을 권총만큼 단축하라고 닥달하는 쇼 대령! [註: 콜트 권총은 장교에게만 지급되는 Colt Navy 1851 모델로 6발 연발이 가능하다.]

 

 한편 이 무렵 남부연합은 1863년 1월 1일자로 링컨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노예해방령'에도 불구하고, 북군 군복을 입은 모든 흑인들과 흑인 부대를 이끄는 백인 장교는 처형될 것이며, 귀향하는 흑인들은 노예로 삼는다는 포고령을 선포한다. [註: 실제로 남부군들은 포로로 붙들린 북부군 흑인군인들을 군인으로서 포로수용소로 보내는 대신 노예로 팔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1864년 4월 12일 테네시주 필로우 요새 전투(Battle of Fort Pillow)에서는 항복하는 수백명의 북군들, 특히 흑인들을 남부군 소장 네이선 포레스트(Nathan Bedford Forrest, 1821~1877)의 명령에 의해 총검으로 학살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남부연합의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전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훈련소에 남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드디어 소총이 지급된다. [註: 57구경 인필드 머스킷 소총(57 calibre 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으로 총신이 길며 단발이므로 화약을 재장전해야 하는 총이다.]

 

 쇼 대령의 비정(非情)한 처우에 대해 지금까지 '친구'로서의 조언을 서슴지 않던 포브스 소령에게, 그리고 참기 어려운 혹독한 훈련을 받는 '친구' 시얼리스에게도, 군인으로서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전투에 대비하는 군인정신을 기르기 위해 친구간의 정리(情理)와 안면을 몰수하고 상관으로서 명령하는 쇼 대령!

 

 다음 날, 무단 이탈한 트립 일병이 붙잡혀온다. 쇼 대령은 본보기로 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체벌을 명령한다. 웃옷을 벗기니 그의 등에는 수많은 채찍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채찍을 맞으면서도 꿈쩍도 않는 트립!… 드디어 이를 쳐다보는 쇼 대령의 눈에서, 입을 악다물고 고통을 참는 트립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데….

 

 그러나 그날 밤에 롤린스를 통해 트립은 군화를 구하기 위해 병영을 잠깐 이탈한 것이었음을 알고, 다음 날 쇼 대령은 인종차별주의자인 사단병참장교 켄트릭(리처드 릴)을 찾아가 상관인 대령의 직급으로 협박하여 2주 전에 신청했던 군화 600켤레와 1,200켤레의 양말 등을 구해온다.

 

 어느 날 육군성에서 전갈이 온다. 쇼 대령은 상부 지시에 의거하여 (백인)정규군의 한 달 급여는 13달러인 반면 흑인의 봉급은 10달러라고 공표한다. 이에 트립 일병이 "흑인 군인도 백인들 하고 똑같이 총 맞아 죽는데 왜 돈은 적게 주는 거야!"라며 차별 대우에 항의하여 급여명세서를 찢어버린다. 모든 부대원들이 따라서 보이콧을 놓자, "자네들이 급여를 받지 않겠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며 그의 명세서를 찢어버리는 로버트 쇼 대령! 이들의 불평등 대우 항의에 무언으로 동조한 연대장에게 환호를 보내는 병사들…. [註: 불평등 급여 문제는 쇼 대령이 사망한 1863년 7월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심지어 앤드류 주지사가 3달러 차이를 타주(他州)에서 차입해서 지불하겠다는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4연대의 이 사례는 다른 연대에까지 확산되어 급기야 1864년 4월에 제55연대에서 75명이 즉각적인 해결을 위해 링컨 대통령에게 항의하겠다며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의회는 그해 여름에 차별대우 정책을 중지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명령에 불복종하고 연대장을 두 번이나 폭행한 55연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때 드디어 군모, 군복 등이 지급된다. 앤드류 주지사와 프레드릭 더글러스, 로버트 쇼의 부모님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스턴 시내를 행진하는 제54 보병연대의 보무(步武)가 당당하다. 시민들이 꽃가루를 뿌리며 정규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흑인 부대를 크게 환호한다. [註: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로버트 굴드 쇼의 기념동상을 그대로 재현한 씬이다. 1863년 5월 28일 전투를 치르기 위해 남부로 떠나기 전에 보스턴 시내 비콘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쇼 대령은 '하퍼스 위클리' 특별취재 기자 에드워드 L. 피어스(크리스천 바스쿠스)를 만난다. [註: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지는 1857년 하퍼 & 브라더즈가 뉴욕에서 창간하여 1916년까지 약 60년간 발행한 정치 잡지이다. 이 잡지는 전쟁에 대한 많은 사건의 삽화를 포함하여 남북 전쟁에 대한 방대한 규모의 기사를 보도했다. 특히 토머스 내스트의 정치 시사만화, 펠리체 베아토의 사진, 그리고 찰스 디킨스, 윌리엄 새커리 등 지명도 높은 작가들의 글과 저명한 삽화가들을 이용하여 명성을 쌓아 발간 3년만에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변경하여 발행부수가 20만부에 달하는 인기를 누렸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하퍼스 위클리' 1871년 9월 9일자를 통해 보도된 조선 최초의 사진들이다. 1871년 6월 1일, 제너럴셔먼호 사건(조선 고종 3년, 미국 앤드류 존슨 대통령 2년인 1866년 8월 21일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에서 평양 관민들에 의해 소각된 사건)의 보복을 위해 미국 해군이 조선에 원정을 하여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 이때 종군 사진기자였던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1832~1909)가 촬영하여 보도한 사진은, 전멸한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의 조선군 시체들, 점령 당한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또 신미양요에서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수(帥)'자가 쓰인 장군기가 미해군 콜로라도함에 실려있는 사진 등이었다. 이 장군기는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국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36년이 지난 2007년 10월 22일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여담이지만 신미양요 이후 조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다음 호에 계속)

 

▲ (왼쪽) 주임상사 멀케이(존 핀)는 여려빠진 시얼스에게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 (오른쪽) 쇼 대령은 콜트 권총을 쏘며 샤츠(지미 케네디)에게 화약 재장전 시간을 권총만큼 단축하라고 닥달한다.


▲ 롤린스(모건 프리먼)가 57구경 인필드 머스킷 소총을 총번호와 수신자 이름을 호명하며 지급한다.

 

▲ (왼쪽) 채찍으로 체벌을 받지만 꿈쩍도 않는 트립 일병(덴절 워싱턴). (오른쪽) 롤린스(모건 프리먼)로부터 트립이 군화를 구하기 위해 병영을 잠깐 이탈했다는 사실을 듣는 쇼 대령.

 

▲ 소총과 군화, 군모, 군복으로 정식 군인이 된 제54보병연대는 앤드류 주지사와 프레드릭 더글러스, 로버트 쇼의 부모님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스턴 시내를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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