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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III)-'불멸의 연인' (Immortal Beloved)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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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남긴 편지의 주인공을 찾는 여정 

 

 

(지난 호에 이어)
 동생과 언니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적이었다. 여성적인 성격을 지녔던 요제피네와 달리, 언니 테레제는 씩씩한 여장부 스타일이었으며 사회활동도 활발히 해서 1826년에는 모국인 헝가리에 최초의 보육원을 설립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행한 결혼으로 험한 인생을 살다간 여동생과 달리, 테레제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자신이 세운 보육원에서 봉사하면서 평온하게 살았다.


 테레제가 남긴 일기와 서간은 베토벤 연구자들에게 대단히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베토벤과 브룬스빅 가문의 처절한 관계 및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연애사를 상당히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자. 그 다음 용의자는 헝가리 귀족 출신 안나 마리 폰 에르되디(Anna Marie von Erdoedy, 1779~1837) 백작부인. 안나 마리는 18살에 페테르 폰 에르되디(Peter von Erdoedy) 백작과 결혼 후 첫 아이를 낳다가 마비증세를 일으켜 사망 위기까지 갔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 마비증세의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저는 장애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어서 전문 연주자로도 손색이 없는 피아노•바이올린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름 작곡도 했다고 한다. 


 안나 마리(이사벨라 로셀리니•66)는 찾아온 쉰들러에게 술을 권하며 베토벤을 회상한다. [註: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과 이탈리아 유명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1906~1977) 사이에서 난 쌍둥이 딸이다.]

 

 

 

 


 베토벤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중 1악장을 연주하다가 귀가 들리지 않아 지휘를 엉망으로 하여 관현악단원들과 청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을 때, 청중석에 있던 안나 마리가 일어나 무대 위에서 그를 부축해 데리고 나오면서 베토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 장면에 베토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마치 고래울음소리 같은 효과음을 넣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상태를 듣고 느끼도록 만든 버나드 로즈(Bernard Rose•58)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한편 안나 마리의 남편 페테르는 사업상의 이유로 1807년 비엔나를 떠나 1812년에야 돌아오는데, 1807년은 베토벤이 브룬스빅 가문의 두 자매 요제피네, 테레제와 모두 결별한 시기였으니,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던 베토벤은 안나 마리로부터 많은 정신적 도움을 받았으며, 그녀에게 보낸 편지마다 '내 영혼의 고해사제'라는 찬사를 적어 보냈다고 한다. 

 

 

 


 1남2녀의 아이 셋과 살고 있던 안나 마리는 곧 베토벤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최고의 관객이자 그에게 진지한 음악적 조언을 해주는 최고의 매니저가 되었다. 그런데 유럽의 평화를 기대했던 영웅 나폴레옹이 그도 전제군주와 다름없는 황제로 변신하여 비엔나를 공격할 때, 폭격으로 아들을 잃은 그녀는 나폴레옹을 저주하게 된다. 이때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이 "교향곡 5번, 작품 67". 베토벤은 배신감에 그 악보에서 '보나파르트' 이름을 지워버린다.


 또한 안나 마리는 베토벤이 평생 비엔나에 머무르게 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08년 나폴레옹의 셋째 남동생이자 나폴레옹에 의해 급조된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 1784~1860)가 베토벤에게 고액의 연봉을 받는 궁정악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자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던 베토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이 소식이 들려오자 안나 마리는 베토벤의 열성팬이었던 롭코비츠 보헤미아 공작(Prince Lobkowitz, 1772~1816), 킨스키 공작(Prince Kinsky, 1781~1812), 그리고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 1788~1831) 등 세 부자귀족을 설득하여 베토벤이 비엔나에 계속 머무를 경우 연 4,0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후원약속을 얻어냈다. 그 덕분에 베토벤은 궁정악장 자리를 포기하고 평생 비엔나에 머무를 수 있었다. [註: 플로린(Florin)은 당시 서유럽에서 통용되던 금화로 1 플로린의 가치가 14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거액의 연봉이다.] 


 베토벤이 1809~1811년 사이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5번, 작품 73 '황제'"는 그의 후원자이며 제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곡이다. 또 베토벤은 1808년에는 안나 마리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일종의 음악모임(또는 사교모임)에 참여하기도 하여 그 고마움을 전달하고 또 죽은 그녀의 아들을 기리기 위해, 1809년 피아노 삼중주곡 작품 70, 1번 D장조 '유령(Ghost)'과 2번 E-플랫 장조 등 두 곡과 첼로 소나타 작품 102, 1번 C장조와 2번 D장조 두 곡을 헌정했다.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해보면 안나 마리는 음악적 재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지성과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다수의 연구가들은 이 안나 마리와 친하게 지냈던 기간을 베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보고 있다. [註: 1823년, 안나 마리의 남편 페테르 폰 에르되디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1773~1859)의 단속령에 걸려 비엔나에서 추방명령을 받는다. 이에 에르되디 부부는 비엔나를 떠나 뮌헨으로 가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쉰들러는 자신도 한때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작품 47 '크로이처(Kreutzer)'" 연습회에서 이 소나타를 작곡한 위대한 베토벤을 만난 후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한계를 느끼고 베토벤의 친구이자 비서로 그의 여생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註: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은 원래 아프리카 출신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리지타워(1778~1860)에게 헌정한 곡이었으나 조지가 베토벤의 여자친구를 모욕하는 바람에 말다툼 끝에 취소하고, 대신 프랑스 지휘자•작곡자•바이올리니스트 로돌프 크로이처(1766~1831)에게 헌정했다.] 


 베토벤은 쉰들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무서운 걸세. 왜 인줄 아나? 음악은 작곡자의 정신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청중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음악은 최면과 같아. 이 곡을 썼을 때의 내 마음의 상태를 느낄 수 있겠나? 남자가 연인에게 가고 있는 중일세. 그런데 빗속에 마차는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지. 그녀는 영원히 기다리지 않지. 바로 그 남자의 초조한 심정을 표현한 거라네. 음악이란 그런 걸세. 작곡자의 감정이지. 듣는 사람의 입장 및 환경은 중요하지 않아. 작곡자의 감정을 느껴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 점이 중요하지."

 

 

 


 어느 날, 쉰들러와 함께 악보를 정리하던 베토벤이 악보가 없어졌다며 동생 카스파르(크리스토퍼 펄포드•63) 집에 쳐들어 가서 악보를 훔쳐갔다며 온 집안을 뒤진다. 악보가 나오지 않자 제수(弟嫂)인 요한나(요한나 테르 스티게•57)를 지목하고 '창녀'라고 욕을 하자 두 형제는 어린 카를(매튜 노스)이 보는 앞에서 죽으라고 싸운다. 

 

 

 


 카스파르 판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1806년 5월 26일 바덴의 가구 제조업자의 딸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ss van Beethoven, 1784~1868)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 4개월 만에 아들 카를을 낳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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