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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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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그런데 이 사교모임에서 흥미있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샤 세르트(나타샤 린딩거), 드미트리 대공(라샤 뷔크빅)과 배론 딩클라게(미셸 루울)이다. 영화에는 잠깐 나오지만 실제로 샤넬에게 준 그들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좀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다.

 

 

 


 미샤 세르트(Misia Sert, 1872~1950)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학교의 교수이자 조각가인 폴란드 출신 아버지 시프리안 고뎁스키와 벨지움의 유명 첼리스트 아드리앙 프랑수와 세르베의 딸인 어머니 소피아 세르베 사이에서 마리아 고뎁스카(Maria Zofia Olga Godebska)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리아를 낳자마자 사망하여 외갓집이 있는 브뤼셀에서 양육되면서 마리아의 애칭인 '미샤'로 바뀌었다. '세르트'라는 성은 스페인 화가인 호셉 마리아 세르트와 세 번째 결혼하여 얻었다. 


 제자와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온 미샤는 모리스 라벨의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에게서 일주일에 하루씩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포레의 학생들의 피아노 알바로 연명해 가다 21살 때 조카 타데 나탄송(Thadee Natanson, 1868~1951)과 결혼한다. 


 이때부터 파리의 예술가, 문학가, 음악가 등 지식인 서클을 만들어 그들의 뮤즈가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그리고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앙드레 지드 등 당시 내로라 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30년 이상을 '문화적 중재자'로 이름을 떨친 보헤미안 엘리트인 미샤는 상류사회 그룹 살롱을 운영하면서 '천재 수집가'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미샤를 알고 싶으면 먼저 스스로 천재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미샤가 코코 샤넬을 만난 것은 1917년 프랑스 여배우 세실 소렐(Cecile Sorel, 1873~1966)의 집에서였다. 특히 아서 카펠의 사망 이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던 샤넬의 영혼을 위로해준 진정한 친구였다. 한편 샤넬이 미샤에게 끌린 매력은 그녀가 광적인 파괴성을 보이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위트와 풍자로 모든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때론 소름 끼치도록 만드는 그녀의 천재성에 있었다. 

 

 

 

 


 세르트는 포용력이 있고 관대하여 샤넬과의 우정뿐만 아니라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도왔다. 1911년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초연이 있던 날, 의상제작사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빌린 무대의상의 반환 요청을 갑자기 받았을 때 그녀가 현금 4천 프랑을 선뜻 내줘 위기를 넘겼다.


 또 디아길레프가 1929년 8월 베니스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달려가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며, 그가 죽자 발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를 기리기 위해 상 미셸 섬에 안장하는 등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파리 점령기 동안, 그녀는 예전처럼 살롱을 운영하면서 나치를 상대로 충성하여 돈을 벌었다 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그녀의 소문난 관대한 기질과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비난,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났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Grand Duke Dmitri Pavlovich of Russia, 1891~1942)은 1916년 12월 라스푸틴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자 도망쳐 페르시아를 거쳐 191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제정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2년 뒤인 1920년에 파리로 옮겨와 샴페인 판매원으로 일했다. 한편 그의 누이동생 마리는 '키트미르(Kitmir)'를 설립하여 슬라브 전통 유리구슬과 수공예자수 사업을 하면서 코코 샤넬과 인연을 맺었다. 

 

 

 

 


 드미트리 대공은 1921년 봄, 몬테 카를로에서부터 샤넬과 약 1년 간 연인관계를 맺었다. 1926년 미국에서 오드리 에머리(Audrey Emery, 1904~1972)와 결혼하여 1937년 이혼할 때까지 슬하에 외아들 파울 일린스키(Paul Romanovsky-Ilyinsky, 1928~2004)를 두었다. 일린스키는 한국전쟁 때 미해병 소속 종군사진사로 참전하였으며, 플로리다 팜 비치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1991년에 러시아 왕정주의자들이 생존하는 로마노프 왕정의 유일한 혈육이므로 '차르(Tsar)' 칭호를 제의하며 러시아 복귀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드미트리 대공은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만성 결핵 진단을 받고 1939년 9월 2일 스위스 다보스 샤츠알프(Schatzalp) 요양소에 입원하여 2년여 뒤 51세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요독증(uremia)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한편 부인 에머리는 아들 파울이 있는 팜 비치에서 1972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배론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Baron Hans Gunther von Dincklage, 1896~1974)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Freiherr' 즉 'Baron'이란 칭호가 붙었다. 당시 그는 독일 외교관으로 파리에 주재하며 테니스 선수, 플레이보이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2011년 8월, 파리 주재 미국 저널리스트였던 할 본(Hall Vaughan, 1928~2013)이 "적과의 동침: 코코 샤넬의 은밀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딩클라게는 환지중해에서 첩보 활동을 하여 요제프 괴벨스에게 직접 보고한 나치 선전 장교였으며, 스파이 번호 'F-7124'인 샤넬은 '적과의 동침'을 하며 독일의 첩보활동에 협력했음을 폭로했다. 


 그 하나의 예가 1943년 후반기 무렵 나치 SS고위층에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별도의 '평화 서곡 협상안'을 만들어 작전코드명 'Modelhut (Model Hat)'로 극비리에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전달하도록 제안했다는 것이다. 


 전후 샤넬은 조사를 받았으나 영국의 왕실을 포함한 상류사회 인맥과도 깊은 교류를 했던 그녀인지라 처칠 수상의 외교적 중재로 풀려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따위의 일을 귀찮아하고 대수롭잖게 여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질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1920년 여름 샤넬은 스위스에 있는 이고르 가족이 파리에 기거할 집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들을 파리 교외에 있는 그녀의 새저택 '벨 레스피로(Bel Respiro)'에서 지내도록 제의한다. 자존심 강한 이고르는 샤넬의 제안을 일단 거절해보지만, 아내와 네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망명객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7월 4일(수) 12~16시 갤러리아 문화센터에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역사 속 서태후),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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