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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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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를 일컬어 정보 홍수의 시대라고 한다. 손바닥 안에 있는 전화기에 몇 자를 처넣기만 하면 세상의 온갖 지식과 정보들이 금방 쏟아져 나온다. 그 조그마한 기계 속에 웬만한 도서관보다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사전이나 지도책, 전화번호부는 물론이고 수만 권의 장서도 필요가 없어졌다. 불과 1-2십 년 전까지도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인터넷과 유튜브 덕분에 누구나 텔레비전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자 그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이다.

 요즘 나는 중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중국계 캐나다인 잰 웡이 쓴 ‘레드 차이나 블루스(Red China Blues)’란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맥길대학을 다니던 1972년 모택동 사상에 매료되어 중국 당국에 끈질기게 간청한 끝에 마침내 비자를 받아 공산화된 중국에 유학한 최초의 서방국가 출신 학생 두 명 중 한 명이다.

한창 감수성과 지적 욕구가 강하면서 세상과 기성세대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인 대학 초년생이었던 열아홉 살의 저자가 ‘사회주의 천국’에 대한 환상에 젖어 마침내 그 ‘천국’으로 직접 들어가서 노동자계급 ‘동무’들과 같이 섞여서 땀 흘리며 육체노동을 하며 자신 속에 마지막 남아 있는 브르죠아 근성을 말끔히 씻어낼 기회를 잡았다고 흥분해서 여행을 준비하는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이 후 북경대학에서 유학 중에 겪었던 일들과 나중에 신문사 특파원으로서 목격한 1989년 천안문 사태까지 자세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책이다. 접시물보다도 얕은 지식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대단한 지성인인 듯한 착각에 빠져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같은 책들을 가슴 두근거리는 충격을 안고 읽어 내려갔던 대학 초년생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 그 책 내용 중에는 서방 언론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있었다.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자기의 꿈같은 북경 생활을 자기 혼자 누릴 게 아니라 서방세계에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잰은 미국의 대표 신문사 세 군데와 캐나다의 한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북경대학에서의 생활을 알리는 기사를 써서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중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신문사에서는 기사를 보내주면 수정 없이 실어주겠다고 바로 답이 왔다.

이어서 뉴욕에 있는 신문사에서도 답이 왔는데 내용은 이랬다.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건 내용의 정확성입니다. 절대적으로 편견도 없고, 당국의 검열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정확성을 보장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지도 못 하고, 당신의 신뢰성에 대해 더 조사해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더 이상 진행하기는 곤란합니다.”

워싱턴과 캐나다 신문사에서는 아예 답이 오지 않았다. 뉴욕에서 날아온 답장에 기분이 상했던 잰은 결국 아무 매체에도 기사를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과 중국을 각각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 부를 정도로 공산권 국가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장막 내부에 직접 들어가 살고 있는 서방국가 출신 대학생이 보내오는 생생한 스토리는 누가 보더라도 대형 특종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신문사는 그 내용의 신뢰성을 문제 삼아 그렇게 거절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014년 3월 12일 뉴욕 맨해튼에서 대형 아파트 폭발 붕괴사고가 터졌다. 사고가 나자 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매체 웹사이트들은 시시각각 올라오는 속보와 긴급 뉴스들로 도배질이 되었다. 사고가 난 아파트는 위에서 언급한 뉴욕 소재 신문사의 본사에서 채 20분이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론사인 이 신문은 사고가 발생한 즉시 20여 명의 취재인력을 투입해 취재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 신문이 ‘뉴스속보’란 이름으로 건물 붕괴 소식을 처음 전한 건 사고 발생 후 1시간 45분이나 지난 이 날 오전 11시 16분이었다. 오후 들어서도 관련기사는 3개가 고작이었고, 저녁에 다섯 개로 늘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한국 언론들조차 웹사이트에 관련기사를 3-6개씩 올려놓은 뒤였다. 당시 이 신문의 편집국장 질 에이브럼슨은 거의 사흘 밤낮을 회사에 머물며 정확하게 확인된 기사만 내보냈다. 덕분에 속보경쟁속에서 몇 건씩 오보를 내보냈던 대부분의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이 신문은 한 건의 오보도 내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서나 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언론매체를 통해서 파악하고 이해한다. 요즘은 신문, 방송, 잡지 등 전통적인 형태의 언론매체 외에도 인터넷을 통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예전에는 신문 한 두개만 읽으면 대충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정보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었는데,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게 되었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다 못해 쓰나미로 밀려들지만 정작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정확하고 믿을만한지 판단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다 보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가짜와 진짜를 가릴 방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정보 소스들만 골라서 보게 되고, 그런 확증편향적인 성향은 점점 더 한 쪽으로만 쏠리게 되어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 몇 해전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동안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칼럼 글을 많이 썼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시사칼럼 쓰기를 중단하고 말았다. 칼럼의 소재가 되는 사건, 사고,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실체 파악에 점점 더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한국 내 뉴스와 관련해서 더욱 두드러졌다. 실체적 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위에 언급한 신문과 유사한 노력을 하는 매체는 단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동안 한국 정치와 사회에 관한 시사칼럼을 꽤 많이 써왔으면서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나는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다. 아직도 온갖 주장들만 난무할 뿐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살, 대통령 탄핵, 4대강 녹조 논쟁, 여객선 침몰사고에서부터 최근의 JTBC 사장 과천 접촉사고, 조국 관련 뉴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정보가 혼란스럽지 않은 게 없다. 실체를 파악하려고 깊이 들여다 보면 볼수록 진실은 점점 더 흐릿해져서 안갯속을 헤매게 된다.

? 이런 경향은 근래 들어 점점 더 심하게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고 영향력이 큰 사건이나 사고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똑 같은 사안을 놓고 한 쪽에서는 “이 것은 누가 보더라도 A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 것이 B인 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명명백백함에도. ”라고 한다. 그러면서 “저 사람들의 뇌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저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서로 상대편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둘 중 어느 편도 아닌 사람이 그 사안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양쪽 얘기를 들어서 대충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명백한 진실’은 ‘A나 B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님이 명백하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어떤 사안에 대한 건전한 토론은 고사하고, 그 시작점이 되어야 할 ‘실체적 진실’에 대한 합의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건전한 비판도, 토론도 불가능하다. 오직 핏발 어린 주장과 우격다짐과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경멸만 난무할 뿐이다. 우리 시대의 비극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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