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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I)-'비발디’ (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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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지난 호에 이어)
 베네치아 집으로 돌아온 비발디와 안나 지로에게 여동생이 베네치아에서 손꼽히는 극작가인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707~1793)가 찾아왔었다고 알린다. 


 다음날 비발디와 안나 지로는 오페라 "그리젤다(Griselda)"를 통해 골도니(크리스티앙 바딤)의 능력을 검증한다. 골도니는 비발디에게 귓속말로 그녀의 노래가 좀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평하는데, 이를 들은 비발디는 무례하다며 내쫓으려 하지만 벌써 대본을 척 써서 건네는 그에게 금세 반해 그를 고용한다. 

 

 

 

 


 오페라 '그리젤다'는 지오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쓴 '데카메론' 중 '열흘째 날 이야기(인내심 많은 그리젤다)'에 기초하여 골도니가 각색한 것으로 1735년 5월18일 산 사무엘레 극장(일명 그리마니 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 "아리스티데(Aristide)"를 같은 극장에서 상연했고, 1737년 5월26일 베로나에서 "우티카의 카토네(Catone in Utica)"를 올려 성공을 이어갔다. '우티카…'는 같은 해 암스테르담 국립극장 100주년 기념 공연작으로도 올려졌다. 


 당시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는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0점이다."고 평했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평으로 골도니에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0점이다."


 비발디는 94개의 오페라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작곡으로 확인된 것은 50개 미만이고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곡은 단지 20여 곡에 불과하다. 더욱이 제목은 달라도 그가 작곡한 곡들은 "짬뽕음악(pasticci)"이 많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작품을 수백 개 쓴 게 아니라 한 곡을 수백 번 베껴 쓴 사람이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비발디는 500개 이상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450곡은 피에타 양육원에 재직하는 동안 써진 것이다. 또 신포니아 및 73개의 소나타를 비롯하여 칸타타, 교회 성악곡을 작곡했다.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창작활동을 해나간 결과이리라. 


 하지만 피에타 측은 곡당 금화 1냥(sequin)만 쳐서 보상했다는데, 당시 인쇄공이 금화 4냥을 받은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36년 크게 의지했던 아버지 바티스타 비발디가 세상을 뜬다. 


 1738년 베네치아 주교의 보조신부로 안나 지로를 처음 비발디에게 소개했던 안젤로가 대운하에 있는 유명한 포목상의 딸인 안토니아 그리소니(프란체스카 데 케치)와 피에타 양육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성직자로서의 도덕성 문제 때문에 페라라의 주교에 의해 '파르나체'의 페라라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주교 집무관을 통해 접하게 되어 희비가 교차한다. 


 그동안 온갖 추문에 시달리던 안나 지로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드디어 비발디를 떠나 오스트리아 그라츠 가극단으로 간다. 


 1740년 3월21일, 비발디는 피에타 양육원에서 마지막 연주를 한다. 이 곡이 "조화의 영감, 작품3,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8번 A단조, RV 522". 


 그리고 5월11일 괜한 소문 내지 않기 위해 파올리나의 집에서 자고 안나 지로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홀로 떠난다. 그녀가 떠난지 2년 만이다. 

 

 

 

 


 비발디를 흠모하던 파올리나는 그를 원하지만 성직자로서의 의무감에서 그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비발디. 한편 병상에 있던 베네치아 주교는 비발디가 사라지자 신이 나서 "트럼펫 협주곡"을 미친 듯 불어대는데, 미셸 세로의 넌센스 한 연기 및 상황 설정이 잘못된 장면이다.


 드디어 그라츠에서 안나 지로를 만난 비발디는 비엔나의 과부 마담 발러(카티아 첸코)의 하숙집에 머물며 카를 6세 황제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시 가극단을 맡기겠다던 약속의 실행 대신 황제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註: 1740년 10월20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1685~1740)는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그동안 오페라 공연 및 바이올린 연주 등으로 벌었던 재정도 바닥나고, 말년에 세인의 관심이 차갑게 식은 상태에서 비발디는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741년 7월28일 63세로 쓸쓸하게 객사하였다.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註: 한참 후배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도 같은 성당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렀고, 빈민묘지에 묻혀 행방이 묘연한 점도 비발디를 닮았다.]


 이때 앙드레 캉프라(1660~1744) 작곡의 "진혼미사곡(Messe de Requiem)"이 소년합창단의 노래로 나오는데, 9살의 요제프 하이든이 클로스업 된다. 그러나 당시 장례식에서 음악프로그램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는 억지로 짜맞춘 얘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장례비가 당시 극빈자치고는 상당히 비싼 19굴덴 45크로이처(약 14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묻힌 성 카를 교회 인근의 빈민묘지(Armensunder-Gottesacker)는 178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의 칙령으로 폐쇄되었는데, 연고자의 신고나 이장이 없는 상태에서 그 위에 1815~1818년에 비엔나 기술대학이 들어섰다. 1978년 비발디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조그만 명판이 하나 붙었다. 또 그가 머물던 집은 오성급 자허 호텔(Hotel Sacher)이 들어서, 인걸은 간데 없고 인생무상을 말해주고 있다. 


 안나 지로는 베네치아로 돌아가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홀아비인 자나르디 란디 백작과 결혼한 후 은퇴하여 여생을 보냈다는데 1748년 이후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모른다.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지만 두 사람의 우정과 예술적 협력 이상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는 없고 영화 속에서도 비발디는 이를 단호하게 부인하는데… 베네치아의 왕자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아주 잊혀져 있었으나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이르러 1927년 토리노의 도서관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음악학자들이 비발디의 주요 필사본 모음집을 발견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전모가 밝혀지면서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발디의 첫 음반이 나오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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