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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배경 영화(I)-‘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6·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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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불을 붙이는 프랑스군. 이때 자파르가 할리마에게 '이렇게 죽는 건 헛되다'고 말하고 매튜 대령에게 "이 집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나가겠다"고 다급히 알리는데….

 

 장면은 자파르와 매튜 대령이 탄 차 속. 자파르가 말한다. "나를 산 채로 잡아서 만족하는군. 그러나 후회할 거야. 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매튜 대령이 말한다. "짐 던 데 만족하고 있어. 죽이고 싶진 않았어. 전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없어. 게임은 끝났어!"

 

 이때 할리마가 울면서 항의한다. "악마, 위선자! 아냐, 아직도 알리 라 프안트가 카스바에 있어!"

 

 장면은 알리의 은신처를 보여준다. 알리는 자신과 마무드, 하시바가 있는 자리에서 꼬마 오마르에게 내일 폭탄을 설치하는 일을 지시한다. 그런데 새벽에 거사를 치르기 전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프랑스군들. 마무드의 아내 파티하가 그들이 숨은 타일벽에 붙어있는 침대에 위장하기 위해 얼른 드러눕는다. 그러나 붙잡혀 밖으로 끌려 나온다. 임신한 상태여서 몸가누기가 불편하다.

 

 장면은 타일벽 속에 숨어있는 네 사람을 보여준다. 첫 장면의 바로 그 모습이다. 고문에 못이겨 누설한 늙은 밀고자의 고뇌하는 모습이 교차된다. [註: 늙은 밀고자는 날품팔이인 라크난 압둘라(Laknan Abdullah)로 세 자녀를 두고 카스바의 테베 가 8번지에 살았다.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에 의해 FLN요원으로 지목되어 고문에 못이겨 알리 라 프안트의 은신처로 안내했다. 그런데 정작 은신처를 알려준 사람은 프랑스군 측에서는 사디 야세프였다고 주장하고, 사디 야세프는 조라 드리프가 알려주었다고 했으나 본인들 둘다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프랑스군들은 타일벽 앞에 폭탄을 설치한다. 매튜 대령이 "30초를 주겠다. 어쨌든 너는 졌다!"고 선언한다. 결국 현장에 4명의 군인을 남겨놓고 모두 자리를 떠난다.

 

 장면은 건물 바깥 카스바의 하얀 지붕들 위에 프랑스군인들과 이를 지켜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쫙 깔렸다. 시민들은 모두 합장 기도를 하고 있다.

 

 카를 장군이 현장에 도착한다. 네 명의 군인도 밖으로 뛰쳐나온다. 이제 폭파 준비가 완료되었다.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기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드디어 건물이 폭파된다.

 

 그 30초 동안 은신처에 숨어 공포에 질린 13세 소년 '작은 오마르'와 하시바, 마무드와 알리 라 프안트 등 마지막 4명의 반군은 끝까지 버티다 다이너마이트 폭파로 장렬히 산화(散華) 한 것이다. [註: 이 중 유일한 여성인 하시바 벤 부알리(Hassiba Ben Bouali, 1938~1957)는 리세이 들라크로와 고등학교 때 스카우트 운동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알제리인들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게 되어 16살 때인 1954년 알제리 대학의 '알제리 무슬림 학생 총연맹'에 가입하여 FLN요원이 되었다. 1957년 10월8일 이 폭발로 그녀는 꽃다운 나이 19세에 사망했다. 그녀는 배우 못지 않은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빈민가의 잡범 출신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일자무식 알리가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를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피라미드형으로 조직된 반군의 지도부는 괴멸되고 알제리 FLN(인민해방전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57년 10월의 일이다. [註: 필립 매튜 대령은 실제 알제리 제10 공수사단장 자크 마쉬(Jacques Massu, 1908~2002) 장군과 그의 부하였던 마르셀 비제아르(Marcel Bigeard, 1916~2010) 중령과 로저 트랑키어(Roger Trinquier, 1908~1986) 중령의 복합적 모델이다. 마쉬 장군은 '르 몽드'지에 "고문은 1957년 당시 알제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며 공수부대에 의한 수사과정 중 발생한 고문과 강간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한편 비제아르 장군은 알제리 전쟁 중 고문을 '필요악'으로 정당화했으나 그 자신은 고문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죽을 때까지 부정하고 2010년 94세로 사망했다.]

