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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IX)-'세상의 모든 아침' (All the Mornings of the Worl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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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에 얽힌 스승과 제자의 애증을 그림과 
음악의 만남, 시적 영상미로 표현한 걸작

 

 

 

(지난 호에 이어)
 다시 침대로 올라가려 하지만 힘이 부쳐 못 올라가자 사정없이 그녀를 확 떠밀어 눕히는 마랭. 일말의 사랑은커녕 인간다운 온정마저도 느낄 수 없는 막가파의 행동처럼 보인다. 

 

 

 


 이때 뜨와넷이 언니의 비올을 가져온다. 마랭이 '꿈꾸는 소녀(La Reveuse, www.youtube.com/watch?v=TpZYctXCBdY)' 연주를 시작하자 몸은 쇠약하지만 그의 빠른 템포를 즉시 교정하는 마들레느. 

 

 

 

 


 이윽고 그의 연주에 미소로 화답한 마들레느는 떠나는 마랭을 창밖으로 확인한 후 쪽방을 뒤져 그가 선물했던 구두를 찾는다. "구두장이는 되기 싫다고 그랬지!"라고 되뇌이던 마들레느는 헝겊으로 된 긴 구두끈을 풀어 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올라가 침대 상단 커튼 봉에 걸고는 목을 매 자살한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인 마레는 힘들고 지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의 길을 택했고, 스승의 딸인 마들레느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악용하여 왕의 악사가 되자 그녀 곁을 떠났다. 비정한 사랑에 낙망한 마들레느는 그의 아이를 사산한 후 오랜 병고 끝에 비참한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 상트 콜롬브는 분노한다.


 내레이션이 나온다.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아침이 오지만 한 번 지나간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Tous les matins du monde sont sans retour.)'"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 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상트 콜롬브의 오두막을 보여주고 거기에 있는 화가 보쟁이 그린 정물화가 클로스업 된다. 자식들이 없으니 오두막 주변의 밭도 황폐화 되고, 텅빈 집에서 홀로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애련하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딸의 죽음을 부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딸의 죽음이 분노와 증오를 넘어 스승과 제자를 다시 만나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할 줄이야! 

 

 

 


 마랭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1689년 1월23일 눈이 시리도록 바람이 매섭고 다리가 얼어붙는 추운 날이었다. 달은 밝고 구름은 높은, 맑고 상쾌한 밤이었다. 마들레느가 죽은 후 잠 못 이루던 마랭은 매일 밤 말을 타고 스승의 오두막으로 가서 엿듣기를 3년! 그동안 결코 연주하지 않았던 스승이 그날 드디어 연주를 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오두막에서 다시 대좌하는 스승과 제자. 비록 음악을 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지만 항상 진정한 음악을 찾고자 갈망해 온 마랭은 스승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달라고 간구한다. 


 상트 콜롬브가 입을 연다. "음악은 언어를 초월한다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지. 음악은 왕을 위한 게 아닐세. …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일까?" 마랭이 대답한다. "죽은 자를 위해 잔을 남기는 것"이라며 "음악은 지친 자를 위한 휴식이죠. 길 잃은 아이를 위한, 구두장이의 망치소리를 잊기 위한, 우리가 태어나기 전 생명도 없고 빛도 없던 때를 위한…." 


 모든 것의 상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음악을 찾고자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벗'을 기다리고 있던 스승은 마랭의 이 말에 야윈 손으로 그의 통통한 손을 덥석 붙잡고 '죽은자를 부르는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마랭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마들레느가 쓰던 비올을 닦는 동안 포도주와 비스킷을 준비하던 스승은 과자 한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어지자 발로 밟아 으깨 버린다. 이제 영혼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공허한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임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옴을 암시한다.

 

 

 

 


 혼자만 간직했던 붉은 노트를 갖고와 이를 제자에게 보여주는 스승. 이 작곡집을 제자에게 넘겨주고 제자는 다시 스승에게 건네는 의식을 치른 후 포도주를 잔에 따라 한 잔씩 마신 다음 드디어 스승과 제자의 협연이 시작된다. 앞에서 죽은 아내의 환영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왔던 '슬픔의 무덤'이란 곡인데 원래 곡명은 '눈물(Les Pleurs, www.youtube.com/watch?v=IMoRPxLdSQ0)'이다. 


 듀엣으로 연주하는 동안 스승과 제자의 눈물과 미소로 얼룩진 얼굴이 교차한다. 이 경지는 이미 예술의 표상(表象)이 아니라 도(道)의 영역에 다다른 것일진대 진작 음악을 통한 슬픔이 강렬하게 와 닿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상트 콜롬브가 표현해 내려는 슬픔의 의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히며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용서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적어도 이 점에서는 한(恨)이 우리의 숨결이 되고 속눈물이 된 임권택(82) 감독의 '서편제(西便制•1993)'가 한 수 위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장면은 처음의 늙은 마랭 마레로 돌아간다. 얘기를 듣던 제자들도 모두 눈물을 글썽인다. 진정 연인이자 스승이었던 마들레느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 그녀를 잃은 슬픔에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던 마랭이 얼굴을 들자 한줄기 빛 속에 스승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말한다. "자네가 자랑스럽네. 그 애가 사랑한 곡을 연주해 주게." 

 

 

 

 


 마들레느를 위해 작곡했던 '꿈꾸는 소녀'를 연주하는 동안 스승은 온화한 얼굴에 눈물을 흘린다. 비로소 제자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용서함을 암시하면서 장면은 페이드 아웃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세상을 등지고 '도'의 경지의 예술을 추구하는 '음악가' 스승과 그 스승을 능가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지만 세상의 부와 명성을 위하여 예술의 기교와 표상을 중시하는 제자 간의 애증(愛憎). 하지만 딸의 죽음으로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애타게 원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증오와 분노를 넘어 그들은 같은 것을 공유하게 된다. 그들이 애타게 찾았던 것을!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그래서 붙잡을 수 없는 것. 그러나 존재하는 것 ― 진정한 음악의 본질은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닐까? (끝)


(지금까지 비올 음악에 대해 도움을 준 분은 네이버 블로그의 '빈들' 님 임을 밝히며 감사를 드립니다.) 

 

※ 알림: 11월 7일(수) 12시 30분 갤러리아 쏜힐 문화교실에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사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중국 차마고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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