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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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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과 엠마 해밀턴 부인과의 염문(계속)

 1800년 윌리엄 경이 나폴리 대사직을 그만 두고 엠마와 넬슨 등과 함께 런던으로 귀향한다. 사실 넬슨은 그의 품행 문제에 실망한 상부로부터 소환 당했다. 그후 엠마는 아예 넬슨과 동거하며 1801년 딸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1801~1881)을 출산한다. 또 1803년에 둘째 딸을 낳았으나 몇 주 뒤 사망했다.

 

 1802년 4월 26일 엠마의 37세 생일을 축하하던 넬슨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노포크 번햄쏠프(Burnham Thorpe, Norfolk)의 교구목사였던 아버지 에드문드 넬슨(Edmund Nelson, 1722~1802)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그런데 해밀턴 경은 누가 봐도 조카의 추문을 덮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나이도 든 만큼 새파랗게 젊은 아내인 엠마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일 30대의 엠마가 40대의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지 싶다.

 

 영화 속에 엠마와 해밀턴 경의 대화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해밀턴 경이 말한다. "아내가 속이는 세 가지 유형의 남편이 있다. 첫째는 천성적으로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 둘째는 몰라서 속임을 당하는 사람, 셋째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내가 셋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엠마가 "네 번째가 있다."며 "까다롭고 속이 비어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사람! 당신이 결혼한 이유는 내가 당신 집의 그림이나 조각처럼 죽은 장식물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자 해밀턴 경이 말한다. "조각이나 그림은 결코 나이 먹지 않고 해군처럼 바다로 나가지도 않으며, 내가 피로하고 외로울 때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다."

 

 넬슨은 1805년 잠시 런던으로 돌아와 엠마와 재회한 후 다시 원정에 나서는데, 엠마는 넬슨이 떠난지 얼마 안 된 10월 19일에 쓴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 속에는 딸 호레이샤 앞으로 쓴 답장편지와 엠마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엠마에게 쓴 편지에서 넬슨은 "엠마 해밀턴이 자기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산을 물려줄 것"과 "입양한 딸 호레이샤 넬슨 톰슨에게 넬슨 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함"을 분명히 했다. 넬슨과 엠마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불륜 관계였으므로 호레이샤를 낳자 나폴리에서 입양한 고아 톰슨으로 등재했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쓰고 이틀 후인 10월 21일,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했으니 이 편지가 유언장이었던 셈이다.

 

■ 넬슨의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와 전사

 한편 1799년 8월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하여 쿠데타에 의해 프랑스 통령정부(統領政府)의 첫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1공화국을 다스리는 동안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고 강력한 관료체제를 구축했으며 잘 훈련된 군대를 육성했다.

 

 그러나 1년 여 뒤에 프랑스에 의한 유럽시장에서의 영국제품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을 선포한 후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때문에 전쟁의 목적이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 회복에서 나폴레옹 타도로 변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영웅교향곡'을 작곡했던 베토벤이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으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註: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eon)'은 자크 루이 다비드(Jeaques-Louis David, 1748~1825)가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유화로 제작한 유명한 그림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이후 '나폴레옹 전쟁'은 격화되었고, 나폴레옹이 완전히 실각하여 남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1815년까지 1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註: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49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만 51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에 안치되어 있다.]

 

 1805년 12월 오스트리아-러시아 제국 연합군은 나폴레옹과의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대패한 반면, 영국의 넬슨 제독은 같은 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해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원천적으로 무산시켰다.

 그러나 넬슨은 교전 중 프랑스측 총탄에 저격됐으며, 피격 후에도 4시간 동안이나 지휘를 계속했지만 결국 다음의 말을 남기고 47세에 절명(絶命)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로는 전사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장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넬슨의 경우 유언에 따라 수장하지 않고 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브랜디에 몰약과 장뇌를 넣어 그의 기함 빅토리(Victory) 호에 실려 일단 가까운 지브롤터(Gibraltar)로 옮겨졌고, 거기서 속을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5주만에 영국에 도착하여, 12월 23일 '그리니치 수병을 위한 왕립병원(Royal Hospital for Seamen at Greenwich)' 즉, 지금의 '구 왕립해군대학(Old Royal Naval College)'으로 운구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 넬슨이 인사도 없이 함선으로 돌아간 걸로 알았던 엠마에게 그가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는 어머니 카도건 부인(새라 올굿).

 

▲ 발코니에서 만나 키스하는 넬슨과 엠마. 그리고 함선으로 돌아가는 넬슨과 이별을 나눈다. 상부에서는 넬슨을 그녀와 떨어뜨려놓기 위하여 바다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하기 위해 발코니로 나가기 전에 엠마를 쳐다보는 넬슨. 왼쪽에 그의 부친 에드문드 넬슨(할리웰 홉스)과 본부인 프란시스 넬슨 부인(글래디스 쿠퍼)이 있다.

 

▲ 영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넬슨을 바라보는 두 여인. 왼쪽 하디 대위(헨리 윌콕슨)와 함께 감격과 존경심으로 경청하는 엠마 해밀턴 부인(비비안 리)과 대조적으로 질투와 경멸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넬슨 부인(글래디스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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