 

 현장을 떠나는 카를 장군이 매튜 대령에게 "이제 촌충의 머리가 없어졌지. 만족하는가 매튜? FLN은 이제 알제리에서 없어졌어."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기가 알제리 전부는 아니니 나머지 놈들을 잡으러 산으로 옮겨야지. 전쟁은 산이 더 쉽지."라고 말하는 장군. [註: 실제 비제아르 중령은 FLN 소탕을 위해 1957년 4월에 애틀라스 산(최고봉 4167m)까지 추격하여 300여 명의 주누드(아랍계 농민군) 중 100여 명을 사살하는 악바리로 그의 상관인 마쉬 장군은 '애틀라스 산의 신'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956년 6-9월 중 두 번에 걸쳐 FLN 암살단에 의해 가슴에 세 발의 총을 맞았으나 모두 심장을 가까스로 비켜나가 살아남을 만큼 건장한 체구였다고 한다.]

 

 내레이션: 1960년 12월11일. 전쟁은 산에서 지속된 채, 2년 동안 잠잠하다가 알 수 없는 동기로 동요가 다시 터졌다. 그리고 아무도 그 이유와 상태를 모른다.

 

 장면은 시민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하고, 이를 저지하는 프랑스군을 보여준다. 그리고 밤새 급조한 듯한 헝겊, 수건, 옷가지 등에 아무렇게나 만든 초승달과 별의 알제리 국기가 물결을 이룬다. '자유를 찾아 행진하자. 알제리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는 프랑스군.

 

 1960년 12월21일 군중봉기 마지막 날. "독립을, 긍지를, 자유를 원한다!"며 괴성과 함성을 지르는 데모 군중. 그 중에는 앞에 나왔던 세 여인의 얼굴과 마무드의 아내 파티하도 보인다. 항쟁은 2년 더 지속되었다.

 

 알리 라 프안트 등 10대, 20대였던 네 명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알제리인들은 '전쟁'에서는 졌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그들이 죽은지 5년 후인 1962년 7월2일 꿈에 그리던 자유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역사의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알제리 전쟁이 끝난 지 37년 만인 1999년 6월에 프랑스 의회는 이것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였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얻어진 자유·평등·정의라는 미명 아래 식민 지배 및 억압, 고문, 강간을 정당화 했던 프랑스는 문명국으로서의 민낯을 드러냈을 뿐이며, 꼼수같은 '선택적 청산'으로는 알제리인들의 아픔과 슬픔은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묘한 논리로 회피해온 일본의 과거 청산에 대한 타산지석이다. (끝)

 

▲ 꼬마 오마르로 하여금 폭탄을 설치하는 거사를 치르기 전 아침 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에 프랑스군들이 들이닥친다.

 

▲ 프랑스군들은 타일벽 앞에 폭탄을 설치한다. 매튜 대령이 "30초를 주겠다. 어쨌든 너는 졌다!"고 선언한다.

 

▲ 타일벽 속에 숨어있는 10대, 20대의 네 사람(좌로부터 무마드, 하시바, 꼬마 오마르, 알리 라 프안트)은 최후까지 버티다 장렬하게 산화한다. 1957년 10월8일이었다.

 

▲ 건물 바깥 카스바의 하얀 지붕들 위에 프랑스군인들과 이를 지켜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쫙 깔렸다. 시민들은 모두 합장 기도를 하고 여인들은 눈물을 흘린다.

 

▲ 알리 라 퐁 등 네 명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알제리인들은 '전쟁'에서는 졌지만, 그들이 죽은지 5년 후인 1962년 7월2일 꿈에 그리던 자유독립을 쟁취하였다. 역사의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