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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영화 시리즈 (XII)-'와일드 번치'(The Wild Bunch)(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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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부 시대 사나이들의 의리·우정에 대한 '진혼곡'

 

 

 

 

(지난 호에 이어) 
 한편 파이크 일당을 추적하던 손튼은 멀리서 쌍안경으로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싸움이 끝난 아수라장에 뒤늦게 달려와 옛 친구들의 죽음에 연민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드러낸다. 파이크의 총대에 꽂힌 콜트 45구경 권총을 보며 이 불가사의한 일을 저지른 그와 지나간 과거(서부 시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런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손튼의 바운티 헌터들은 죽은 시체로부터 군화, 금붙이, 시계 등을 노획하면서 파이크를 생포하지 못하고 죽게 한 것은 모두 손튼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인다. 

 

 

 


 넋을 잃고 지쳐 다시는 해리건에게 돌아가지 않을 심산으로 마을 입구문에 기대어 앉아있는 손튼. 잠시 후 프레디 사익스가 앞에서 본 멕시코 마을 민병대와 함께 나타나 반군에 합류하겠느냐고 손튼에게 묻는다. 디크 손튼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말에 올라 그들과 함께 떠난다. 마치 '새로운 와일드 번치'가 탄생한 듯…. 


 그러면서 손튼과 사익스를 포함한 '옛 와일드 번치'가 함께 모여 앉아 웃는 회상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아쉬워하듯, 동시에 옛 서부 시대의 사나이들의 의리와 우정에 대한 일종의 '진혼곡'인 양 '라 골론드리나' 노래가 다시 흐르는 가운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와일드 번치"의 주제는 첫째로 총잡이 무법자의 시대는 끝났음을 암시한다. 파이크 비숍 일당은 늙고 추악하며 20세기로 접어든 사회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시대착오적인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왕년의 존 웨인, 게리 쿠퍼 같은 멋진 총잡이들처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모두 돈을 쫓고 생존을 위해 폭력을 남용하는 허약하고 결점 많은 인간일 뿐이다. 


 다음은 공권력에 대한 시각이다. 근대를 상징하는 국가권력과 자본주의가 이 영화에서 각각 군대와 철도회사로 등장한다. 그리고 근대는 시대착오적인 파이크 일당들을 밀어낸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은 더 이상 그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던 서부개척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폭력 미학에서 더 나아가 폭력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 내면에 대한 고찰이 진하게 녹아있다. 첫째 '와일드 번치'는 지금은 구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서부 개척 시대의 미덕과 가치인 '우정'과 '의리'를 지켜 붙잡힌 동료를 구출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다음 주제는 '배반'이다. 파이크 비숍은 그의 배반 때문에 고민한다. 같은 동료였던 디크 손튼을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가 붙잡혀 감옥생활을 했던 일과 철도회사 은행 강탈 시 인질을 붙잡고 있던 크레이지 리를 버리고 왔던 것 등이 그렇다. 그래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파이크의 영웅주의는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처럼 죄의식과 절망적인 죽음에 대한 열망이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랄해 보이던 연방정부군 리더 마파치는 악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허드렛일 하던 멕시코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던 모습과 기차역 전투에서 전보를 전달하는 소년에게 감동을 주는 영웅적인 모습 등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도 있음을 보여준다. 


 한 울타리 밖에서 보면 적장이고 악인이지만 울타리 안에서는 인간적인 영웅이 되는 일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 마파치가 파이크 일행에게 죽자 이를 슬퍼하던 멕시칸 창녀와 소년이 총으로 파이크를 쏴 죽이는 이유는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또 영화의 초반에 파이크 일행이 엔젤의 고향 마을을 떠날 때 주민들이 불러주던 '라 골론드리나' 노래는 이방인에 대한 멕시코인들의 석별의 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밤사이 탈취한 무기를 다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약속한 대로 한 상자만 가져가는 민병대를 통해 우리는 순수하고 인정 많은 멕시코인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2분법적 편견과 오만에 의해 쓰여진 승자의 역사는 으레 패자는 가난하고 무식하며 짐승과 다름없는 가엾은 존재로 그려지고, 패자에 대한 부끄럽고 악랄한 얘기만 들춰내 침략을 정당화하는 반면 승자에 관한 부정적인 얘기는 감추는 법이다. 


 이밖에 무법자 일당의 리더인 파이크와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더치와의 끈끈한 우정, 한때 파이크의 동료였으나 이제는 그들을 뒤쫓는 손튼과의 미묘한 관계, 멕시코에서 대치하고 있는 혁명반군과 정부군의 패권 싸움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와일드 번치"의 초반부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장엄한 총격전, 그리고 중반부의 열차 강도 장면과 다리 폭파 장면 등은 이전의 헐리우드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폭력의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숙연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Major Dundee(1965)' 'The Getaway(1972)' 등으로 잘 알려진 샘 페킨파(Sam Peckinpah, 1925-1984) 감독은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1967)"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註: 이 영화 마지막에 숲 속에 매복해 있던 경찰들이 기관총으로 차 속에 있는 두 남녀 주인공을 벌집으로 만드는, 이른바 '댄싱 데스(Dancing Death)' 슬로우 모션 장면은 폭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사상 가장 잔인한 죽음 중 하나로 우상화된 명장면이다.] 


 페킨파 감독 특유의 다수 카메라를 사용한 슬로우 모션과 클로스업, 몽타주 기법 등 다양하고 현란한 테크닉으로 유혈이 낭자한 폭력 장면을 심미적으로 그려내어 대의명분을 위한 처절하기 그지없는 주인공들의 몸부림이 역설적으로 비극임을 표현했다. 


 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때여서, 페킨파 감독은 "와일드 번치"를 통해서 생존을 위해 잔인한 인성(人性)에 의해 저질러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살육이 일어났던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풍자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미있는 통계에 의하면 "와일드 번치"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첫 도입부에서 22명, 마지막 총격전에서 112명 등 모두 145명이라고 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후에 오우삼(吳宇森, John Woo)의 '영웅본색' '첩혈쌍웅' 같은 홍콩 느와르의 상투적인 기법인 '압도적인 적'과 미친듯이 싸우다 죽는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헐리우드의 거장인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 등의 작가주의 감독들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거의 반세기 전의 영화이지만 명작의 향기는 영원하다. (끝)

 

※ 알림: 코로나-19 사태로 3월28일 '손영호의 TMMT'는 휴강하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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