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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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 (50)-반공의식의 쇠퇴(5)
samkang39

 
 

 

 

(지난 호에 이어)


- 평화올림픽이다. 북한도 손님인데 어떻게 대해야 하나?


 “손님으로만 대해주면 된다. 박수 치고 환호하게 되면 북한은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전술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 현 정부 대북 정책은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 문제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한 전문가들 얘기를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정부든 내 정권에서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빼야 한다. 다음 대로 넘긴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서두르면 실수를 하게 된다. 북한은 절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 김신조 “나는 체포된 공비가 아니다. 국방부가 바로잡아 주길”


 개인적인 얘기로 넘어갔다. 동료와 가족들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그렇게 무섭게 훈련을 받은 김신조였지만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체포된 것이 아니고 투항한 것이다.”


-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철길을 깔아야 기차가 달릴 수 있다. 관광지도 자원도 없는 한국이 북한의 도발 등 그 어려움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 철길을 만든 것이 박정희다. 잘한 건 잘한 것이다.” 


- 한국에 왔을 때 한국군은 어떤 상태였나?


“1968년만 해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많았고, 군 훈련 운영 시스템 등도 북한이 앞서 있을 때다. 휴전선 방어도 북쪽과 달리 남쪽은 허술했다. 나는 1.21사태 이전에 두 번이나 휴전선을 통해 한국에 내려와 정찰작전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유격’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방첩대에서 조사 받으면서 내가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과 전술을 알려줬다. 예비군도 그 때문에 창설된 것이다.


(1•21사태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방위 체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해 2월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4월 1일엔 예비군이 창설됐다. 모든 성인에게 12자리(지금은 13자리)의 숫자가 부여되는 주민등록증이 처음 발급된 것은 11 월이었다.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오던 김 목사는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 방첩대에서 풀려난 이후 사회생활 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에서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2, 3개월 다니다 인천에 있는 화약공장 견학을 다녀와서 바로 그만뒀다. 만약 공장이 무슨 사고로 폭파되기라도 하면 바로 내가 뒤집어쓸 것 같았다. 폭파범 누명을 씌워 희생양을 만들까 봐 걱정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이리역 폭파사고가 있었다. 도시가 잿더미가 됐다. 그게 그 회사 관련 사고였다. 계속 다녔으면 난 이미 (폭파범으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 시선은 어땠나?


 “난 지금도 지하철을 잘 안 탄다. 얼굴 알아보고 대뜸 ‘너 김신조지? ×××’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 때문에 군대 6개월 더 복무했다. 엄청 고생했다’며 화를 낸다. 처음 회사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욕 정말 많이 먹었다. 당시에 언론에 너무 많이 보도가 돼서 어른들 중에는 지금도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이후 건설회사에 다시 취직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내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됐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보강연과 신앙생활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아들딸과 손주 등 10명이 넘는 가족을 이뤘다.” 행복하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여는 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한국에서 행복을 얻었는데… 경기 파주 문산 쪽에 가면 적군묘지라고 있다. 1•21사태 때 숨진 동료, 친구들이 묻혀있다. 북한이 이제 그들의 유골을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가족 생각이 난다.”


-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나?


“처음에 내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했을 때는 북한에서 나를 영웅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가 안보강연 다니고 하니까 1980년쯤에 부모님을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 시내 운동장에 세워놓고 1만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을 한 거지. 그 얘기도 몇 년 후에 청진에서 온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7남매였는데 6명의 형제는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봤는데 북한에서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거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 언젠가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보고 싶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건 미래고, 빨리 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노력할 뿐이다. 아들딸과 손주들에게 고향집 약도를 그려줬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나서 통일이 되더라도 꼭 고향에 가보라고 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50년 전 나는 분명히 투항했다. 그런데 국방부 기록은 아직도 ‘체포’로 돼있다. 당시 군인들이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어릴 때 내가 ‘체포된 무장 공비’라는 교과서를 읽고 자랐다. 난 체포된 게 아니다. 국방부가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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