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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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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註: 시기적으로 보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먼저 일어난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시리즈로 연재 합니다. 191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및 TV극, 다큐멘터리 등은 200여 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5편을 엄선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많은 사랑과 성원 바랍니다.>

 

 미국 남북전쟁 배경영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1956년 20세기 폭스사 배급, 시네마스코프 흑백 영화인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꼽아보았다. 감독 로버트 D. 웹, 출연 리처드 이건, 데브라 파젯, 엘비스 프레슬리 등. 러닝타임 89분.

 

 사실 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 남북전쟁일 뿐 줄거리는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굳이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뒤에 소개할 여러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리즈 첫머리에 남북전쟁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의 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고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연합군, 즉 남군(Confederate Army)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 포격을 시작으로 개전(開戰)되어 북부군(Union Army)과 1865년 4월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연방 분리의 가장 큰 원인은 '노예제도'였다. 특히 면화플랜테이션 농장이 밀집돼 있어 '면화 주(Cotton States)'로 불리는 '딥 사우스(Deep South)'는 노동력을 잃음으로써 겪게 되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흑백 인종 평등의 두려움까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한편 북부 입장에서는 농업을 중시하는 남부에 있는 노예들을 분산시켜 그 세력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그 노동력을 북부 공업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7개 딥사우스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하면서 1861~1863년까지 별 7개가 있는 남부국기와 함께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일곱 개 주의 아메리카 연합국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정부 구조를 형성하였다.

 

 한편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부 연방 탈퇴의 시발점이 되었고, 링컨은 1862년 9월 22일에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고 1863년 1월 1일에 최종적인 노예 해방령을 선언했다.

 

 섬터 요새 공격 이후, 링컨 대통령은 각 주에 의용군을 요청하였는데, 그 후 2개월이 되지 않아 네 개 노예 주인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1863년 6월 20일, 버지니아 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웨스트버지니아 주로 북부군에 합류했다.

 

 아무튼 남북전쟁은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1807~1870) 장군이 버지니아 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1822~1885) 장군이 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완전히 종료됐으며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註: 로버트 E. 리 장군의 항복선서식 때, 남군의 국가로 불렸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던 유명한 노래 '딕시(Dixie)'가 연주되었다.]

 

 1861~1865년 사이에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 거의 18만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북부군과 함께 군인 또는 선원으로 복무를 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탈출을 했던 노예들이었다. 이러한 탈출 노예 병사 중 가장 뛰어난 부대는 '제54 매사추세츠 자원 보병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였다.

 

 한편 남부군은 포로로 잡은 흑인 병사를 노예로 만들었으며, 필로우 요새 학살과 같이 흑인이 항복을 하려하면 총살을 시켰다. 이것은 포로 교환 프로그램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남북 전쟁으로 인해 103만 명의 사상자(당시 인구의 3%)가 발생했고, 그 중 군인 62만 명이 죽었고 무수한 민간인 사상자들이 생겼다. 그 가운데 3분의 2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고 그 중 약 56,000명의 군인이 감옥에서 죽었다.

 

 특히 1864년에 남군이 만든 조지아 주의 앤더슨빌 포로수용소(Andersonville Prison)에는 수용능력의 4배가 넘는 약 45,000명의 북부군 포로들이 부적절한 음식과 식수 부족, 비위생적 환경 때문에 괴혈병, 이질 등 질병으로 약 13,000명이 죽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지금껏 미국이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먹는 참혹한 전사로 남아있다. [註: 1966년 영화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도 앤더슨빌 포로수용소에 대한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앤더슨빌 포로수용소장 헨리 비르츠(Henry Wirz, 1823~1865)는 전후 재판을 받고 1865년 11월 10일 워싱턴DC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1861년, 북부 연합의 인구 수는 2,200만, 남부 연합은 900만이었다. 남부의 인구는 350만 명 이상의 노예와 약 550만 명의 백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의 백인 인구는 남부의 백인 인구보다 4배 이상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 중 또 하나는 종전의 돌격 등과 같은 나폴레옹식 전술을 탈피한 인류 역사상 가장 이른, 진정한 의미의 산업 전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철도, 증기선, 대량 생산된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군사 장비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더욱 정밀한 강선의 개발로 탄알 장전 속도와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미니에 탄환, 그리고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북군에 의해 사용된 스펜서 연발총이나 시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개활지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한 전략으로 쓰인 전쟁 참호가 탄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러브 미 텐더(1956)' 영화포스터
 


▲ 전쟁이 종료된 사실을 안 7명의 남부군은 강탈한 돈을 7등분하고 각자 귀향길에 오르는데…. 가운데 앉은이가 밴스 레노(리처드 이건).
 


▲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밴스가 귀향하여 꿈에도 그리던 연인 캐시(데브라 파젯)를 안아보지만 그사이 그녀는 막내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가 되어 있다.
 


▲ 밴스가 "우린 항상 캐시가 가족의 일원이 되길 바랬다"며 태연한 척 하지만 가족은 이로 인해 불안정하기만 하다.
 


▲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 바자회는 시끌벅적한 축제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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